그리고 베릴은 인간이다. 그것도 욕구 불만 상태인 인간! 그녀는 바로 앞에서 어른거리는 유혹에 플라당 넘어갔다. 남.
초골릿 냄새가 날 것 같은 피부를 욕심껏 입에 물자 커다란 몸이 바위처럼 굳었다. 하지만 베릴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입 안에서 탄탄한 피부를 굴리며 빨아들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웃.......
낮은 신음과 함께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아팠지만, 극락을 누리는데 이 정도쯤이야 기꺼이 참을 수 있었다. 목선을 따라서 활아 올라가는 혀에 살짝 태운 설탕의 단맛이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남자를 애무해 본 적도, 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는데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그녀는 무아지경으로 혀를 놀렸다. 앙헬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슬쩍 활자 그가 파르르 떨었다.
"열어 줘요."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며 조르기가 무섭게 굳게 닫혔던 입술이 스르르 열렸다.
'아, 좋아.......
베릴은 촉촉한 점막을 헤집으며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앙헬은 온몸이 달콤한 남자 같았다. 톡톡 건드리자 움찔거리는 혀까지 달고 귀여웠다.
하지만 그런 감상도 잠시. 두툼한 혀뿌리를 긁어 올렸을때부터 전세가 역전되었다. 아파한다는 걸 깨닫고 더는 세게 붙들지도 못한 채 휘둘리기만 하던 그의 욕망도 한계선에 다다르며, 일순 돌변한 것이다.
하, 으........
머리를 묶었던 끈이 툭 풀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앙헬의손가락이 새카만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베릴의 미간에 금이 그어졌다. 그의 혀 놀림은 거칠고 서툴기만 한데,그런데도 느끼는 자신이 이상해서.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짜릿해서.
"으음, 하아.”
셔츠 아래로 들어간 베릴의 손이 깊게 팬 등줄기와 울퉁불퉁한 복부를 차례로 어루만지더니, 곧 제자리를 찾아가듯가슴으로 올라갔다. 셔츠 단추는 성한 것이 없을 정도로 다터져 나갔지만 난생처음 겪는 자극에 푹 빠진 두 사람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눈독만 들였던 그의 가슴은 막상 베릴의 손아귀로 다 잡을수도 없었다. 하지만 손에 착 감기는 이 탄력과 말랑말랑함...... 영원히 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최근 몇 년간 이렇게 열중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집중했다. 손을 넓게 펴 말랑한 근육을 느끼고, 손가락 끝으로는 귀여울 정도로 조그만유두를 괴롭혔다.
'아...... 빨고 싶어.'
혀로 핥고 잇새로 오독오독 깨물어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꼬집듯 집어 들었다. 그러자 낮은 신음과 함께 아래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던 것이 그녀의 배를 찔러 올리며 그대로 젖어들었다.
키스와 가슴만으로 가다니.
'뭐 이렇게 야한 남자가 다 있어?'
싸고 난 후에도 배를 찌르는 강도는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싼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앙헬은 그 와중에도 키스에 열중해 있었다. 이마부터 가슴팍까지 다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워하면서도 물러나기는커녕 베릴의 허리를 붙잡아 자신의 몸에 더 바짝 붙였다. 그 자신감(?)에 그녀의 머리로 섬광같은 깨달음이 스쳤다.
'이 사람이 내 인연이구나. 이 사람을 만나려고 지금껏 제대로 된 남자를 못 만난 거야, 나는!'
베릴의 손이 근육의 골을 따라 스치며 아래로 향했다. 기대감인지, 긴장인지 모를 감정으로 두 사람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손끝이 배꼽 위로 바짝 올라붙은 열기에 닿으려던 순간이었다.
쾅!
무언가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화들짝 놀란 베릴과 앙헬이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얼른 창문 쪽을 확인한 베릴이 이를 갈았다. 도망가는 뒤통수가 눈에 익었다.
'저 붙박이 자식이! 왜 방해를 하고 난리야!'
뭘 던진 건지 유리창은 깨지지 않았지만, 그녀와 앙헬을휘감았던 열기는 산산이 조각난 뒤였다.
이성이 돌아온 앙헬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조금전까지 있었던 일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지금, 무슨.......
골이 엉망이었다. 입술은 부었고 가슴은 화끈거렸으며 바지는 축축했다. 분명히 그래도 좋았는데, 베릴에게서 떨어지자마자 부정적인 생각이 다시 그를 찾아들었다.
평생 그를 좋아해 준 여자는 없었다. 심지어 누구나 그를아는 호르혼에서조차 여인들의 눈길은 그가 아니라 부하들에게만 꽂혔다. 하물며 세련된 제도 여자는 어떻겠나. 그저호기심에 희롱한 것일 텐데 바보처럼 휘말려 버렸다.
앙헬이 기대를 버리는 방법이었다. 언제나처럼. 그런데 어쩐지 지금은 심장 부근이 뭐에 찔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그 껄끄러움까지 삼키려고 노력하며 서둘러 망토를 다시둘렀다.
“죄송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내일 이 시각에 오겠습니다.”
"네? 아니, 잠깐만요!"
어떻게 분위기를 다시 잡을까 고민하던 베릴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손을 뻗기도 전에 그는 의상실 문을열어젖히고 있었다. 뒤늦게 쫓아 나갔지만 길에는 이미 누구의 그림자도 남지 않았다.
그녀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름도 못 물어봤는데......
하루 종일 어젯밤의 고객님 생각만 났다.
연회용 정장 한 벌 정도야, 드림 바디를 꿈꾸며 만들어 뒀던 걸 조금씩 고치기만 하면 됐지만....... 그런 건 고객님은모르셔도 되는 재단사의 비밀이었다.
남는 시간에 앙헬의 다음 주문품을 만들면서도 베릴의 시선은 자꾸만 창밖을 향했다. 키가 크고 금발인 사람이 지나간다 싶으면 긴장하며 내려다보기를 십수 번, 드디어 아래층에서 도어 벨 소리가 울렸다.
"아, 아직 해가 안 졌는데! 그래도 그 사람이겠지?"
얼른 거울을 확인한 베릴이 바늘을 핀 쿠션에 꽂아 두고아래층으로 날듯이 뛰어 내려갔다.
그러나 밝게 빛나던 얼굴은 문가에 선 사람을 보자마자 싸늘하게 식었다. 상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소했다.
"왜. 그놈인 줄 알았어?"
매일 길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남자, 어젯밤 앙헬과 그녀의뜨거운 한때를 방해한 그 남자였다. 비웃음도 잠시 그의 얼굴도 베릴만큼이나 굳어 갔다.
나한테 눈웃음칠 땐 언제고 다른 놈한테 꼬리를 흔들어?"
베릴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동안 감시하던 이유가 이거였다니. 사실 그녀는 이 자식이 말하는 게 언제인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평소에는 잘 웃지도 않는데, 그날따라 단골손님이라도 다녀갔나 추측할 따름이었다.
"나가요. 경비대 부르기 전에. 지금까지 얼쩡대면서 감시한 거, 다 말할 테니까!"
"경비대가 네 말을 믿을까? 주변 가게에서도 다 네가 튕기는 거라고만 생각하는데. 그동안 공을 좀 들였거든."
“뭐라고?"
그냥 오지랖들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였다. 남자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위를 주웠다.
"나의 사랑스러운 베릴. 머리채를 몽땅 잘라 버리면 다른 남자 앞에 나서지도 못하겠지."1
“이런 미친!”
안 그래도 하얀 베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센 제국에서 여자의 머리카락이 짧게 잘렸다는 건 노예나 천민이라는 의미였다. 모자로 가리는 거야 외출할 때나 가능하지. 실내에서 손님을 맞는 그녀는 숨길 수 없었다.
베릴은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꼭 붙잡고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근육질이 아니라도 상대는 남자다. 보폭 자체가 달랐기에 금방 따라잡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꺄악! 야! 내 머리 자르면 가만 안 ! 미친놈아! 꺼지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다른 놈 앞에 얼굴 내밀 일은 이제 없을 테니까."
남자는 베릴의 발버둥에도 아랑곳없이 잔혹한 웃음을 지으며 가위를 올렸다. 번뜩이는 날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던베릴이 눈을 질끈 감던 찰나였다.
퍼억! 쿠당탕.
타격음과 동시에 몸이 가벼워졌다. 뒤이어 무거운 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벌벌 떨던 베릴의 코끝으로 달콤한 냄새가 흘러들었다.
'이, 이건.......
어젯밤의 고객님에게서 나던 향기였다. 저도 모르게 솟은눈물로 축축해진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역시나 그 사람이다. 험악하게 찌푸린 얼굴은 흥흥하기 짝이 없었지만, 녹색눈은 걱정을 가득 담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앙헬의 눈을 보는 순간 참았던 것이 툭 터지는 것만 같았다. 소리 지르고 욕을 했다고 한들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베릴은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부모님이돌아가신 후로 이렇게 걱정 어린 눈으로 그녀를 봐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무섭....... 무서웠....... 흐어엉!"
베릴을 마주 안아 보듬는 앙헬의 마음도 복잡했다.
오늘 만난 황제는 해적을 토벌한 상으로 작위와 함께 호르흔 일대의 땅을 그에게 내리겠다고 귀띔했다. 단, 조건이 불었다.
(혼인하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에 만난 재단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도 묻지 않고 도망친 주제에 퍽 뻔뻔하다고, 앙헬은 자조했다.
(꼭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혼인하고 일가를 이룬 영주는 영지민들에게 안정감을 주지.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니 말일세.)
<.......)
상대가 없어서 그러는 거라면 참한 영애를 추천해 주지.)
젊은 시절 대륙을 일통한 황제는 나이를 먹으며 능구렁이가 되었다. 무턱대고 목을 자르기 전에 혼인을 이용하는 것이다. 불씨가 생기지 않도록.
그러한 정략혼 중 하나를 꼽자면, 에파타 대공과 모체나 후작가를 엮어 준 일이 있겠다. 중앙의 일에 밝지 않은 앙헬의 귀에까지 흘러들었을 정도로 유명한 건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어전에서 물러 나온 앙헬은 수하들에게 황제의 말을 전했다. 그들의 반응도 앙헬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정략혼이잖습니까. 받아들이실 겁니까?)
호르혼 해군은 앙헬의 부모님이 기초를 다지고 그가 대를 이어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단승 작위를 받았던 부모님과 달리 그는 성姓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쥔 것이 없다. 단적으로 말해 어느 날 황제가 변덕을 부려 그를 파면하면 갈 곳조차 없는 신세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바로 황제의 명을 받아들였어야 했다. 그 순간에도 재단사만 생각나는 자신이 낯설고 이상했다. 그러면서도 앙헬은 결국 베릴을 찾았다.
......모르겠군. 일단은...... 의상실로 가지.)
해가 질 때까지는 아직 멀었건만, 어쩐지 그 사람을 보고 싶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녀가 작업하는 옆에 함께 있고 싶었다. 그를 어루만졌던 조그만 손끝이 바늘을 어떻게 쥐는지, 그가 삼켰던 입술은 어떻게 실을 끊어 내는지 알고 싶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설렘을 안고 도착했을 땐, 의상실 안에서 희미한 비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꺅! ......미친......!)
앙헬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의 앞에서 문을 열려던 보좌관도 밀치고 뛰어 들어갔더니, 베릴이 웬 망할 새끼에게 깔린 채 위협당하고 있었다.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웬만하면 민간인을 건드리지 말자는 주의였지만 이 순간에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퍼억!
한편, 앙헬의 수하들은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에게 맞아 날아간 비실이를 야무지게 포박해 두고, 그들은 서로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분명히 어제 처음 방문했다던 곳인데. 아는 사이인 것처럼 스스럼없이 안겨서 우는 여자나, 밀어내기는커녕 자기가 위협당한 것처럼 아픈 표정으로 보듬는 앙헬이나.
'허어?
'오호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더군다나 그 여자를 안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던 앙헬은 그들을 향해 눈짓했다. 두 번 다시 눈에 안 띄게 처리하라는 뜻을 담아서.
그리고 한동안 시간이 흘러도 그는 내려오지 않았다. 수하들은 흐뭇한 확신과 함께 자기들끼리 숙소로 돌아갔다.
"우리 대장, 정략결혼 없이도 곧 영주님이 되시겠는데?"
***
"다친 곳은 없습니까?"
앙헬이 베릴을 조심스럽게 눕히며 물었다. 그녀는 힘없이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런데 머리가 좀 띵해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두통약을 사 오겠습니다."
“아니...... 그냥 물을 좀 마시고 싶어요."
앙헬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릴을 일으켜 안았다. 심지어 손수 물을 먹여 주기까지 하며 그가 씨근덕거렸다.
'이렇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여자를 깔아뭉개다니."
직접 손보겠다고 할 걸 그랬나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손이 움직였다. 세게 당겨져 아팠을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베릴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다시 눕혀 주려 했지만, 베릴은 침실까지 들어온 앙헬을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녀를 보살피는 손길이 이토록스스럼없는데 마음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바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양팔로 꼭 껴안자마자 그의 몸은 또 뻣뻣하게 굳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같이 있고 싶어요."
“그, 그러니까 어째서.......”
"첫눈에 반했어요. 당신이 우리 가게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언제 힘이 없었냐는 듯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오히려 질문한 앙헬이 더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놀리지 마십시오.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저 같은 것에게 반한단 말입니까?"
"나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요?"
"......그, 크흠. 예쁘...... 예쁘십니다."
우물거리다 나온 말이 겨우 그거였다. 앙헬은 말재주 없는 스스로를 저주했다. 하지만 베릴은 기분이 좋았다. 반해 버린 남자가 자기더러 예쁘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만면에 웃음이 도는 게 당연했다.
서늘한 미모가 웃으니 화사하게 빛났다. 거기에 얼이 빠진 앙헬이 멍하게 바라보자, 베릴은 더 활짝 웃으며 물었다.
“그럼 당신 같은 사람은요?"
“빈말로라도...... 당신과 어울린다고는 할 수 없는........”
베릴은 손가락을 세워 자신감 없는 말만 내뱉는 못된 입술을 틀어막았다. 사람들의 인식이 그러니 이해는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건 마음이 아팠다. 이런 몸이 어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던가?
"아닌데. 당신은 내 이상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