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음계록(蔭界錄) - 1999[판타지](9)
4.음계의 절대자
:
디도는 진짜 방주였다.
:
그때의 잔치는 아주 멋졌지. 수많은 음계의 미소녀들에게 둘러싸이던 멋지고 음탕했던 잔치. 음료의 바다와 고기들의 숲에 둘러 싸인 체 올누드의 그녀들이 벌이던 농구 및 축구 및 씨름을 보며 즐기던 다소 추잡스런 기억들이 일어난다. 동혁은 연이어 자료칲에서 나오는 빛이랑 소리를 느낀다. 마치 회상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리메스(경계)는 쉽사리 나아가지 않았다. 마하 지바를 이루고 있는 계약은 너무나 굳세 도란돔이라는 이물질을 받아주지 않는다. 파고 들면 파고들수록 마하 지바는 더욱 크디 크고 굳은 얼개로 다가온다.
동혁은 수영장의 모서리를 수루치의 음부로 닦다가 말한다.
“ 어쩐다지? 이러고 있으면 베끼는 이가 나올 지도 모르는데 ”
“ 설마요 ”
“ 설마가 아냐, 수루치. 널 가지고 포르노 실습하는 것도 지겹다 ”
동혁이 물 속으로 뛰어들어 고개만 내민다. 물에 젖은 수루치가 타일 위로 일어난다. 물 찬 제비라는 말이 떠오른다.
“ 마하 지바 말고 파라브라자 많은 데 없나 ”
“ 많아요 ”
“ 정말?! ”
“ 마하 지바는 음계의 한 조각일 뿐이지요. 다른 곳들은 계약이 망가져서, 힘 없는 아한카라들과 떠도는 파라브라자로 가득차있어요. 음계 진공도 아주 많고요 ”
“ 그러면 그곳들을 먼저 집어 두는 게 좋겠어. 디도, 내 말 잘 들리지? 수루치랑 같이 다 집어먹으라구 ”
디도랑 수루치는 여러 마르가들을 끌고 돌아다니며 파라브라자를 끌어모은다. 마음을 지닌 아한카라나 아비디야는 도란돔으로 데리고 와서 힘은 나날이 늘어난다.
이건 너무 쉽군. 그는 조금 허탈해한다. 하지만 정치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을 지녔다고 똑똑한 건 아니고, 똑똑하다고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몇몇 도란돔 주민은 도둑질을 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디도는 촘촘하고 튼튼하게 계약 그물을 짜서 도둑질을 못 하도록 막아버린다. 도둑질은 디도랑 수루치만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수이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물리 권력인 셈이다. 물리학을 권력이 써서 순간 이동 장치, 사물 바꿈이, 상호 작용 바꿈이, 웜홀 머신, 시공 왜곡 장치, 준광속 추진기 따위를 독점하는 미래에 가능한 정치 짜임. 그 권력이 지키려고 하는 것도, 다른 권력들과 다름없이 지리멸렬하고 쓸데없는 것들일 것이다. 권력이란 건 그저 있기 위해 있는 불행 제조기니까.
물론 댓가는 있다. 성기어지고 있던 계약들이 더욱 굳세어진다. 덕분에 디도는 그들이 나름껏 하고 있던 역할을 스스로 떠맡게 되어 도란돔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게 되었다. 이렇게 효율성이 떨어지는 바람에 로마나 잉카 같은 세계제국은 줄줄이 망해야했다. 효율성 쯤은 도란돔에겐 그 아무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늘어나는 파라브라자와 새로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다움이 있기에.
도란돔의 백성들 거진 다는 디도에게 무관심하고, 몇몇은 지지하며, 그보다 더 적은 수는 거스른다. 아직 거스르는 움직임은 없기에 억누름도 없다. 사실 저항할 필요가 있을까. 가만히 앉아 혼자서 모든 걸 다 풀어낼 수 있는데 말이다. 너무 많은 걸 바라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더 많은 걸 바래도 스스로의 틀을 무너뜨리지만 않으면 디도는 허락해준다. 사람에게 될성싶은 물리 권력 보다는, 너무나 너그러운 디도는 도란돔의 새 엄마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너무 부러운 삶이다. 동혁은 음계에서조차 그렇게 살 수 없는 스스로를 느낀다. 조금이라도 불안감을 덜어낼 수 있다면. 디도를 향한 사랑과 미움을 덜어낼 수 있다면. 그러려면 돌아가야 했다. 에너지계에서도 아주 작은 한 조각. 그의 방으로.
디떼가 갑자기 튀어나온다.
“ 짜자잔! 우리는 지금 파라브라자로 이루어진 띠로 마하 지바를 둘러싸고 있는 꼴이야. 물론 마하 지바가 지닌 파라브라자는 나머지 모두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게 할만치 많긴 해도 ”
“ 어느 정도인데 ”
“ 에너지계의 에너지는 처음이랑 바뀐 적이 없다는 것 쯤 알겠지. 짚신 벌레 한 마리가, 니가 온 볼 수 있는 우주의 역사 만큼의 시간이 흐를 때마다 한 번씩, 제 몸무게의 1000분의 1이 되는 물방울을 내뿜어, 그 물이 짚신 벌레를 뺀 나머지 에너지계 모두를 대신할 수 있을 때 걸리는 세월을 초 단위로 헤아려 나오는 숫자로, 마하 지바를 뺀 나머지 음계의 파라브라자를 곱해야 마하 지바에 있는 파라브라자 만큼이 될 수가 있지 ”
동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 그냥 곱셈해라. 그게 낫겠다. 난데없이 웬 불교식 표현이냐 ”
“ 알았어. 앞으론 그렇게 하지 뭐. 푸하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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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그냥 곱셈도 싫은데. 둘 다 개념이 안 잡힌다는 점에선 똑같지만, 불교식 표현이 나한텐 더 어지러워. 근데 그토록 마하 지바가 강하다면, 마하 지바에서 나올 수 있는, 널 베낀 이는 너보다 쉽게 강해질 수 있을 거 아냐 ”
“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내가 지닌 두 업을 어울려가며 나아가게 하고 있고 그것엔 끝이 보이지 않아. 그에 따라 파라브라자를 만드는 빠르기가 끊이지 않고 빨라지고 있지. 난 보다 적은 파라브라자로도 많은 파라브라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거야. 그에 더해 계약을 만드는 힘도 높아지고 있지 ”
“ 너무 자만하지 말라구 ”
“ 알았쩌 ”
이때 알아봤어야 했어. 동혁은 자료 칲을 잠깐 끄며 중얼댄다. 디도는 진짜 방주였다. 큰 물이 누리를 덮을 때 디도는 방주가 되어 몇몇 이만을 구할 것이다.
고조선의 신수두 부루처럼 길만을 가르쳐 민중 스스로 큰 물을 바다로 보내도록 이끌 지도 않을 것이며, 하나라의 우임금 마냥 민중과 더불어 산을 깨고 강바닥을 파서 모두를 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로지 노아가 되어 홀로 선 착함만으로 모든 것을 가늠하여 아무 거리낌 없이 어떤 목숨은 살리고 뭇 목숨을 죽이리라는 것을. 요한 묵시록의 예루살렘으로, 사람 백정들의 아크로, 가진 이들의 오키로 도란돔을 꾸밀 양임을 알았어야 했다.
지규라트의 그늘로, 시온 산의 기슭으로, 유럽의 어둠으로 음계를 이끈 건 결국 내가 아닌가. 목숨붙이다운 나쁨으로, 깨끗하고 밝으며 맑은 디도를 물들여 스스로 길을 찾는 마하 지바를 두들겨 부서뜨리라고 가르친 건. 대세기말의 중국 따위 악의 제국 쪽으로 도란돔을 조금이나마 끌고가도록 디떼를 이끈 건.
가르침을 내려 악을 저지르게 몰아간 짱들은 벌 받아야 한다. 명령을 받아, 합법 아래 온갖 허물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책임을 짱에게 미루기 좋아하는 꼬붕들도 댓가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경우가 다르다. 동혁은 스스로는 벌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스스로를 벌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그러기엔 동혁은 스스로를 지키고자 한다. 그러나 디도 카젤은 음계의 딸이며 에너지가 아닌 파라브라자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의 그녀에게 나쁜 뜻이 없었다면, 그녀에게 허물은 없는 것이다.
“ 나쁜 뜻이 있었을까, 글쎄. 있었을지도 몰라. 없었다면 내가 진짜 죽일 놈이지 ”
동혁이 다시 자료 칲을 본다. 언제나 그랬듯이, 관성에 몸을 맡겨버린 것이다. 절대 진리라 믿어지는, 뉴턴 역학의 3법칙들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이에게.
끝내 일이 터지고 만다.
같은 카젤 마르가에 들어 있는 센트리 카젤이 마하 지바에서 크나 큰 패거리를 이끌고 일어나 수많은 아한카라들을 지바 안에 가두며 그 파라브라자를 빼앗아간다.
디도에 따르면, 카젤 마르가는 바깥에서 오는 자극에 몹시 잘 떠밀린다 한다. 그래서 오히려 뒤떨어지는 경우가 아주 많다. 센트리는 운좋게 이를 벗어나 디도를 숨쉬었고 같은 결을 따라간 것이다.
같은 마르가이므로 비슷한 꼴을 띈 파라브라자를 움직인다. 때문에 디도랑 센트리가 부딪치면 서로 얼마나 부수느냐 보다는 얼마나 먹느냐에 따라 판은 갈릴 것이다.
디도랑 수루치는 도란돔을 요새로 삼아 센트리로부터 오는 압력에 맞서간다. 아직 센트리 카젤이 온 건 아니지만 벌써부터 그 무게는 서슬 푸르렀던 것이다.
도란돔은 한 걸음 한 걸음 슬기를 쌓아올린다. 빛나는 이성을 지닌 몇몇 지성들은 스스로 슬기를 찾아나섰던 것이다.
동혁은 디도를 통해 그들이 정보를 서로 나눌 수 있도록 이끌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은 정보를 팔아 스스로를 살찌우려 하지는 않았다. 디도는 정보를 서로 나누면 조금씩 파라브라자를 주었지만, 제대로 된 열매를 따지는 못하였다.
“ 좀더 많이 주지 그래 ”
“ 모르는 소리. 내가 지닌 파라브라자를 몽땅 줘도 저들은 지금과 다를 바 없을 거야. 설혹 지바를 부술 수 있는 힘이 내게 있어 저들을 협박한다 해도. 음계의 이성은 에너지계의 이성과는 달리, 잘 짜여지고 이어진 지바라는 틀 속에서 달금질되었어. 에너지계의 이성이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태어나는 것과는 다르지. 그래서 느리지만 보다 맑지. 니 말을 들으니까 이런 것 같아. 맞지? ”
“ 몇몇 SF 작가들의 곡두가 무너지는구나. 에너지계의 모든 이성이 죄다 위기를 이기고자 나타났다구? 외계인들까지? ”
“ 그럴 꺼야. 니네 이성은 생존 수단의 하나이고, 우리의 이성은 필연 속에서 나타난 거니까 ”
“ 알았어. 도란돔의 슬기는 어디까지 가 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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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멀리까지 ”
“ 음. 이거 두려운데. 자연 과학의 발달이 주는 두려움을 음계에 와서까지 느끼게 생겼으니, 원 ”
“ 그럼 나중에 데려다줄께. 자, 우리에게 정보를 주시는 분이여, 다음 분부를 내려주세요. 아마도 음계의 실정에 걸맞는 투쟁 방식을 만들어 놓으셨겠죠”
“ 물론. 힘의 여왕이여, 스승으로서 당신에게 또 하나 작은 숙제를 주겠어요. 오랜 음계의 역사 속에서 지바 안에 갇히고야 만 아한카라들을 되살려, 마음을 지녔다면 도란돔에 데려오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냥 있던 자리에 내버려 둬. 살아난 아한카라들은 파라브라자를 만들고 에너지를 만들어낼테고, 새로이 계약을 짜고 새로운 마르가를 이루려 할 꺼야. 그들은 너무나 약하겠지만 많은 수가 모이면 마하 지바를 흔들어댈 수 있을 거라 믿어 ”
“ 옛셜! 그들의 숫자는 너무 너무 많을 거야. 그들 수를 다 합치면 지금 살아 움직이고 있는 아한카라들 숫자 따위는 끝없이 작은 것으로 보일 거야. 효과가 좋겠는 걸 ”
디도가 날개를 떨치며 사라진다. 동혁이 햇살이 따사로운 들을 바라다본다. 산들 바람이 흐르자 풀빛 띠가 엹은 콩빛 들판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를 위한 디도가 만들어낸 우주. 낮은 수준이나마 마음을 가진 아비디야이기에 지금은 도란돔 안에 있다. 이름도 모르고, 지구의 것과는 많이 다른 온갖 풀들이 깔려 있다. 빛의 거품들이 어지러이 날리는 가운데 동혁이 속삭인다.
“ 브라자미 ”
브라자미가 나타난다. 그녀는 이스비니 아래에 있던 때와 같은 힘을 이제 지니고 있다. 이리시랑 세르기는 아직 놀란 마음을 멈추질 못해 파라브라자를 돌려 받지 못했다. 이리시나 세르기의 바람, 곧 마음을 놀란 체로 두려는 바람이 끝없다면 둘은 파라브라자를 돌려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수루치는 나날이 억세져 가는 팅킨 마르가의 라자로서 도란돔의 2인자였고, 브라자미는 그 다음이었다. 브라자미는 감시를 맡아 숱한 아한카라들을 몰고 다니며 도둑질이나 싸움을 하지 못하게 했다. 사실 그런 일은 지금껏 생겨나지도 않았다. 저 멀리 끝없는 파라브라자를 지녔다는 센트리만이 온갖 폭력을 휘둘러댈 뿐.
동혁은 아무리 음계에 오래 있어도 문외한에 지나지 않음을, 한낱 수컷 한 마리임을 느끼고 있다. 그는 곰곰히 스스로가 얼마나 디도에게 필요한 지 생각해 보았다. 정보를 주는 이로서는 틀림없이 그가 있을 바탕이 된다. 지금 그 바탕이 사라져가고 있다.
그래도 좋다. 멈출 수 있는 나아감이 아니다. 멈출 수 있던 때는 벌써 오랜 옛날에 지나갔다. 그가 쏜 활은 너무 멀리 나아가 그의 발로는 잡을 수 없다.
처음 디도랑 수루치를 만났을 때엔, 정보를 주는 이로서의 역할 따위는 없었다. 그때에도 둘은 잘 대해 줬었다. 그런 까닭이 아니다. 그들이 나쁜 뜻을 품고 있더라도, 스스로를 정보를 주지 않는다 하여 버리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은 까닭이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 날 도란돔의 연구소로 데려다 줘 ”
“ 알았어. 가자 ”
연구소 같지는 않다. 온갖 흉측스런 무리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끝모를 시공일 따름이다. 도란돔의 아주 작은 조각인 연구소들. 끝없이 많다는 연구소들 가운데서도 하나인 곳일 뿐인데도 그 모서리는 가이없음에 맞닿아 있다.
곳곳에서 엇갈리며 솟구쳐올라 하늘을 찌르는 솟대, 탑, 기둥, 오벨리스크들 가운데 하나로 발을 옮긴다. 동혁이 위를 본다. 입이 벌려지도록 고개를 다 젖혀도 끝이 안 보인다. 턱을 내리니 은은한 오로라가 발 밑에 깔려 있는 게 보인다. 출렁이는 빛의 춤사위.
꼼꼼히 살펴보니 이 탑은 포유류의 양물을 너무나 닮아 있다. 저 하늘 너머엔 터무니없이 큰 좆대가리가 있어 센트리의 음부를 향해 힘차게 달려 가고 있겠군.
브라자미가 말한다.
“ 동물학 연구실이야. 너나 디도를 연구하는 곳이지 ”
“ 해부라도 하겠다는 건가 ”
“ 디도는 모든 걸 먹으려드는 짐승이야. 센트리나 마찬가지로 그녀는 남의 것을 탐하지. 따라서 이 연구실은 센트리와 맞서는 기지인 셈이 되지 ”
디도는 센트리의 언니다. 이 말엔 따쓰한 사랑의 뜻은 없다. 그저 디도가 카젤 마르가에서 먼저 태어났기에 언니일 뿐이다. 지구의 가족이 지닌 나쁜 점들을 모두 빼고 좋은 점만을 크게 되살려 더욱 빛나게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적어도 디도에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있을까. 디도에게서 그가 느끼는 사랑, 미움, 부러움, 두려움, 즐거움, 슬픔, 기쁨을 그녀도 느낄 것인가.
벌레의 살점처럼 생긴 문이 열린다. 아스라히 뻗쳐 끄트머리가 없는 넓디 넓은 방이 펼쳐진다. 소용돌이치는 계단들이 곳곳에 보여 여러 층들을 잇고 있다. 음계에 그런 것이 필요없다는 것 쯤은 안다.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보이는 지는 알 수 없다. 언젠가는 알 수 있을 거라 여길 뿐이다.
“ 못 생긴 것들 뿐이군! ”
아무렇게나 생긴 놈들이 널린 채 몸들을 맞대고 뭐라 뭐라 중얼대고 있다. 브라자미가 말한다.
“ 저들 가운데선 아비디야들도 많아요 ”
그는 그 말투에서 경멸을 찾으려 한다. 그래야만 아비디야들을 짓누르는 힘이 있을테니까. 그러나 그런 걸 찾아낼 수는 없다. 설혹 그런 것이 있더라도 음계의 딸인 브라자미의 마음을 그가 무슨 수로 알 것인가.
“ 브라자미 이제 가 ”
“ 예 ”
그녀가 사라진다. 동혁이 걷는다. 그의 둘레엔 디도가 뻗친 수많은 더듬이들이 있다. 그것들이 있으므로 마음 놓을 수 있다. 연구실 안엔 빛이 가득차 일렁거리고 있다. 빛의 거품들이 돌아다닌다. 거품들을 들여다보면 갖가지 귀여운 생김새들이 보이곤 한다.
그가 갑자기 멈춘다.
“ 수루치? ”
그녀가 돌아다본다. 수루치를 닮았지만 아니다. 훨씬 키가 크고 가슴이랑 엉덩이에도 좀더 살이 올라 있다. 다리도 좀더 매끈하다. 온 몸의 거웃이 황금빛인 것이랑 고운 흰 살결은 같았다. 얼굴도 갸름하니 엇비슷하다. 날렵한 금테 안경과 이마에 두른 하얀 띠를 지녔다는 것이 눈에 띈다.
“ 아니었군. 진짜 많이 닮았어. 수루치랑 ”
“ 그렇게 보이나요? ”
그녀가 한바퀴 돈다. 어께 아래 등에 달린 두 쌍의 자그마한 잠자리 날개. 그녀가 말한다.
“ 제 이름은 에니치라고 해요 ”
“ 에니치? 무얼 하고 있지? ”
“ 앉아서 이야기하죠 ”
또다른 에니치가 바닥에서 솟아오른다. 다른 에니치는 바닥에 누운 다음 허리를 앞으로 구부려 발이 어께 앞까지 나오게 한다. 에니치가 다른 에니치의 엉덩이 위에 앉는다.
“ 제 무릎 위에 앉아요 ”
동혁이 다리 꼬고 앉자 에니치가 그의 뜨거워진 양물을 차가운 손으로 감싼다. 고운 팔이 동혁의 가슴을 감는다. 에니치의 볼이 뒤로부터 다가와 동혁의 뺨에 닿는다.
“ 동혁 님은 저희에게 많은 정보를 주셨어요. 언제나 고맙게 여기며 연구를 하고 있지요 ”
“ 짧기만 한 앎을 떠벌였을 뿐인 걸. 심드렁하게 지내기는 싫어서였을 뿐이야. 그나마 지구인의 지식들 뿐이라 음계의 연구엔 보탬이 안 되었을텐데 ”
“ 아닙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 속에서 방법론과 틀을 조금이나마 잡아낼 수 있었으니까요 ”
“ 뻔한 이야기지만, 음계의 알맹이를 알아내려 애쓰고 있겠지 ”
“ 예. 제법 이룸이 있었지요 ”
“ 알기 쉽게 말해 줘 ”
“ 먼저 우리가 얼마나 어려운 지부터 말씀드려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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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혁이 에니치에게서 일어난다. 에니치 하나만 보이고 있다. 그녀가 말을 잇는다.
“ 센트리 카젤은 지금도 무서운 힘으로 마하 지바를 빨아들이고 있을 거예요. 센트리는 디도 보다 7.1243543 곱하기 843 나유하(10의 56제곱) 제곱 531구골 플랙스 곱하기 90139.384구골 플랙스 배나 더 세거든요. 디도를 뺀 도란돔이, 디도 보다 10의 76543제곱 배 더 약하다는 걸 헤아려 볼 때 이건 매우 어려운 거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
“ 너는 그 놈의 곱셈 안 하나 했다. 잔뜩 기대했는데 ”
“ 혹시나가 역시나가 된 거 아니에요? ”
“ 그 말이 더 맞겠군 ”
“ 근데 너 혹시 팅킨 마르가 아냐? ”
“ 맞아요. 에니치 팅킨이지요 ”
“ 두번째로 혹시나가 역시나군 ”
설마 이 음계의 딸, 디떼 스타를 거스르고 센트리 카젤에게 붙겠다는 속셈은 아닐까. 그런 속셈이 지바 한 구석에서나마 꿈틀거리고 있는 건 아닐까. 세번째로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면 안 되는데.
너무 멀어.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더라도 움직임을 보이는 때가 바로 수루치에게 죽는 날일 거다. 아니지. 전혀 멀지 않아. 음계는 숱하게 이어져 있어. 마음만 먹으면 센트리 품 안에라도 금새 뛰어들어갈 수 있는 거야. 계약이 붙들고 있지만 않다면 말이지. 보통은 그딴 짓 할 생각도 안 하나, 마음을 지녀 바람이 있는 에니치는 그런 일을 벌일 수도 있는 힘을 지녔어.
동혁이 말한다.
“ 큐비 ”
큐티에호비호렙 사마엘이 나타난다. 디도랑 싸울 때보다도 훨씬 더 굳세어져 있는 그녀다. 도터 사마엘이 그 옆에 서있다. 도터는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멋진 사내의 생김새를 지니고 있다. 도란돔에 있는 사마엘 마르가들 가운데 가장 억세다. 지금은 디도랑 동혁에게 충성하고 있지만, 센트리가 나타난다면 금새 그쪽으로 붙을 사마엘 마르가를 부른 게 조금은 캥긴다.
에니치가 묻는다.
“ 그룹 섹스라도 할 건 가요? ”
“ 아냐, 그런 건 아냐. 신경 쓰지 말고 말이나 하라구 ”
에니치에겐 신경 쓰는 기색이 하나도 없다. 스스로만 지나치게 구는 건 아닌지 궁금해지는 그다. 지구 버릇이 나오는군. 나라들이 가끔 저지르는 낮고 썩은 짓거리를 도란돔에서도 되풀이해야 하나.
에니치가 말한다.
“ 알고 싶으신 게 무엇이지요? 새로이 찾아낸 수학의 짜임새는 ‘
디도가 말하길, 에너지계에서는 우주마다 나름의 수학 짜임새가 있다고 했다. 초 끈 수학은 더불어 지니지만 그 아래 차원들에선 다른 것이다. 음계에도 나름의 수학 짜임새가 있는 건 그로 미루어 뻔한 일이다. 음계 수학은 그 어떤 우주의 수학보다도 움직임을 다루는 공식들이 깊고 빠르고 많을 터이다. 물론 그의 추측일 뿐이다.
“ 음계 수학 따위는 알 바 아니고, 어떻게 해야 디도가 더욱 세어질 수 있는 지 말해줘 ”
“ 지구에서는, 자연 과학의 발달이 에너지를 더욱 빠르고 쉽게 모으도록 도와주었지요. 하지만 음계에선 그렇지 못해요. 파라브라자를 모으는 방법이든, 계약이든 그 메카니즘을 밝혀내도 실제로 도움을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껏 많은 실험이 이어졌지만, 그냥 하는 것과 아무런 다름을 찾아내지 못했거든요. 파라브라자를 만드는 빠르기가 빨라지거나 늦어지거나 하지 않았던 겁니다. 말하자면, 음계에서의 자연 과학 발달은 보는 눈을 늘리는 것 위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끝이 빤히 보이는 연구이지만, 내려진 결론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도란돔엔 과학의 나아짐을 가로막는 보수주의 따위는 전혀 없다는 것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
과학과 지성의 오롯한 겹침이 옛날에 이루어져 있는 누리로구나, 음계는. 인간이 길게 꿈꿔왔지만 이제껏 이루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루지 못할 지 모르는 아주 많은 것들이 음계엔 아무렇지도 않게 있다는 것이 더욱 큰 깨달음이 되어 동혁에게 다가온다. 좀더 음계의 자연 과학이 나아가면 깨질 수도 있는 곡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지구인이 지닐 법한 자존심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 그럼 음계의 진화는 어떻게 나아갔지? ”
“ 그에 대해선 연구가 이어지고 있지만, 무성한 가설들 뿐입니다. 마하 지바에 좀더 깊숙히 들어가야 제대로 알아낼 수 있을 듯합니다 ”
“ 그럼 그건 관두지. 에니치라고 했던가? ”
“ 예. 에니치 팅킨입니다 ”
“ 그럼, 언제든지 부르면 오라구. 안경을 벗어 ”
에니치가 안경을 벗는다. 수루치랑 닮았지만 조금은 다르다. 얼굴이 조금 더 길고 보조개가 있다.
“ 말 타기 좀 해 보자. 에너치는 말뚝이 되고, 도터는 첫번째 말이 되어서 노는 거야 ”
에니치의 배에 머리를 대며 도터가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는다. 에니치 사타구니에 도터가 입을 대고 핥아댄다. 에니치가 입에 착 달라붙는 신음 소리를 낸다. 가로등이 그 옆에 서 있다. 옛날에 몽정을 했던 꿈이랑 조금 비슷한데. 그 꿈에선 여자 하나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말이야. 동혁이 도터에게 올라타고는 큐비에게 손짓한다. 큐비가 두번째 말이 되어 도터의 양물, 불알, 항문을 싹싹 핥아댄다.
동혁이 뒤쪽으로 물러났다가 뛰어오며 큐비의 엉덩이를 집고 그녀의 등에 올라탄다. 한 번 더 몸을 버튕겨 도터의 등 위로 올라온다. 에니치의 젖통은 수루치보다는 디도의 그것에 더 가까운 크기다. 두 손바닥으로 감싸쥐니 탄력이 넘친다.
그가 도터 등 위에 올라선다. 몸을 앞으로 쏠리게 하자 양물이 에니치의 보드러운 입술 안으로 깊이 들어간다. 그가 에니치의 어께에 손을 올린 채 허리를 앞뒤로 움직인다. 에니치도 목을 앞뒤로 움직여 이에 맞추어온다. 그의 양물이 앞으로 가면 그녀도 앞으로, 뒤로 빠지면 뒤로. 너무나 잘 맞추어온다.
정액이 뿜어지자 그는 허리를 앞뒤로 빠르게 움직여대며 바닥으로 떨어져내린다. 큐비랑 에니치가 재빨리 하반신을 상반신 위로 접어, 엉덩이와 유방으로 동혁을 푹신하게 받아낸다.
큐비가 말한다.
“ 꺄르르르, 동혁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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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치가 말한다.
“ 지구인은 정말 대단하군요. 진짜로 나 빠져버릴지도 모르겠어요. 팅킨 마르가의 라자이신 수루치 님이 왜 당신에게 미쳐 있는 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용~~~ ”
“ 모두 꺼져 줘 ”
도란돔이 그의 앞에서 두루마기 말리듯이 사라져버린다. 음계에선, 과연 그가 도란돔을 떠났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도란돔이 그를 떠났다고 말할 것인가. 아인슈타인의 빛나는 이론은 음계에서는 어떤 꼴로 그 성찰을 떨치고 있을까. 에너지계와는 다른 꼴일 것이라고 밖에 짐작되지 않는다.
그는 디떼 스타의 오롯한 가슴과 길고 멋진 다리를 보기 위해 수수께끼로 가득 찬 그녀에게 갔다. 그가 말한다.
“ 나의 울드! ”
“ 울드라니? 그게 누구야? ”
앗차, 말해준 적이 없구나. 그가 대꾸한다.
“ 엣다 신화에 나오는 옛날의 여신 이름이야. 그 신화는 별로 알 지도 못하지만. 옛날의 과학에 지나지 않는 신화는 내 관심 사항의 작은 조각일 뿐이지. 넌 [Ah, My Goddess]에 나오는 울드랑 비슷해. 생긴 건 틀려. 말라빠진 울드와는 달리 디떼는 알맞게 통통해. 니 눈은 울드 보다는 오늘의 여신인 베르단디를 닮았고, 살결도 베르단디랑 비슷하게 하예 ”
“ 그럼 왜 울드야, 베르단디지 ”
“ 니가 무슨 베르단디냐. 상스럽고 야한데다 사나운 왈가닥인 주제에 감히 눈부신 베르단디랑 비교를 하다니. 어, 또 삐지네 ”
툴툴대며 디도가 말한다.
“ 지구인들이라면 그런 말 들었을 때 이런다고 니가 그랬잖아. 더 심할 수도 있다고도 했고 ”
“ 넌 지구인이 아냐. 음계 지성이지 ”
“ 내가 왜 울드야? ”
“ 성격이 닮은 것 같아서. 뭐 별로 닮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악독하고 이중성을 지녔고, 그런 거. 무엇보다도 옛날에 속했다는 거. 모든 날들을 자리메김한 한 처음을 다스린다는 것 말야 ”
“ 이 귀엽고 상큼한 푼수인 내가? 나도 그런 점에선 마찬가지야. 너처럼 나도 날들의 임금님은 아니야. 너 옛날에 그랬지. 나를 만났으니까 너한텐 종교가 나위없다구. 그럴 리가 없잖아. 니 말을 들으니까 나한테도 종교는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끝도 없고 스스로 말미암는 어떤 살이를 믿고 떠받드는 게 종교라면, 믿음을 통해 사랑을 베풀 힘이랑 슬기를 얻으려 하는 게 종교라면 나한테도 필요할 지 몰라. 슬픔이랑 빗금을 아는 아이니까. 내게는 어떤 걸 믿을 수 있는 그런 바람이 없어서 종교가 없는 것 뿐이야 ”
그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디도가 왜에, 그러면서 동혁의 뺨을 쥐고 뽀뽀를 퍼붓는다. 그녀가 멈추고는 그를 말똥 말똥 바라본다. 그가 이야기한다.
“ 나위없을 걸. 종교란 스스로의 작음을 깨달은 사람이 스스로가 대우주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살이라고 우기는 거야. 하지만 대우주는 스스로에겐 너무나 커. 그 큰 사이를 메꾸는 게 바로 초월적 실체야. 말하자면 종교는 스스로를 속이는 논리이고 권력주의야. 권력자들이란 실제론 기생충이지만 스스로를 공동체에 없어선 안 되는 살이라고 여기는 법이거든.
사람도 마찬가지야. 참으로는 대우주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지만, 스스로를 진리의 주인이나 대행자로 여기지.
헬레니즘이랑 헤브라이즘은 사람을 자연의 주인으로 여기는 시건방진 사상이니 반박할 가치도 없어.
인도랑 동양 철학은 사람의 슬기로 모든 것을 오롯이하여 대우주를 빛나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는 것인데 그것도 웃기는 이야기일 뿐이야. 사람의 홀로 선 착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 다른 모든 것에게도 좋은 것이라 스스로를 속이는 거니까. 좋고 나쁜 기준도 사람의 것일 수 밖에 없는 게 사람 마음이지.
자연 과학은 달라. 초존재는 사람을 대우주에서 행복하고 안전한 살이로 만들 수 있는 살이야. 그게 다니까 그걸 바라는 거야. 삶 보다 센 힘은 많지만, 그 위의 가치란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한테는 종교가 나위없어. 너한테는 더욱 그래. 너는 벌써 안전하잖아 “
디도 카젤이 손바닥을 마주 친다.
“ 진짜네. 내 지바는 다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니까! ”
동혁이 마주 앉아있는 디도의 보드라운 음부랑 미끈하고 토실한 허리를 쓰다듬는다. 디떼가 생글거린다.
“ 동혁아! 기뻐해 줘 ”
“ 왜? ”
“ 니가 죽은 아한카라들을 되살려내라고 그랬잖아. 재미가 쏠쏠해. 도란돔도 커지고 있지만, 계약이 짙어지면서 파라브라자가 늘어나는 빠르기가 거듭 거듭 빨라지고 있어. 우리의 힘은 끊임없이 세어지고 있는 거라고 ”
“ 그래도 센트리보다 약할 거 아냐 ”
디도가 고개를 흔든다.
“ 아냐, 아냐. 이젠 거의 만만해. 되살아난 아한카라들 가운데선 팅킨 마르가와 마찬가지로 뭘 시킬 수 있는 마르가를 이루는 아한카라들도 많았어. 엄청난 파라브라자가 그칠 사이 없이 나에게 흘러 들어오고 있어. 센트리도 한 방 먹었을 거야 ”
“ 걔가 또 베끼면 어쩌지? ”
“ 그런 시름은 없어. 카젤 마르가랑 스타 마르가를 함께 지니고 이를 더해 높은 수준의 어울림을 이루고 있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