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헬 매니아(Hell mania) 1999[판타지](2)
갑자기 오크들이 뒤로 부터 무너진다. 오크들은 거꾸러지고 자빠지고 도망가고 토막질 나고 난리가 났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리한테로 오게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칠쏘냐.
-오 예. 후버, 헬바드 든 놈은 죽이지만 마요.
-좋아.
후버가 창으로 여러 놈을 한꺼번에 꿰고는 내팽개친다. 그에 더해 다른 손으로는 바스타드로 오크의 목을 날려버린다.
나랑 아첼은 클레이모어를 휘저었다. 서너 놈이 잘려서 나뒹군다. 우리는 오크 몸 가운데서도 두꺼운 곳을 노려 자르는 걸 즐긴다. 포만감이랄까. 두툼한 그 느낌이 좋다.
웜이나 와이트나 굴이 와서 맛있게 먹을 시체가 늘어난 거다. 아니군. 벌써부터 파리가 꼬이고 있다. 까마귀가 목청 돋군다. 개미, 송장벌레, 수시렁이, 하이에나, 독수리도 한바탕 잔치를 하겠군.
2
헬바드 든 오크가 무기를 집어던지더니 온몸을 던져 땅바닥에 엎드려 싹싹 빈다.
-살려면 줍쇼.... 살려만....
아첼이 말한다.
-너 아까 한 말 기억하지.
-물론. 근데 너한테는 별로 원한 진 거 없잖아. 그냥 죽이자.
-있어.
아첼이 색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나한테 지 똥이랑 오줌을 허구헌날 같이 먹인 새끼야. 처음 여기 왔을 때라 더 끔찍했지. 알몸으로 악마 도시 시궁창에 떨어진 날 찾아내서 성폭행한 것도 저놈이지. 오롯이 난 똥걸레 된 거야.
으웩. 웬지 양치질을 실컷 하고 싶어진다. 하긴 옛날이지. 몇 년도 더 된 옛날이잖아.
아첼이 말을 잇는다.
-아닌가? 아닐 지도 몰라. 오크들은 다들 닮았으니까, 뭐 어때. 야, 딸딸이나 까 봐. 그럼 살려줄지도 몰라. 그 다음엔 노예 시장에 널 팔아먹을 작정이야.
-니가 웬일로 그런 말을 다하냐?
-이젠 얼버무려 말해봤자 아니냐? 빌어먹을 오크 새끼들.
오크가 딸딸이를 하기 시작한다. 내가 말한다.
-피가 나올 때까지 해. 염통이 오줌 구멍에서 튀어나올 때까지.
아첼이 자지러진다.
-꺄하하하하!
아첼이랑 공유하고 있는 배가 아파온다. 이 년은 왜 이렇게 좋아하지? 덕분에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킥킥대는 웃음이 조금씩 입술 틈을 비집고 새어나온다.
고브린들이 떼거지로 나타나더니 오크들 시체를 열심히 주워 담는다. 후버랑 우리가 무기를 움킨다.
-아냐, 아냐. 그들은 적이 아냐.
이게 웬 반가운 소리냐. 켄타우로이인 잭을 타고 타냐가 나타난다.
-타냐!
나랑 아첼이랑 후버는 입을 맞춰 외치고는 잭이랑 타냐에게 달려든다. 잭이랑은 가슴이 아플 정도로 껴안고, 타냐는 들어서 돌리다가 허공에 던져버린다. 타냐는 공중재비를 돌곤 사뿐히 내려앉는다.
후버가 묻는다.
-타냐, 이 고브린들은 뭐야?
-이곳 근처를 지나고 있더라고. 그래서 잘 구슬려서 데리고 왔지, 나 잘 했지?
-그래, 요 갈보야.
타냐는 우리들의 키스 세례를 잔뜩 받고서야 풀려났다. 아무도 립스틱을 바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트면 타냐의 새하얀 얼굴이 덕지덕지 시뻘게질 뻔했다. 나는 타냐의 다리 사이를 집중해서 간지럽혀줬다.
-꺄르르르, 그만 해. 간지러워. 중요한 할 말이 있어.
그제야 우리들은 타냐에게서 떨어져나간다. 깔끔하고 짧은 금발을 나폴거리며 타냐가 말한다.
-아까 봤지. 고브린 둘이 모여야 오크 하나를 가까스로 이겨. 그런데 이 쯤 숫자가 이긴 걸 보면 누가 있는 지 알겠지.
후버가 말한다.
-호브 고브린.
-맞아. 케리, 케리.
다른 고브린 보다 2배는 큰 고브린 하나가 나타난다. 덩치가 조금 작은 어른만하다. 다른 고브린들이 다들 추츰추츰 물러선다. 케리라 불린 호브 고브린이 말한다.
이들이 타냐 동료들인가.
-그래. 난 좀더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듣고만 있어.
내가 타냐 어께를 붙든다.
-너 뭔가 우리한테 잘못했지.
아첼도 거든다. 내가 지닌 운동신경계 통제권이 더 강하긴 해도 아첼이 죽어라고 막으면 몸을 까닥하긴 어렵다. 아첼이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니가 이렇게 나올 리가 없어.
-아파.
아첼이 내뱉는다.
-아프라고 이러고 있는 거야.
-니네 왜 그래? 내가 아니었음 우린 다 죽었을 수도 있어. 내 말 들어, 새끼들아! 난 아까 몹시 다급했어. 잭이랑 같이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나왔지만 도움을 청할만한 엘프나 님프나 켄타우로이나 사튀로이나 트롤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다가 고브린 파티를 찾아냈고 케리랑 계약을 했어. 나랑 잭에겐 아무 것도 줄 게 없었어. 그래서 너희를 구한 다음에 주겠다고 할 수 밖에 없었어.
02
후버가 앞으로 나선다.
-케리. 만약 우리가 줄 수 있는 거라면 주겠어. 바라는 게 뭐야.
할 수 없지. 고브린들이랑 또 싸우긴 싫었다. 호브 고브린이 없는 고브린 파티는 오크 파티랑 비슷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호브 고브린이 있으면 그 고브린 파티는 호브 고브린의 명령이면 뭐든지 듣는다.
호브 고브린인 케리가 말한다.
-그쪽이 후버인가?
-그래.
-저쪽 머리 둘 달린 인간. 끝내주는데. 노예겠지. 어떤 종족이든 다수와 좀 다르게 생긴 이들은 따돌리니까. 나한테 줘. 아주 좋은 자랑거리가 될 것 같군.
후버가 말한다.
-클레이모어 가진 노예 봤냐? 집단이 엄청 크면 가능하지만 우리처럼 작은 파티가 될 것 같에?
-아닌 모양이군. 그럼 데리고 갈 수는 없고....
오크들이랑 무리하게 싸우느라 고브린들이 많이 죽고 다쳤다. 그렇지만 않았으면 나랑 아첼을 얻기 위해 덤볐을 것이다. 호브 고브린은 자랑거리가 많을수록 많은 고브린들을 끌고 다닐 수가 있다.
케리가 한숨을 내쉬더니 나랑 아첼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쯤이면 괜찮은 자랑거리가 되겠지. 저 인간이랑 우리 고브린들이 혼음 좀 할 수 있게 해 줘.
난 기가 막혀서 외친다.
-뭐야! 저 새끼가 죽고 싶나.
아첼이 말한다.
-진정해. 어차피 음부랑 유방은 내가 움직이고 느끼게 되어 있잖아. 넌 가만히만 있으면 돼. 게다가 이건 강간이 아냐.
-나라고 아예 못 느끼는 건 아니잖아. 인정할....
갑자기 눈앞이 아뜩해진다. 내 뒷통수를 누군가 갈긴 것이다. 말발굽이 틀림없다. 잭의 목소리가 들린다.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
빌어먹을. 이것들 친구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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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정신이 드니?, 클로드.
-그래.
타냐가 내 입술을 핥다가 말한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이해하지?
-내가 살아 있는 거냐?
-물론.
별이 엄청나게 많고 밝다. 이곳은 밤하늘 하난 끝내준다.
-후버랑 잭은 어데 있어?
-망 보고 있어. 모닥불 피운 거 보면 몰라?
-아첼은?
-자고 있어. 아까 고브린 스물이랑 하느라 피곤했던 가 봐.
-으읔. 진짜 느낌 더럽다. 미치겠구만.
-너도 옛날에 남자들한테 윤간 당한 적 있다면서.
-니네 만난 다음엔 없었어. 지구에서는 더욱 더 없었지. 썅년 같으니. 난 대체 뭐야. 진짜 도대체 뭐야? 뭐냐구!!! 닥치는대로 써먹다가 버릴 거 아냐!!! 발가락 사이에 낀 때만도 못하지? 넌 엘프니까 악마 도시에 팔아 먹으면 아주 비쌀 거다. 꼭 팔아 먹고 말겠어. 그리고 니가 지구 인구에 맞먹는 악마랑 그 똘마니들한테 윤간당하는 걸 두 눈 똑바로 뜨고 보고야 말테다.
-진정해.
-아첼이 자고 있으니까 나도 졸려 죽겠구만. 빌어먹을 호르몬. 타냐, 너 그따위 표정으로 쳐다보지 마. 안쓰러운 척 하지 마.
-난 니네가 참 불쌍해.
-뭐?!
-지구에서 와서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이 꼴이 되기까지 했잖아.
-그래 말 참 잘했다. 케라키 성에서 노예 검투사들 노예 노릇 하다가 가까스로 도망나와서 그 빌어먹을 마녀한테 잡혀 아첼이랑 합체된 것 까지는 좋아. 후버가 구해줘서 튀어나왔더니만....
-또 지나간 이야기할래?
-너한테야 지나간 이야기겠지. 넌 가해자니까 쉽게 잊을 수 있겠지. 아니 쉽게 잊고 싶으니까 잊을 수 있는 거겠지. 그건 너에겐 한낱 무용담일 뿐일테니까 말야. 나랑 아첼이 후버랑 같이 마녀를 잡으러가니까 니가 그 마녀를 때려죽였지. 그러는 바람에 그 마녀를 족쳐서 해독제 알아내겠다는 계획이 다 깨졌잖아! 그 마녀랑 싸울만한 힘을 키우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우~~.
머리가 띵하다. 그래도 끝까지 말은 해야겠다. 아첼이 자고 있어서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이년아, 빨랑 깨란 말야.
타냐는 도무지 마음에 안 드는 엘프다. 우리랑 만나기 전에 타냐는 불쌍한 농촌 무지렁이들을 등쳐먹으면서 살았다 한다. 언덕 위에 살면서 신인 척하며 온갖 맛 난 과일들을 허구헌날 받아먹으며 지냈다. 언덕에 가까이 오는 마을 사람들은 때려죽이고 아이들을 가끔씩 빼앗아 노예나 환관으로 팔고는 좋은 곳으로 갔다는 말을 하는 식으로 신성함을 유지했다. 그런 바탕 없는 권세가 오래 갈 리 없었다. 어느 날 지옥의 미궁의 군대가 마을 사람들을 전멸시키고, 마을 사람들을 도우러 온 기사와 그 군대도 박살낸 다음 타냐를 사로잡았다. 잘코사나다. 타냐는 낮엔 윤간, 밤엔 중노동을 100년 동안 당하다가 그녀가 잡혀 있던 지옥의 미궁의 확장 기지가 인간들에 의해 파멸되는 틈을 타 도망나왔다. 4년 동안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다가 그 마녀를 때려죽이고 우리랑 만났다.
그런 악연만이라면 괜찮은 편이다. 그건 고작해야 옛날이니까. 얼굴이랑 몸매는 지금까지 본 여자 가운데서 으뜸으로 예쁜 계집애가 잠 잘 때 코 골고 이빨 가는 데엔 돌 지경이다. 가끔 깨서 타냐 몸 옆으로 누이느라 힘을 들여야한다. 그래도 요즘엔 좀 나아졌다. 타냐가 나아진 게 아니라 하도 많이 들어서 익숙해진 거다.
-아 참. 이거 먹어.
타냐가 잘 익은 다리 하나를 등 뒤에서 내민다.
-멧돼지 고기야. 아주 기름지지? 너랑 아첼이 지고 있던 짐에서 소금을 꺼내서 간을 맞췄어. 후버가 했으니까 믿어도 될 꺼야.
-어떻게 구했어?
-내가 서몬 스윔 주문으로 불렀어.
-잭이나 후버가 잡은 게 아니고?
-물론 마지막엔 후버가 창을 던졌지.
-니가 이렇게 나오니까 내가 우스워지잖아. 넌 동족까지 저버려가면서 우리를 위하고 있는데.
-난 동족을 저버린 적 없어.
-그러고 있어. 엘프는 채식주의자고 숲을 지키지. 이러다가 너 다크 엘프가 되어버리는 거 아니냐.
-난 먹지 않았어. 숲은 지켜야하지만 개별 동식물까지 지키라는 법은 없어. 인간도 동물이야. 하지만 우린 가끔 인간이 도끼를 들고 설쳐대면 쏴 죽이지.
-그러면 역시 넌 니 종족을 위해 우리랑 다니는거구나. 조금이라도 많은 연줄을 만들기 위해서 말야.
-그것만은 아니야. 나는 니네를 좋아해. 믿어. 사랑해.
타냐가 내 입술에 제 입술을 부빈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