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범족의 토렌1 - 2002[역사]
2002년작
지금으로부터 대략 5000년 전. 한단고기를 따른다면 7000년 전으로 추측할 수도 있는 시기다. 한단고기에서는 고조선에 47명의 단군이 재위했었다고 하며 고조선 이전에 18명의 환웅이 재위했던 배달국이 1500여 년 이상 동안 지속되었다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어느 기록을 따르든 때는 신석기 시대. 유프라데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위치한 유역에서는 조금씩 인류 최초의 도시들이 움터 맥주를 마시는 노동자들과 신전에 전속된 여사제 겸 창녀들이 몸을 섞곤 하던 시절이었다.
하늘 바다라고 불리던 바이칼 호에서부터 산맥과물줄기를 타고 굽이 굽이 뻗어내려 훗날 각각 흑룡강, 송화강등으로 불리는 여러 아리수(큰 강이란 뜻)들을 지나면 웅혼하게 솟아 있는 한 휴화산을 볼 수 있다.
거의 언제나 구름으로 휘감겨 있는 거대한 산정 호수를 가진 산. 깍아지를 듯한 하얀 바위들이 높다랗게 솟구쳐 병풍처럼 정상을 이루고 있는 백두산이다.
백두산을 남쪽에 이고 넓게 펼쳐진 구릉 지대에 서로 인종이 다른 두 부족이 인접해 살고 있었다.
한 부족은, 70만 년 전 까마득한 구석기 시절부터 만주 벌판에서부터 한반도를 지나 일본 열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널리 퍼져 살고 있던 유서 깊은 종족의 일원으로서 한때 코가서스에서 살았던 유산이 아직 핏줄에 새겨져 있어 가끔 금발에 파란 눈을 지닌 아이를 낳곤 하는 백인종이었다. 이 부족에서부터 한반도 전역을 관통하는 지역의 이 인종들은 시베리아에서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에서 폭넓게 살고 있는 호랑이를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어 범족이라 불리웠다. 범족은 암각화를 통해 자신들의 문화와 생활을 남기기도 했다. 같은 인종이지만 일본 열도에 살고 있는 이들은 불곰을 수호신으로 섬겨 아이누족이라 불리우고 있다.
토렌은 범족의 딸이었다.
아직 13살에 불과했지만, 토렌의 몸은 이미 아이가 아니었다.
늘씬한 키에 가슴은 봉긋이 솟아 올라 있었으며 엉덩이도 제법 둥그스름했다. 눈은 크고 맑은데다 서글서글했으며 푸른 빛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오똑하게 망울진 코. 붉은 입술은 도톰했다. 또래의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몹시 활달한 성격을 반영하여 열대 지방의 햇볕에 그을리기라도 한 듯 살결은 까무잡잡했다. 기름진 압록강 지류의 은덕을 받아 토렌은 낙천적이고 쾌활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범족은 아직 수렵 채집을 하는 단계에 있었다. 수렵 채집을 하던 시절의 인류 남성의 평균 키는 178cm였고 범족 남자의 평균 신장도 그러했다. 토렌의 키는 이미 174cm에 이르러 있었으며 가슴 또한 발육이 잘 되어 92cm에 이르렀다. 토렌은 햇살을 받으면 하얀 빛이 눈부신 금발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다. 범족의 피에는 황인종의 피도 섞여 있었기에 토렌의 얼굴도 조금은 황인종의 특징을 띄고 있었다. 토렌의 얼굴은 연금술로 빚어내기라도 한 듯 두 인종이 합쳐진 이상적인 특징들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어떤 종족의 눈으로 보든 토렌은 미녀였다.
토렌은 그날도 여느 다른 여름 날과 다름없이 염소떼를 몰아대고 있었다. 염소는 범족의 유일한 가축이었다. 범족은 젖과 고기를 염소에서 얻기에 염소는 몹시 중요했다. 토렌은 허리에만 염소가죽으로 만든 짧은 치마를 두룬 체 일하고 있었다. 그날의 방목을 끝내고 토렌은 우리로 염소떼를 몰아 가면서 연신 고개를 기웃거렸다.
"하나, 둘, 셋... 씨이~ 한 마리가 비잖아!"
아무리 세어도 한 마리가 비었다. 그렇다고 성경에 나오는 예수처럼 한 마리 찾겠다고 나머지 무리를 내버려두고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양떼는 결국엔 사람을 뜻하기에 그런 일이 가능하지만 이번에 토렌이 상대해야할 것들은 진짜 어리버리한 가축들이다. 토렌은 집으로 가자마자 아버지에게 염소떼를 맡겼다.
"얘야, 어디 가니?"
"염소 한 마리가 없어요. 워낙에 날뛰기 좋아하는 녀석이라 꽤 멀리 갔을 지도 몰라요"
하고 말하자마자 토렌은 갈아서 만든 돌칼 하나만 손에 든 체 거침없이 뛰쳐나갔다. 토렌의 달리기는 어릴 적부터 다져져 웬만한 남자보다 빨랐다. 토렌은 금새 어두컴컴한 수풀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아버지는 쫓아가려다 그만두었다. 그 정도는 이제 어른으로 인정받을 나이가 된 토렌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로 생각했다.
곳곳에 풀숲은 우거져 있었다.
아직 농경에 지력을 빼앗기지 않은 땅은 어디든 울창한 숲이었다. 어디에도 길은 나있지 않았다. 염소 발자국 추적은 주변 남자들 틈에 끼어 어릴 적부터 사냥을 다니곤 한 토렌이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토렌은 10살 때부터 바득 바득 우겨대서 남자들과 사냥을 나가곤 했고 곧잘 잘 하기에 남자들도 토렌을 붙여 주었다. 관목 나뭇 가지들이 토렌을 막아 섰지만 토렌은 격렬하면서도 절제된 손놀림으로 돌칼을 내리쳐 그때마다 관목 덤불을 헤쳐 나갔다.
낯익은 염소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지척이었다.
토렌은 그곳을 향해 결코 서두르지 않고 찬찬히 움직였다. 괜찮은 사냥꾼이기도 한 토렌의 기질이 발휘되고 있는 순간이었다. 토렌은 조금씩 자신에게 잔혹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다가오기 시작한다는 것을 결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덤불을 헤치자 낮은 구릉 아래로 염소가 보였다.
언제나 천방지축으로 날뛰곤 하던 커다란 숫염소였다. 토렌은 반가운 마음에 곧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곤 풀숲 깊숙히 엎드렸다.
아니다 다를까. 7명 정도의 황인종 남성이 염소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불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염소의 발자욱이 웅족 마을에 자꾸만 다가가고 있어서 조금씩 서두르게 되던 마음을 진정시켜가며 추적해나가던 토렌이었다. 최근 웅족 마을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요 몇 주 전에는 투석전이 벌어졌던 일도 있었다. 이런 때에는 아예 안 가는 게 나은 곳이었다. 맹수와의 전투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토렌이었지만 부딪쳐서 좋을 것은 없었기에 야생 동물들의 움직임에도 신경 썼기 때문에 이처럼 추적이 늦어졌던 것이다.
이들 황인종들은 웅족의 일원이 명백햇다.
웅족은 산동에서 만주 남부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는 겨레다. 반달 가슴곰을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고 공동 작업으로 고인돌을 만든다. 범족은 웅족이 얼마 전에 이곳에 이르렀다 하여 경원시하고 있었지만 이미 웅족이 이 땅에 정착한 지도 수천 년이 지났다. 그렇지만 범족은 자신들의 전승을 통해 웅족이 훨씬 더 늦게 이 땅에 이르렀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웅족은 양자강 북동쪽에 있던 묘족의 조상이다. 웅족은 얼마못가 한웅이 이끄는 천족과 연합하여 우리 민족의 조상이 되는 종족이다.
토렌은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저들도 날카롭게 간 돌칼을 지니고 있었고 보아하니 사냥꾼의 복색을 갖추고 있어 섣불리 다가가기엔 위험부담이 컷다.
토렌은 계속 이들을 주시했다.
과연 웅족들은 염소를 보더니 이를 사로잡아 나무가지에 붙들어 메었다. 그리고는 서로 가위 바위 보를 하여 멜 사람을 정했다. 사냥감으로 쓰거나 뒤에 가축으로 삼을 작정으로 마을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들 모두는 염소 한 마리로 만족했는지 자신들의 부락으로 향했다. 저녁이 깊어 오는지라 그러는 게 좋다고 판단한 듯하다.
토렌은 그들을 미행하기로 했다.
비록 낯선 땅이었지만 염소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었지만 토렌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밤눈이 밝고 손이 잽싼 토렌이다. 허리춤에는 부싯돌도 달고 있어 필요하다면 한데서 야영을 할 수도 있었다. 싸움도 3명 정도의 장정이라면 대등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그 모두는 토렌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젊었을 때 웅족과 벌인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전보를 올리곤 했다던 토렌의 아버지는 웬일인지 토렌 말고는 자식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토렌은 아들과 딸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도록 길러졌다.
범족은 아이누족의 조상 혹은 친척이다. 아이누족은 적들이 침략하여 여자들을 강간하고 데리고 가지 못하도록 여자들의 입술 주변에 딴 종족들이 보기엔 흉직해 보일 수 밖에 없는 문신을 그려넣고 억지로 이것을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았을 정도로 남녀 차별적인 종족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범족은 아직 그런 풍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이누족의 문신 새기기는 여자들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한데 범족은 아직 그런 약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았다.
토렌은 점점 웅족 마을에 가까이 다가서며 틈새를 노렸다. 그렇지만 상대의 수는 7명이다. 한 사람 한 사람만 따진다면 헛점 투성이였지만 숫자가 많자 여의치 않았다.
웅족의 마을에 다가섰다. 웅족은 곰을 섬기는데 이는 그들의 언어와도 관련성이 있었다. 곰은 감, 검, 가미 등의 발음과 통한다. 이는 땅의 신의 뜻이다. 땅의 신을 섬기는 부족임을 웅족은 이름을 통해 드러내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어찌 보면 조잡하나 장엄한 나무로 만든 곰 조각상이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울타리는 있었으나 상당히 높게 뛸 수 있는 토렌에게는 아무 방해가 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입구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염소를 메어 두었다. 이제 시간이 토렌의 힘이 될 것이다. 떨어진 곳에 풀섶이 있었고 토렌은 그곳에 납짝 엎드려 숨었다. 밤이 되면 마을 입구를 통해 웅족의 마수로부터 염소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비록 한여름이었지만 밤에는 역시 쌀쌀한 기온이 돌았다. 거의 활동을 할 수 없는 밤이었지만 달은 보름달에 가깝고 토렌은 밤눈이 밝아 가능성이 없는 안배는 아니었다.
토렌은 더 밤이 깊어지기 전에 움직이기로 했다.
토렌은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나무에 메어 둔 염소의 고삐는 생각보다 풀기 어려웠다.
그때였다.
"이게 웬 아가씨신가~"
"범족의 여자로군"
저녁 때 보았던 일곱 명의 남자들이었다.
"여긴 우리 마을 한복판이야. 침입죄에 걸린다고"
토렌이 몰아붙였다.
"너희는 내 염소를 훔쳐갔어. 내 놔!"
"어허~. 우리 땅을 침범한 주제에 말이 많구나!"
토렌은 사방이 막혔다는 걸 눈치챘다. 이들 7명은 토렌이 따라오고 있다는 걸 자신들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토렌은 추적, 은폐에 있어서 이들 7명을 따르지 못했다. 토렌은 몸을 낯추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웅족은 황인종이긴 했으나 때는 수렵 채집을 하던 시절. 이들 7명의 평균 키는 176cm를 넘었고 체중도 나갔다.
토렌은 닥쳐오는 한 사람의 턱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그 타격은 여자의 것이라고 생각되기 어려울 만큼 힘차 사내를 크게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다음 순간 토렌은 몸을 뒤로 날리면서 비틀었다. 그것과 동시에 또 한 남자가 가슴팍에 토렌의 발차기를 얻어맞고 나가 떨어졌다. 토렌은 허리춤에 꽂아 두었던 돌칼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남자들이 닥쳐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토렌은 한 남자의 배에 주먹을 꽂는 데에 성공했으나 다른 남자에게 뒤쪽에서부터 붙들렸다. 토렌은 허리를 격하게 움직여 뒷덜미로 상대의 머리를 강하게 박아 손을 푼 다음 그 손을 붙잡고 넘겨 땅에다 메다 꽂아 버렸다. 한 남자가 돌칼을 들고 덤벼왔다. 토렌은 정강이로 그 남자의 옆구리를 지른 다음 재빨리 뛰쳐나갔다. 아직은 몇 대 맞지 않았지만 때가 갈수록 불리할 것은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