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아프로디테와 인간 2014[패러디]
아프로디테와 인간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그러니까 아빠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아프로디테는 이 땅에 왔다 했다.
아프로디테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신이었다. 언제나 장밋빛과 우윳빛이 절묘하게 보기 좋게 뒤섞인 알몸으로 다니는 아프로디테는 이 땅을 마음껏 거닐었다. 아프로디테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아름다운 용모를 더욱 빛냈다.
아프로디테의 금발이 지나갈 때마다 산들바람이 하늘을 휘돌았다. 아프로디테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열매가 돋으면서 영글었고 꽃이 피었다. 아프로디테의 맨발이 땅에 닿을 때 풀과 나무가 물기를 한껏 머금고 일어났다. 아프로디테는 완벽하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외모를 갖추었고, 풍요의 여신으로서의 권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아프로디테가 머무는 이 땅에서 사람들은 옹달샘을 마시고 열매와 버섯을 먹었으며 배불러지면 밤새도록 놀고 마셨다. 사람들은 행복했고 즐거워했다.
아프로디테는 늘씬하고 풍만한 지체를 뽐내면서 사람들 사이를 거닐었다. 사람들은 모두 가이아의 자식들로 땅에서 솟아나오곤 했으며 모두 남자였다. 즉 사람들은 신들과 형제들이었지만 죽음을 언젠가는 맞이했다. 내가 가이아의 태내에서 나와 땅에서 솟아나올 때 아빠는 날 거두었다. 그렇게 인간을 길러준 인간을 인간은 아빠라 칭했다. 아빠는 태어난 지 몇 백 년이 지났지만 늙지 않고 젊은이인 채 팔팔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아프로디테는 황금 장식 말고는 몸에 걸친 게 없는 남자들과 어울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술을 만들 때에도 아프로디테의 농염한 육체를 이용했다. 아프로디테를 껴안고 탄력 넘치는 아프로디테의 알몸을 마음껏 만지면서 아프로디테의 고운 발로 포도를 으깼다. 포도를 으깰 때면 아프로디테의 시중을 드는 봄의 여신 플로라도 그 곁에서 아름다움을 뽐내면서 사람들에게 껴 안겨 포도를 함께 으깨 맛 나는 술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술을 먹고 마시면서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고 지금의 시대인 크로노스 치하의 '황금시대'를 찬양했다. 사람들은 놀이의 일환으로서 예술 또한 즐겨 마지않았다.
아프로디테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지녔고 - 실로 아프로디테 우라니아였다 - 그러면서도 훗날 이 땅을 차지하게 되는 요부의 분위기까지도 갖추고 있었다. 아프로디테는 몸 구석구석까지 수려했고 향기로웠으며 큼직한 유방과 뒤로 툭 튀어나온 엉덩이에 늘씬한 몸매를 갖춘 새하얗고 탄력 넘치는 여신이었다.
아프로디테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아프로디테를 안곤 했다. 다른 남자들과 어울려 난 아프로디테의 말캉말캉한 입술에, 흠뻑 젖은 보지에, 오밀조밀한 항문에 신나게 번갈아 가면서 페니스를 박아대곤 했다. 아프로디테는 사람들의 정액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아리따워지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아프로디테와 많이 성행위를 했지만, 다른 여자들과의 사이에서와는 달리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아빠도 아프로디테와의 성행위를 안 즐기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빠는 아프로디테를 만날 때면 꼭 역정을 내면서 아프로디테의 탱탱한 엉덩이를 함부로 두들기곤 했다. 그럴 때면 아프로디테의 뽀얀 엉덩이는 분홍빛으로 영롱하게 빛났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아빠의 그런 행동의 사유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달랐다. 좌우지간 아빠였다.
아빠는 아프로디테가 못 들어오도록 아빠의 집 둘레에 가시넝쿨을 심어 아프로디테와 그 권속이 못 오게 했다. 아니 애초에 집을 짓고 담을 쌓는 행위 자체가 몹시 이채로웠다. 필요한 건 아프로디테가 땅을 밟기만 해도 모조리 만들어지는 데도 아빠는 굳이 그렇게 했다. 아빠는 넓은 땅을 나와 아빠만이 들어올 수 있도록 관리했다. 아프로디테와 그 권속은 사람에게 도움을 넘치도록 주는데도 아빠는 외면했다.
아빠는 집 주변에 밀과 감자를 심어 힘들게 가꿔서 때 되면 조금씩 아껴 먹었다. 난 아빠의 일을 도왔다. 아빠는 잡초를 뽑았고 우물을 파서 물을 길었다. 때때로 아빠는 강이나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작살로 잡았다. 불도 손수 피고 돌을 쪼게고 나무를 다듬어 도구도 만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황금으로 장식을 하고 있었지만, 황금 장식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빠뿐이었다. 아빠는 금을 캐는 것도 달구는 것도 만드는 것도 모두 혼자서 했다.
난 아빠의 성실한 조수였고 열성적인 제자였다. 난 아빠를 사랑했고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덕분에 나도 아빠도 손과 발이 몹시 거칠어졌다. 온갖 고난을 헤쳐나간 손이라고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고 아빠는 말했다.
난 그런 아빠에게 왜 이러느냐고 묻곤 했다. 아빠는 몹시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고 의사소통에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아빠는 외골수였다.
그런 아빠는 때때로 당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말들을 툭툭 던지곤 했다. 그 말들을 조합해 보면 다음과 같았다.
"아프로디테가 거품 속에서 나온 건 몇 백 년 전 밖에 안 됐어. 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 그래. 지금 아프로디테랑 노는 데 딴 놈들 마냥 정신 팔린 네 할아버지 말이다. 그런데도 벌써 사람들은 다들 너무 익숙해졌어. 전승에 따르면 아프로디테가 오기 전엔 다들 지금 나처럼 살았어.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지. 땅에 노력을 퍼부어 나온 소출을 가지고 먹고 살았어. 아프로디테는 우라노스의 페니스에서 나왔다고 하지. 우라노스의 뜻이 깃들어 있다고 난 생각한다. 우라노스는 가이아의 큰 아들이자 남편이요 적이지. 가이아의 아들들인 자그마한 우리들에게 감정이 좋을 리 없는 우라노스의 의지가 아프로디테에게 이어져 있다고 난 본다. 자신의 자식들까지 타르타로스에 던진 우라노스가 같은 항렬인 우리들에게 감정이 안 좋다고 본다. 처음 태어났을 때에야 우리를 벌레처럼 무시했겠지만 지금은 페니스를 잘렸으니 심술이 날 거라고 난보는 것이다."
난 그런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아빠의 일을 묵묵히 도왔고 배웠다.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날씨가 흐려졌다. 난 그런 하늘을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언제나 하늘은 맑았었다.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이 또한 처음이었다.
아빠는 북풍 보레아스가 왔다고 했고 문을 굳게 걸어잠궜다.
사람들이 가시넝쿨 담장을 넘으려고 왔지만 다들 가시에 찔려 나가떨어졌다.
아빠와 난 마당에서 가죽 갑옷을 입고 뗀석기를 들고 버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도 담을 넘지 못 했다.
아빠가 말했다.
"이제 사람들의 힘이 빠졌을 거다. 창고를 열고 죽을 준비해서 조금씩 먹이면서 아프로디테가 없는 세상에 대비토록 하자."
"아프로디테가 이젠 없나요?"
"떠난 거겠지. 돌아올지 안 올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없다. 아프로디테가 모든 걸 해준다는 건 곧 아프로디테가 우리의 목숨 줄을 쥐고 있다는 뜻이지."
사람들은 힘겹게 일해서 먹고 살기 시작했다. 아빠와 난 그들에게 잊혀질 뻔 했던 문명을 가르쳤고 그들은 배웠다.
사람들은 그렇게 열린 새 시대를 '은의 시대'라 칭했다. 소문에 듣자하니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타르타로스에 던졌다고 했고, 그 와중에 미색에 혹해 제우스가 아프로디테를 의붓딸로 삼고 헤파이스토스에게 시집보냈다고 했다.
신들의 시끄러운 이야기는 나와는 관계없었다.
이제 노동의 때가 다시 왔을 따름이었고 다른 사람들 보다 유리한 고지에 서 있는 것뿐이었다.
아빠는 그런 날 자랑스러워 했다. 아빠는 내가 드디어 마음에 들었는지 무척 수다스러워지셨다.
"내가 가이아 여신님의 신탁을 손수 받아둔 것이 있다. 앞으로 몇 세대까지는 가이아 여신님이 직접 인간을 낳을 거라고 했다. 즉 넌 생활방식의 별다른 변화가 없이 늙어 죽은 뒤 우리 조상들처럼 정령이 되어 활동하게 될 거라는 거지. 그 이후엔 판도라라는 여자 인간이 출현해서, 지금까지의 우리 인간들은 남자라 불리고 여자 태내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라 한다."
"큰 변화가 되겠군요!"
[2014.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