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2화 〉62화 (62/100)



〈 62화 〉62화

 일이 있었던 뒤로 나와 동기들은 정말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한 짓에 대한 영상들을 선태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 신고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선태에게 저항해야겠다는 생각이 깔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미친놈들이다.

내가 애원하지 않았다면  자식은 정말로 그들의 자지를 잘라버렸을 것이다. 개중에는 죽는 사람도 나왔었겠지.

그날 이후로 나는 선태의 개가 됐다.

한밤중에 나를 알몸으로 만들어서 목줄을 달고 산책을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날의 서슬 퍼런 칼을 떠올리며 그에게 저항할 수가 없었고, 그에게 ‘멍, 멍’거리면서 애교를 부리기까지 했다.

“한솜아? 어디  좋아?”

오랜만에 유미와의 점심 식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동기들의 육변기 신세에서 벗어나니 유미와의 식사를 할 수가 있게 됐다. 이두승에게서도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저녁식사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할 수 있었다.

내가 버틸  있게 해주는 심신의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하지만 내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고, 웃음이 나오지도 않았다.

“조금 쉬는 건 어때? 한솜이 너 대단하긴 한데 무기를 세 개나 마스터  정도면 휴식도 잘 안 챙기는  아냐?”

나는 대답 없이 옅은 미소만 띄어 보였다.

 마음대로 쉴 수만 있다면야. 그리고 헌터 수업 자체는 별로 힘들지도 않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래서야 작전에 나가도 괜찮겠어?”

그녀가 계속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다름 아니라 그녀가 드디어 대형 몬스터 작전을 따낸 것이다. 근접계 클래스들은 아무래도 위험하다보니 학생들에게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방위군만으로 버티는 대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학생들까지 동원하게  것이다.

며칠 뒤 대형 몬스터 게이트가 열리는 게 관측됐고, 다행히 가장 작은 엘리펀트급 몬스터였기 때문에 유미가 거기에 참여할  있는 기회를 얻었다.

게다가 나도 슬슬 소드 헌터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그녀와  조로 작전에 참가하기로 했다.

“괜찮아 며칠 쉬면 나아질 거야.”

“생리하는 건 아니지?”

갑자기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평소에 자기가 생리기간이라는 걸 별 거리낌 없이 말했기 때문에,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빼고는 크게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생리에 대한 언급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배려해준답시고 그런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내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나보다.

“아, 아냐. 정말 괜찮아.”

“흐음.”

그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여자끼리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꺼리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날 강제로 수정 당했던 걸 떠올렸다. 모든 게 정리된 뒤, 그날 저녁 화장실에서 자궁의 정액을 짜낸 뒤 마스터를 불렀다.

전에 받았던 임신 회피 기능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기껏 임신했는데 아깝지 않아? ㅋㅋㅋ>

그는 낄낄대면서도 수정란을 순식간에 소멸시켜 버렸다. 하지만 마음을 놓지도 못하게 다음 난자를 곧바로 자궁으로 보냈다.

도대체 어디까지  몸을 컨트롤할 수 있는 건지 두려울 정도였다.

<누구 아이인지 궁금하지도 않아? 한솜이 너는 좋은 엄마는 못 되겠네 ㅋㅋㅋ>

엄마,

끔찍한 울림을 주는 단어였다. 내가 엄마가 된다니. 상상한 해도 미쳐버릴 것 같다.

그리고 며칠 뒤, 드디어 유미와 같은 조에 소드 헌터로서 작전에 참가하는 날이 왔다.

“휴우....긴장 된다....”

내 옆에 있는 유미가 파르르 떠는  보였다. 수없이 작전에 참여해봤던 나도 게이트 예상 지점에 이렇게나 가까이  있으니 약간 긴장될 정도였다.

내가 그녀의 손을 꽈악 잡아주자, 그녀가 흠칫 놀랐다가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괜찮아, 별 거 아닌 놈이잖아. 수업에서 했던 대로 하면 돼.”

내가 말했다.

소드 헌터는 다섯 명이서  조였다. 한 명만 서포터고 나머지 네 명은 모두 소드 헌터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들의 역할은 몬스터의 시선을 분산시키면서, 만약 염파 방어막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라면 방어막을 중화시키는 역할이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유미가 긴장하지만 않으면 다칠 일은 없을 것이다.

“나옵니다. 긴장하십시오.”

서포터가 무전을 받은 뒤 지시했다. 그녀는 노련한 방위군 출신이었고, 학생은 나와 유미밖에 없었다.

우우웅!!

어어??

나는 직감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게이트가 너무 크다. 엘리펀트급이 아니다.

“전부 후퇴!!”

내가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

그러나 모두들 얼어붙어서 웅장한 크기의 게이트가 열리는  넋 놓고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야 임마! 후퇴 시키라고!”

나는 서포터의 멱살을 잡아채면서 소리 질렀다.

“자, 잠깐만, 위치를 벗어나면 안 돼. 상부에 보고부터 해야....”

그녀가 손을 덜덜 떨면서 무전기를 잡았지만, 무전기 버튼도 제대로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씨발 일단 후퇴하라고!”

나는 유미를 비롯한 나머지 팀원들에게 소리 질러서 후퇴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소리가 닿는 대로 다른 근접계 분대원들에게도 소리쳐줬지만, 몇몇 분대는 기어이 무전을 치고 자빠져 있었다.

우우웅!!

귀가 먹먹해지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깐 시야도 안개가  것처럼 흐려졌다.

강력한 염파에 노출되면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잠깐 훈련 어플 스크린이 뜨더니 노이즈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예전 아인종 근처로 갔을 때 마스터와의 연결이 끊기던 그때와 똑같았다.

설마 그때 그 가고일급 아인종이 나타난 건가?

방위군은 아인종도 세기에 따라 여러 급으로 나누었고, 헬기의 미사일에도 끄떡없었던 최초의 아인종에게 최상위인 가고일급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나타난  거대한 나비 모양의 타이탄급 몬스터였다.

“지지익....벼...경.....퇴...할 것.....등급 조정.....이탄.....”

몬스터로부터 거리가 멀어지자 먹먹해졌던 귀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고, 노이즈 섞인 무전기에서 등급 재조정과 후퇴하라는 지시가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틀렸다.

자리를 사수해야 한다며 몬스터의 염파장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무전을 들을  없는 상태였고, 뒤늦게 후퇴하려고 했지만 강력한 염파 때문에 고통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행동 불능에 빠져 있었다.

저대로 시간이 지나면 죽어버릴 것이다. 빨리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염파 타입 타이탄 몬스터는 한 번도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염파 방어막을 두르고 있을 것이고, 그걸 찢어줘야 할 대부분의 노련한 소드 헌터는 전투 불능이  버렸다.

오히려 군인 의식이 없는 우리 같은 애송이들이나 재빨리 자리를 이탈해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리를 벌린 뒤 상황을 파악했다. 이미 화력 분대의 헤비 슈터들은 사격을 시작했지만 방어막에 모두 막히고 있었다. 우리 분대원들은 물론 방금  염파장에서 벗어난 근접계 헌터들은 패닉에 빠져 있었고, 염파장 안에 남겨진 사람들은 아비규환이 돼 있었다.

웅장한 크기의 나비 몬스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존재만으로도 이미 방위군을 절반 이상 박살 내놨다.

나는 유미를 데리고 분대원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마스터와의 연결이 아직 끊겨 있다는 걸 확인했다.

“유미야  들어, 대답 들을 시간 없어.”

“으응?”

나는 다급하게 말을 쏟아 놨다.

“나는 사실 어떤 미친 염파 능력에 감염이 돼 있어, 그래서 수많은 남자들에게 강간당하고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아지고 있어. 그런데 거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어. 니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저 몬스터 덕분에 잠깐 제약이 풀려난 상태야. 언제 다시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몰라.”

“하, 한솜이?”

“계속 듣기만 해, 그런데 방법이 하나 있어. 확실한 건 아니지만, 사람을 감염시킨 염파 능력을 제거할 정도로 강한 염파 능력자가 있으면 제거하는 게 가능할 거야. 아니면 내가 그만한 능력을 갖추든지. 그래서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나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던 말을 뱉어냈다.

“제발 나  도와줘 유미야.”

 말을 하며 나는 눈물을 왈칵 쏟아 부었고, 그녀의 품에 안겼다.

이제 시간이 없다.

사람들이 죽기 전에  자식을 죽이러 가야한다.

하지만 나는 계속 그녀의 품에 안겨 있고 싶었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잠시 뒤 그녀의 팔이 내 머리와 등을 감싸 안아줬다.

따뜻하다.

“나는 계속 감시당하고 있어, 그러니 내가 남자들에게 당하고 있는 거나, 그 염파 능력에 대한 말을 나한테 하면  돼. 나도 너한테 못 할 거고. 내 대신 사람을 감염 시키는 염파 능력에 대한 정보 좀 찾아줘.”

그녀가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그녀의 품에서 마음을 안정시킨 뒤 눈물을 닦고 마음을 다잡았다.

말이라도 하니 좀 개운했다.

나는 장검을 장착 해제해 버리고 헤비 캐논을 꺼내 들었다.

후우....

날뛰던 가슴을 가라앉히고 크게 심호흡했다.

헌터로서 살다보면 언젠가는 맞게 될 일이었다.

죽음.

그것이 내 눈 앞에 있다.

“거기 있으라니까!”

나는 사격하기 좋을 만한 위치를 찾아 빌딩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 분대원은 이미 전투 불능이다. 덜덜 떠는 꼴을 보니 방어막을 찢으라고 보내봤자 개죽음이나 당할 거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유미는 무기를  들고  뒤를 따라왔다.

“누구 하나쯤은 방어막을 쳐줘야 할  아냐.”

유미가 힘 있게 대답했다.

소드 헌터들도 가드만큼은 아니지만 방어막을 칠 수는 있다. 하지만  정도의 몬스터에게 유미 수준의 방어막이 소용이 있을까?

그래도 그녀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거 같았기 때문에 더 물리치지는 않았다.

우우웅.....

나비 몬스터는 날개짓도 없이 둥둥 떠서 도심으로 이동해 가고 있었다. 헌터들이 수없이 사격을 하고 있었지만 강력한 보호막에 막혀서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마치 인간을 날벌레 취급하는  몬스터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자기  길이나 갔다. 그저 그뿐인데도 방위군은 막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방위군 전선은 계속 후진하면서 재정비를 했고, 한참 뒤 고위 염파 능력자들이 배치된 뒤에야 몬스터 주변에 염파 방어막을 쳐서 진로를 막을 수가 있었다.

“끼에에에!!”

앞길이 막히자 그제야 심기가 불편해진 몬스터가 공격을 시작했고, 염파형 몬스터답게 강력한 염파 폭풍을 방위군을 향해 쏟아 놨다.

“으아아아악!”

그러자 엄청난 두통이 머리를 휘젓고 지나갔고, 나와 유미는 바닥에 쓰러져 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는  나은 편이었다. 우리는 몬스터의 측면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영향을 안 받은 수준이었고, 염파 폭풍을 정면에서 받은 방위군 부대에서는 제대로 방어하지 못해 얼굴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버린 사람들이 나왔다.

“으아아!! 이거나 먹어라!”

나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포격을 시작했지만 역시 방어막을 뚫을 수가 없었다.

고위 염파 능력자가 와서 그 자식의 방어막을 어느 정도 중화시켜두긴 했지만 아직 부족했고, 내 포탄에 염파 코팅을 해줄 서포터가 없다보니 약해진 방어막도 뚫을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염파 능력부터 성장시킬 걸.

또 다시 후회가 치밀어 오른다.

“왜 그러는 거야? 왜 안 뚫려?”

내가 안간힘을 쓰지만 전혀 공격이 먹히지 않는 걸 옆에서 보고 있던 유미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했다.

“나 혼자서는 방어막을 못 뚫어. 하다못해 화력 지원 서포터라도 있으면 나을 텐데.”

소드 헌터팀의 서포터는 이 상황에 도움이 안 돼서 데려올 필요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갑각은 없어 보이니까 방어막만 뚫으면 될 거 같아.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유미가 인상을 쓰더니, 갑자기 건물들을 타고 펄쩍 뛰어서 몬스터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안  유미야!”

나는 그녀의 생각을   있었다. 직접 방어막에 달라붙어서 나를 위해 찢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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