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4화 〉54화 2학년 2학기 (54/100)



〈 54화 〉54화 2학년 2학기

나는 여름 여행이 끝날 때까지, 유미에게 속마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눌러 참아야 했다.

제발 나  도와달라는 말.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이 조금씩 정리될수록 그녀에게 말을 꺼내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선태를 이길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스터가 선태의 행동이 마음에 든다고 한 이상 그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괜히 선태를 떨어뜨려달라는 말을 꺼냈다가 유미도 나랑 같은 처지가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남자들에게 받는 고통도 괴로웠지만, 나를 도와주던 그녀까지 위험에 빠지는  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있었다면 선태는 방학 내내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얌전히 쉬지만은 않았다.

그동안 남자들이 열심히 개발을 해둔 덕분에, 며칠은 견딜 수 있었지만 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대부분을 자위하는 시간으로 채워갔다.

무슨 일을 하든 자연스럽게 내 손은 몸을 만지고 있었고 견디다 못한 나는 규태를 학교로 부르기까지 했다.

결국 작년 방학까지는 열심히 했던 헬스와 훈련을 그만두고 규태와 학교 내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번화가를 돌아다니고, 도시 안에 있는 여러 곳을 다니며 영상들을 찍었다.

하지만 끝까지 영상은 내 핸드폰으로만 찍었고, 그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나랑 사귀지 그래?”

방학이 끝나던 마지막 날까지 영상을 같이 찍으면서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규태는 어디까지나 성욕 채우기용 도구에 불과할 뿐, 사귀고 싶은 상대는 아니다. 아니, 그 어떤 남자와도 사귀고 싶지 않다.

내가 단호하게 거절해버리자 그가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했지만 특별히 나를 협박하는 등의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똑똑....

등교 첫날, 여느 때처럼 인사를 하기 위해 병과장실에 왔다. 그는 항상 내가 도착할 때에는 먼저 자리에 와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아직  오셨나?

나는  번 더 노크를 하면서 대답을 기다려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문고리를 돌려봤고,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방 중앙에 서서 허망한 심정으로 방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벽을 꽉 채우고 있던 책장 속 책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의 책상 위도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도둑?....은 아닐 것이고....

사라져 버렸다.

“선생님?....”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 나왔다. 혹시 쪽지 같은 거라도 남겨놨을까라는 생각에 책상으로 가 서랍들을 전부 뒤져봤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쪽지는커녕, 그가 쓰던 메모장  장조차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져 있었다.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공허한 방, 그리고 내 마음도 따라서 공허해지는 느낌이었다.

“....선생님....”

나는 습관처럼 책상 아래로 들어갔다. 그러면 그가 돌아와서 의자에 앉아 바지를 내려줄 것처럼,

한참이나 그곳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연구동을 빠져 나왔다.

그는 나를 학대하기도 했고, 헌터 성적으로 협박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그에게 봉사하는 게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덕분에 생활의 방향성을 잡을  있었고, 중요한 작전들에 참여해 코어도 잔뜩 모을  있었다.

그의 사상이 어떻고,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가 남아있는 게 여러모로 내게 도움이 됐다.

그리고 그의 자지를 물고 있을 때면, 어쩐지 엄마의 젖을 빠는 듯한 기분이 돼서 굉장히 심신이 안정이 됐었다.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그가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그가 안아주고, 이제 그런 걸 해줄 사람이 없다.

유미로는 안 된다. 그녀는 선생님을 대신해줄 수가 없다.

동기들이나 선태도 할 수 없는 것들이다.

흐윽....흑흑....

연구동을 빠져나오자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주변 학생들이 그런 내 모습에 놀라며 바라봤지만 그런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선생님, 저랑 사귀고 싶지는 않으세요?’

‘아니, 한솜이는 아직 부족하단다. 하지만  성숙해지면 어떨지 모르지.’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받는 대 더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떠나면서 나를 데려가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더 열심히 했더라면 선태 같은 놈에게 남겨두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와서 화장실로 들어와야 했다.

화장실에서 가슴을 조금 진정시킨 뒤 내가 향한 곳은 실습실이었다. 동기들에 대한 혐오감이 풀린 건 아니었지만, 병과장에 대한 소식을 들을 곳이 그곳뿐이었다.

“오랜만이야 한솜아.”

내가 실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몇몇 동기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들 입장에서는 몇 달 만에 내가 실습실에 들어오는 거니까 그럴 만했다.

예전에 내게 보였던, 벌레를 보는 듯했던 시선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들도 이미 그때의 감정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병과장님 어디 가셨는지 알아?”

“아니? 어디 가셨대?”

나는 대뜸 2학년 대표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도 금시초문이라는 듯했다.

“아, 맞다! 병과장님 교수 그만 두셨다던데.”

그리고 구석에 있던 놈이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뭐어? 왜? 언제?”

“방학 중에 그만 두셨다던데. 이유는 모르겠어.”

나는 갑자기 누군가 내 심장을 꽈악 쥐어짜는 듯한 고통과 답답함을 느꼈고, 근처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 보니 한솜이 병과장이랑 친했었지? 자주 연구실에 가는 거 같던데.”

“....응...맞아....”

“너한테는 아무 말 없었어?”

“....응, 아무 말 없었어.”

이유 없는 실종, 나는 마스터를 떠올렸다. 그가 손을 댄 걸까. 하지만 선생님의 행동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는 약을 쓴 적도 없고 말이다.

다른 원인으로는 선태가 떠올랐다. 그는 방학동안 집에 있겠다고 했지만, 그를 믿느니 애새끼 옹알이를 믿을 것이다. 선태가 나와 선생님의 관계를 눈치 챘고, 선생님에게 보복을 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선태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그는 내가 먼저 연락하는 걸 싫어했다. 나에게 용무가 있을 때만 그가 먼저 연락했고, 내가 그에게 먼저 연락하는 건 자신의 삶을 방해하는 걸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덜컹....

그때 규태가 실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고,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흠칫 놀라며 멈췄다가 어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2학년 2학기쯤 되자 슬슬 대학 생활도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1학년 초에 느꼈던 권태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권태였다. 그때는 기대했던 것들이 부서진 대서 온 것이었지만, 이제는 매일이 비슷하다는 것에서 오는 권태였다.

테스트도 익숙해지고, 무기 사용하는 것도 익숙해지고, 학교 주변에 있는 음식점을 한 번씩은 다 돌아봤다는 대에서 오는 권태.

그런 지루함이 나뿐만 아니라 동기들 얼굴에도 잔뜩 묻어 있었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랬는지 모르겠으나, 어쩐지 동기들이  눈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해서 그런가? 그러면 사과를 하든가 자식들아.

지난 학기 때, 선태와 사귄다는 이유로 조롱 섞인 비난의 눈길을 보냈던 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찬호의 죽음에 대한 충격도 점점 옅어지고, 계속 열리는 게이트 때문에 사상자가 생기는 게 타인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체감하기까지 했다.

찬호뿐만 아니라 동기 중에서도 작전에 참가했다가 다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자퇴하고 헌터를 아예 포기해 버린 사람도 있었고, 다른 과 학생 중에는 몬스터에게 죽은 학생도 있었다.

찬호를 통해 처음 다가온 죽음은 너무 충격적이고 이질적인 것이었지만, 단 몇  만에 일상적이고, 헌터를 하기로  이상 족쇄처럼 달고 다녀야 하는 것이 돼 버린 것이다.

어쩐지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그 분위기를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실습실 밖으로 튀어 나와 버렸다.

“어, 한솜아.”

그리고 오랜만에  자식을 마주쳤다.

김주선.

 자식 아직 학교 다니고 있었구나. 분명 다른 부상자들을 보면서 도망쳐 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학교 다니고 있었네.”

그리고 그 생각이 입으로 튀어 나와 버렸다.  자식은 경계심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찐따 자식이니까. 착한  다른 이야기다.

“어, 응. 오랜만이네. 오늘 개강 파티 올 거야?”

음....맞아 그런 게 있었지.

지난학기의 일 때문에 이번에는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갈 생각이 없었고.

하지만 선생님마저 사라져 버린 지금, 어딘가에 마음을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유미가 어느 정도 그 역할을 해주고는 있지만, 그녀와 같이 지내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요즘은 민규와 호수도 잘 안 보였기 때문에 다시 동기들이랑 친하게 지내도   같았다. 규태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본인이 독차지할 수 있는 특혜를 다른 학생들에게 까발리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해볼게.”

그러자 김주선이 여전히 어눌한 태도로 알겠다고 대답한 뒤 실습실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가고 싶었지만 선태의 허락을 받는 게 우선이었다. 물론 선태를 위해서 그런 건 아니다. 괜히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무슨 짓을 당할지 겁이 나서 그런 거지.

하지만 하루 종일 선태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직 학교에 오지도 않은 듯했다. 그래서 개강파티가 시작되기 조금 전 대표에게 말해서 참가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나타난 한솜이를 위해 건배!”

이제 거의 2년쯤 되니 동기들이 자주 오게 되는 술집도 정해졌다. 그리고 괜히 찝찝하게 하필 도찬호가 처음 나에게 협박했던  술집이었다.

이들은 이제 찬호를 거의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성인으로서 생활을 좀 해보기도 하고, 게이트 작전에 실제로 참가도 해본 탓인지, 작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다시 말해, 남자다워졌다는 말이다.

말투와 눈빛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학교에서 훈련만 하던 때와 달리 상당히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 티를 못 벗고 있던 작년에 비하면 거의 열 살은 더 먹은 것처럼 성숙해진 이들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우울해지기도 했다.

나는 성장하기는커녕 점점 여자가 돼 가고 있는데....

여자가 된  1년이 넘었다. 이제는 옛날 내가 어떤 식으로 말을 했고, 어떤 식으로 행동했었는지 기억도  났다.

“이번 여름에도 같이 놀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 옆에 있는 놈이 낄낄대며 떠들었다. 모두들 얼근하게 취해서 마구 떠들어 대고 있었는데, 작년에는 누가 아다니, 누가 여친이 생겼다느니 하는 이야기나 하던 것들이, 이제는 이미 두세 번씩은 여자를 갈아치운 뒤였다.

그래서 쑥맥처럼 힐끔힐끔 내 몸이나 훔쳐보고 여자에 관심이 많던 시절의 소년들은 사라지고 여자와 동석하는  익숙해진 남자들만 남아 있었다.

“햐아, 요즘은 섹스 하는 것도 귀찮아. 늙었나봐.”

“씨발 너무 많이 하니까 그러지.”

그러면서 또 낄낄대는 것이었다.

아직은 혈기 왕성한 나이라서인지,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 섹스 이야기가 빠지질 않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동기들과 어울리는 자리가 기분 좋았다.

“2차 갈 사람? 이번에 태서가 쏜다는데.”

“오오오~”

사방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태서는 소위 금수저로, 이따금씩 한턱내면 대학생답지 않은 배포를 보였다.

하지만 좋았던 반응에 비해 그를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네댓 명 정도가 따라가는 느낌.

애초에 개강파티에 참여한 동기 자체가, 아니 아직까지 학교에 남아 있는 학생이 많이 줄어 있었다. 대학 생활에 흥미가 줄어서 떨어져 나간 사람도 있고, 게이트 작전에 참가해보고 헌터를 포기해 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건 우리과나 우리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도 갈게. 오랜만인데 벌써 가긴 아깝지.”

나도 태서 쪽으로 붙었다. 오늘은  좋게 선태가 학교에 오지 않고 연락도 없어서 자유롭지만, 그가 학교에 오면 다시 이런 술자리에 참석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니 즐길 수 있을 때 충분히 즐겨놔야 정신적으로도 힘이 될 거 같았다.

결국 태서를 포함한 다섯 명만 번화가로 가기로 했고, 규태가 섞여 있는 게 약간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오랜만의 술자리에 들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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