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40화
병과장이 내 방을 떠나간 지 몇 주 뒤, 유미와 약속했던 날이 될 때까지, 그 동안 찍은 한 달간의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내가 어떤 식으로 그에게 교육받는지, 나는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그리고 내가 모든 감각이 차단된 채로 가구가 돼 있었을 때 그가 나를 어떤 식으로 사용했는지, 계속 반복해서 돌려봤다.
그리고 잔뜩 위축돼 있고, 그에게 일거수일투족을 다 의존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이상했다.
분명 당시에는 고통스럽고 자괴감에 혼란스러웠는데, 영상에서 보이는 내 모습, 남자에게 완전히 굴복당하고 지배당하고 있는 내 모습은 가슴을 뛰게 하면서 알 수 없는 쾌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유미와 만나는 날이 되기까지 영상에 푸욱 심취한 채로, 계속 자위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성감 레벨이 올라서인지 한 번 달아오르기 시작하면 내 몸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이야, 오랜만이야. 한솜아. 그동안 쭉 자취방에만 있었던 거야?”
한 겨울에 만난 그녀는 인형처럼 흰색 롱패딩에 돌돌 말려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자취방에 계속 있는 거야?”
그녀는 미리 훈련 시설을 이용할 겸, 이참에 다시 자취방에 들어오기로 했다. 그 말만 들었을 뿐인데도 벌써 남은 방학 기간을 그녀와 지낼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와 가기로 한 곳은 도시 구석에 있는 스키장이었다. 근처에는 온천이 있는 펜션이 있었기 때문에 꽤 기대되는 여행이었다.
“너 그 이야기 들었어? 얼마 전에 이 근처에서 평소랑 다른 아공간 게이트가 관측됐었대.”
그녀가 말한 시기는 내가 선생님에게 교육받고 있을 때였다.
“모든 도시에서 다 비슷한 현상이 있었나봐. 게다가 레이더에는 잡히지도 않아서 원래 연결되던 아공간이랑 다른 곳이 아닌가 긴장하고 있대.”
꽤 심각한 내용인 듯했지만, 그녀는 마치 새로운 모험이라도 펼쳐질 것처럼 기대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도 작전에 투입될 수 있을까?”
나도 기대하면서 물었다.
사실 아공간 게이트 작전에 투입되면 대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운이 좋다면 게이트리움 광석을 얻어서 돈을 좀 벌 수도 있고 말이다.
지금은 게이트 숫자가 적고 침투해오는 몬스터 숫자도 적었기 때문에 도시 방위군 선에서 정리가 됐다. 다만 교육 목적으로 일부 몬스터는 대학생들의 실습 재료로 남겨두기도 했다.
병과장이 말했던 그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몬스터가 한정돼 있기 때문에 모든 대학생이 실습에 참가할 수가 없다. 몇몇 선택받은 학생만 그 특혜를 누릴 수 있었고, 만약 내가 아닌 도찬호가 뽑혀 가 버린다면 그에게 추월당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게이트 숫자가 늘어난다면 실습 기회가 더 많아질 테니, 병과장에게 잘 보여서 모두 독차지하면 다시 격차를 늘리면서 에이스 자리를 지킬 수 있다.
유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게도 소중한 기회였다.
“어쩌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2학년 때야말로 개성을 개화시키고 싶은데.”
그녀가 눈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선생님에게 말해서 도찬호는 작전에서 빼달라고 부탁해볼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너무 비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몸을 파는 거 같기도 하고.
나는 어디까지나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그에게 협조하는 거지, 몸을 이용해서 특혜를 받으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창녀가 돼 버린 것 같은 수치스러운 느낌이 됐다.
“이야....꽤 좋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탁 트인 정면의 큰 창문으로 눈에 뒤덮인 산들이 보였다. 펜션이 언덕 위에 있는 덕분에 시원하게 트여 있는 경치를 기분 좋게 내려다볼 수 있었다. 시야 구석에는 스키장이 보였고, 사람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아스라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평범한 펜션 서너 개를 붙여놓은 정도로 크고 근사한 건물이었다. 온천도 펜션에 딸려 있었다. 우리 말고도 몇 팀이 더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야, 여기 너무 비싼 거 아냐?”
생각했던 것보다 화려한 시설에 내가 걱정하며 물었다. 숙박비는 그녀가 대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친구끼리 오는 건데 뭐 어때, 대신 오늘 식비는 니가 다 내.”
“그런데 우리 어떻게 이동해? 운전할 줄 알아?”
그녀가 오늘 돌아다닐 장소들을 지도로 보여줬고, 내가 그곳들을 보면서 물었다. 우리는 차도 없고, 여기까지 올 때도 버스를 타고 왔다.
그런데 그녀가 찍어주는 곳도 결코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할 줄 모르는데? 넌 할 줄 알아?”
“....응?”
우리는 잠시 서로 마주보면서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가 전부 자신에게 맡기라고는 했었으나, 그녀는 자신이 가보고 싶은 곳들만 찍고, 숙소만 잡았을 뿐, 자세한 계획은 정리된 게 없었다.
심지어 이동 수단까지도.
“히히, 이런 것도 여행하는 맛이지.”
그녀가 낄낄대며 웃었다.
결국 우리는 여행을 와서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하지만 전혀 지루하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이런 것도 대학생 시절에나 느껴볼 수 있는 재미인 것이다.
그리고 기어이 그녀는 방학 전부터 반드시 가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만두집으로 날 데리고 왔고, 그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했다.
“유미 픽 인정합니다.”
나는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한 접시만 먹어보자고 했던 우리는 어느새 빈 접시로 탑을 쌓아가면서 먹고 있었다.
아니 이 정도면 처먹는다고 해야지.
“아아....맛있었다. 다음에 만두 먹으러 또 오고 싶은 맛이야.”
나는 만족스럽게 배를 쓰다듬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바깥을 보니 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지 히히.”
“....오늘은 만두만 먹고 끝?”
내가 허망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고, 그녀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빵 터져서 낄낄댔다.
하지만 확실히 버스를 타고 이동하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숙소에 도착하면 이미 해가 떨어져 있을 것 같았다.
“하아....겨우 만두 하나 먹고 왔는데 벌써 지친다.”
나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별 거 안 했는데도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지치게 만들었다.
“내일 스키 타러 가야하니까, 오늘은 일찍 자자.”
그녀가 침대에 엎드린 채로 나를 바라보다가,
“아 그런데 여기 오락실 있던데, 한 번 가볼래?”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한 번 가볼까.”
펜션이 꽤 넓은 만큼 오락실도 상당히 넓었다. 탁구대도 있고 당구대도 여러 개 놓여 있었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꺄하하하하, 야, 이거 안 되겠다. 당구 한 번 해보자.”
우리는 탁구대로 가서 공을 몇 번 튀겨보려고 했지만, 그녀나 나나 탁구를 아예 처음 해봤기 때문에 서로 공을 보내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질 못했다.
당구도 룰은 내가 대충 알고 있었지만, 고등학생 때 한 번 해본 게 전부라서 제대로 할 줄 몰랐고, 그녀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냥 당구채로 공을 굴리는 대에만 의의를 둔 게임이 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공이 굴러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상당히 넓은 오락실을 우리 웃음소리로 가득 채우고, 땀을 흠뻑 흘릴 때까지 몸을 움직인 뒤에 우리는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온천으로 갔다.
펜션에 몇 팀이 더 있는 거 같았지만, 여자는 별로 없었는지 온천에는 우리뿐이었다.
“아아....녹아버릴 거 같다....”
나는 탕에 들어오자마자 뜨끈뜨끈한 물의 열기에 온 몸의 근육이 이완되면서 행복해졌다.
“히히, 왠지 부끄럽다.”
그녀나 나나 차마 서로 알몸을 볼 수는 없어서 목욕 타올을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드러난 목선이나 어깨, 쇄골을 보니 마치 내가 남자라도 된 것처럼 살짝 흥분되고 민망했다.
보글보글....
나는 얼굴을 반쯤 탕에 담근 채로 입으로 방울을 만드는 장난을 했고, 유미가 옆에서 그 꼴을 보며 웃었다.
편하다. 행복하다.
어쩌면 내가 여자가 됐기 때문에 겪어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남자였다면 또 엠티랍시고 그 사내새끼들이랑 어느 방에 처박혀서 술이나 까고 있었겠지.
하지만 잠시 뒤, 유미가 진지한 얼굴로 분위기를 깼다.
“요즘 그 놈이랑은 어때?”
“응?”
도찬호 말이구나.
“아직 사귀는 중이지.”
“....혹시 벌써 잤어?”
“에엑, 뭐 그런 걸 물어봐.”
새삼 민망해진다. 병과장이 물어봤을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의 수치가 올라온다.
“하긴 뭐 성인이니까.”
그녀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언제 헤어질 거야?”
“꼭 헤어져야 돼?”
“당연하지.”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평소 보지 못했던 진지한 얼굴. 근육이 기분 좋게 풀어져 있고, 열기 때문에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그녀의 얼굴이 내 마음 속에 있던 말을 끌어내려고 했다.
“사실 헤어지고 싶긴 한데, 아직 그럴 수가 없어.”
“그건 왜? 걔가 협박해서?”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주저하다가, 2학년 선배인 고기흥에게 당했던 걸 고백했다. 물론 적나라하게 모든 걸 다 말한 건 아니고, 약에 취해서 모텔에서 당했다는 정도로만 생략했다.
그녀는 자기가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울상이 돼서 나를 위로해줬다.
“하지만 사실 그 정도는 약과야, 도찬호가 있기 때문에 다른 남자애들이 접근을 못 하고 있는 거지. 걔랑 헤어지면, 다른 동기들도 그런 식으로 달려들 거 같아. 그게 너무 무서워서, 차라리 찬호랑 계속 사귀는 거지.”
그러자 잠잠히 듣고 있던 그녀가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서 나를 안아줬다.
“유, 유미야?”
그러더니 자신의 타올을 벗어서 물에 띄워 버리고 알몸이 됐다. 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괜찮아 한솜아, 내가 안아줄게.”
그녀의 손이 타올을 꽉 잡고 있는 내 손을 어루만진다. 그러다가 내 타올마저 천천히 벗겨 냈고, 나는 부끄럽고 민망한 감정을 꾸욱 참으며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녀가 내 가슴에 닿지 않게 조심히 내 어깨와 허리를 감싸 안아줬다.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자, 마치 엄마의 품에 안긴 것 같은 편안한 감각이 됐다.
팔뚝에 닿아 있는 그녀의 가슴을 통해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고, 그녀의 옅은 맥박이 느껴졌다.
내 심장은 이미 터질 것처럼 세차게 뛰고 있어서, 탕 안에 내 심장 소리가 가득 차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으으....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다시 돌려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아담한 가슴에도 내 것처럼 귀여운 젖꼭지가 달려 있는 게 보였고, 그녀도 내 체온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말랑말랑해 보이는 입술이 보인다.
키스해보고 싶다.
나는 비어있는 손을 움직여서 그녀의 얼굴을 만져봤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으음...”
내가 그녀의 이마와 볼을 쓰다듬자, 그녀가 기분 좋은 듯한 소리를 내며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계속 그녀의 입술과 가슴, 사타구니로 눈길이 가서 손을 떼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나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녀가 일어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어때, 좀 진정 됐어?”
잠시 뒤, 그녀가 고개를 들면서 물었다. 발갛게 상기돼 있는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야해 보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우리 둘 다 다시 타올을 몸에 감았다. 조금 더 온천을 즐기다가 방으로 돌아왔고, 뜨끈뜨끈해진 몸의 열기를 느끼며 행복한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