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10화
“미친놈들아 술을 왜 까.”
나는 선 채로 그들에게 투덜거렸지만, 헤실헤실 웃을 뿐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이, 그러지 말고 마시자. 저녁도 못 먹어서 배고픈데 조금만 봐줘.”
도찬호는 특별히 수긍하는 말도, 거부하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른 두 명의 뜻에 동조하듯 이미 맥주캔을 까서 마시고 있었다.
“야, 민규야, 안주 좀 만들어봐.”
그러자 저녁 먹고 싶다고 징징대던 키 작은 놈이 오늘 산 짐을 뒤적뒤적하더니 삼겹살 팩을 하나 꺼냈다.
“씨발, 내일 먹을 거 아니었어?”
나는 주방 쪽을 막아서고 말했다. 오늘 먹냐 내일 먹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자식들 아예 눌러 붙어 버리려는 기미가 보였고, 요리까지 시작하려는 걸 막기 위한 것이었다.
“부족하면 내일 아침에 또 사면 되지, 주방 조금만 쓸게~”
민규는 나를 조심스럽게 피해서 주방에 들어갔다.
하아.....
“야, 너무 그러지 말고 좀 쉬어. 좀 예민해진 거 아니야?”
민규랑 계속 친근하게 지내던 놈, 호수였던가, 그 놈이 자기 옆 자리를 손으로 탁탁 치면서 말했다.
예민?....
내가 예민하다고?
후우....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그놈 옆에 앉지 않고 그냥 적당히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훈련자 놈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하기도 하고, 도찬호와 같은 조라는 것 때문에 예민해져 있는 건 맞았다.
남자이던 시절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도, 여자가 되니 신경 써야 하는 것도 많았고 날 무섭게 하는 것도 많았다.
사실 그냥 평범한 여자들이었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들도, 훈련자 때문에 나에게는 걱정덩어리가 됐다.
솔직히 대학생끼리 친구 자취방에서 술 마시면서 노는 일이야 흔하니까, 그게 여자 방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그냥 냅다 강간해버리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도찬호가 있는 게 불안하긴 하지만 나머지 두 명도 같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시선 때문에라도 나를 건드리진 않을 것이다.
겨우 차지한 리더 지위를 잃고 싶지는 않을 테니.
남자들이 여자를 밝히고 내 몸을 훔쳐보는 것과,
못 참고 성범죄를 일으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래,
내가 너무 예민했다. 인정하자.
“야, 나도 줘봐.”
호수가 내게 맥주 캔을 굴려줬다.
“하여튼 개새끼들, 남의 방에 무작정 들어와서 술이나 까고, 뒷정리는 하고 가 씹새끼들아.”
“아, 당연하지, 민규가 다 정리 해 줄 거야 낄낄.”
호수가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이제 막 요리를 시작한 민규가 ‘아 꺼져’ 하면서 화내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술도 조금 들어가고, 조금 시끌벅적해졌을 때, 걱정이나 두려움 같은 건 손톱만큼도 남지 않고 이 멍청한 것들과 동화한 채로 술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씨발, 오늘 한솜이 너무 마음에 든다. 평소에는 그렇게 무게 잡고 무섭더니, 오늘은 되게 재밌게 잘 노네.”
“좆까 이 새끼야, 니들이 너무 유치한 거야.”
나도 어느새 그들처럼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솔직히 재밌었다.
등신 같은 농담을 하고, 언젠가 길거리에서 한 번 본 여자에 대한 성희롱적 농담을 하고, 서로 쌍욕하면서 음식을 사람이 먹는 건지 자취방 바닥이 먹는 건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놓고, 근심이란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낄낄대는 게,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친구들과 논다는 게 이런 거였나.
어쩌면 그동안 이들을 멍청이라고 무시하면서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게 내 실수였던 걸까.
오히려 여자가 되면서 이놈들이랑 수준이 맞춰지니 잘 어울릴 수 있게 된 건가.
그런 생각도 드는 밤이었다.
조금 더 같이 놀아도 좋겠다.
“아, 그러고 보니 나 그거 가져왔어.”
민규가 히히 웃으면서 자기 가방을 뒤적였다.
그가 꺼낸 건 젠가였다.
“아니, 이 미친놈아 그걸 들고 다니는 또라이가 어딨어.”
호수가 낄낄대며 조롱하면서도, 가장 먼저 민규한테서 젠가를 받아 들었다.
“내일 엠티 가면 가지고 놀려고 가져왔지.”
“씨발 해수욕장 호텔에서 잘도 가지고 놀겠다.”
“그럼 내놔 이 새끼야,”
민규가 호수로부터 다시 뺏으려고 했지만, 그는 뺏기지 않으려고 몸을 비틀었다.
“씨발 뭐 하냐 니들 낄낄.”
이미 나나 그들이나 술에 진탕 취해 있었기 때문에 몸싸움이라기보다는 망둥이 두 마리가 몸부림치는 꼴에 가까웠다.
오늘밤 도찬호는 말수가 적었지만 그도 낄낄대며 민규와 호수의 몸싸움을 감상하고 있었다.
짜식 대장이 됐다고 무게 잡는 꼴 좀 봐라.
아 저게 예전 내 모습인가.
씨발. 이렇게 보니 좆같긴 하네.
겨우 몸싸움이 정리된 뒤, 대충 정리된 방 중앙에 젠가 탑이 세워졌다.
“근데 벌칙은 뭐로 하지?”
“그냥 술 마시는 걸로 하면 되지 뭐.”
“씨발 너는 아까 그렇게 토해놓고 술이 더 들어 가냐.”
“그럼 뭐 할 건데? 돈 내기라도 하게?”
민규와 호수는 지치지도 않고 티격태격했다.
“흐음....”
민규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하더니,
“옷 벗기 게임은 어때?”
“.....”
뭐?
“미쳤냐?”
내 입에서 반사적으로 욕이 튀어 나왔다. 나는 살짝 웃음기가 사라지며 경직되기 시작했다.
“뭐 어때, 대학생 되면 다들 한 번씩 해본다던데 낄낄.”
하지만 민규는 그런 내 변화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고, 호수도 미친 새끼라고 욕하면서도 그에게 동조하는 것 같았다.
“야, 아무리 그래도 여자가 있는데 옷 벗기는 좀 그렇지 않냐.”
도찬호가 웬일로 내 편을 들어줬다.
“아냐, 씨발 까짓 거 해.”
나는 그 호의를 걷어차 버렸다.
이 좆같은 새끼한테 도움을 받느니 알몸이 되는 게 낫다.
<ㅋㅋㅋㅋㅋ 좋아, 그렇게 하는 거야 한솜아.>
스크린이 뜨면서 훈련자의 문자가 떴다.
어차피 이놈이 내가 거절하는 꼴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기왕 할 거라면, 내가 주도적으로 나가는 게 정신적으로 유리하다.
각자의 앞에는 작은 소주잔이 하나씩 놓였고, 그 안에 맥주가 따라졌다. 전부 이미 머리끝까지 술이 가득 차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정도로도 충분히 역겨울 정도로 부담됐다.
나는 홧김에 옷 벗기 게임을 하자고 말하긴 했지만, 머릿속으로는 내가 입고 있는 옷의 개수를 가늠하고 있었다.
다행히 장보러 나갈 때도 속옷을 벗으라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티셔츠와 돌핀팬츠, 속옷 한 벌, 이렇게 네 번 기회가 있었다.
솔직히 그것도 너무 적었다. 단순히 옷 개수로만 따지면 네 번이나 되지만, 한 번만 져도 티셔츠를 벗고 브라를 깐 반나체나 다름없는 꼴이 돼야 한다. 두 번 지면 완전히 속옷차림,
그때도 이 자식들이 이성을 붙잡고 나를 덮치지 않으리란 장담을 할 수가 없다.
룰은 간단했다. 젠가를 하다가 탑을 무너뜨린 사람은 앞에 놓여 있는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옷을 아무거나 벗는 것이었다.
“흐흐, 오늘 드디어 한솜이 몸을 볼 수 있는 건가.”
민규 이 씹새끼가 능글맞게 웃으면서 손을 삭삭 비볐다. 술이 너무 많이 들어갔는지 이 새끼들 이제 말에 조심성이 없다.
“좋아 그럼 나부터 해볼까.”
민규가 손을 싹싹 비비면서 젠가를 흐리멍텅한 눈으로 노려봤다.
“이 새끼 손가락 떠는 거 봐라, 바로 넘어뜨리는 거 아냐?”
옆에서 호수가 낄낄땠다.
“아 씨발, 좀 닥쳐봐, 집중 안 되잖아.”
민규도 본인의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웃긴지 빵터져서 진행을 못 하고 있었다.
“휴우, 존나 힘들었다.”
민규가 겨우겨우 첫 번째 블록을 빼내며 한숨을 쉬었다.
“씨발 처음이면서 그렇게 애먹냐, 근데 이거 언제까지 하는 거야?”
호수가 자기 차례 블록을 빼기 위해 엎드린 채로 물었다.
“응? 누군가 옷을 다 벗으면 끝 아니야?”
민규도 잘 모르겠다는 투로 대답했다. 사실 이런 걸 해볼 기회가 있어야지.
“그럼 그렇게 하자.”
호수도 손가락을 바들바들 떨면서 블록에 손을 가져다 댔고, 그를 방해하기 위해 민규가 바짝 붙어서 낄낄댔다.
“오오, 넘어간다! 넘어간다!”
“아 씨발 닥쳐라 진짜.”
내 차례가 되자, 나도 엎드린 채로 블록을 뽑아내려고 하는데, 이 새끼들이 양쪽에서 웃으면서 방해하는 통에 손가락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휴우....
“아아~ 아쉽습니다.”
내가 아슬아슬하게 블록을 뽑아내자 민규가 굉장히 아쉽다는 투로 실망했다.
그렇게 두 바퀴, 세 바퀴 돌았다.
모두 술에 잔뜩 꼴아 있는데도 첫 게임이라서 그런 건지, 옷 벗기 게임이라서 그런 건지 쉽게 탑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술기운이 가득한 채로 긴장과 이완이 계속 반복되다보니 실없는 잡담이나 하던 때보다 훨씬 즐거운 기분이 됐다.
이래서 술게임에 그렇게 환장을 하는 건가.
“오오! 드디어!”
그러던 중, 드디어 첫 번째 실수가 나왔다.
그 주인공은 바로 도찬호였다.
“아 씨발, 거의 다 됐는데.”
그는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린 뒤,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윗옷을 훌렁 벗어 버렸다.
그러자 탄탄하게 자리 잡혀 있는 근육질의 상반신이 바로 튀어 나왔다.
“아, 씨발 이거 남자한테 불리한 거 아냐? 여자는 속옷도 두 개잖아.”
“씨발 그럼 너도 브라 하나 줄까?”
나는 근처에 그냥 널브러져 있던 브라 하나를 잡아서 도찬호에게 집어 던졌다.
“좆까, 저리 치워.”
그가 웃으면서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자 민규가 다다다 기어가서 주워오더니, 자기 티셔츠 위에 그걸 찼다.
“우흥~ 벗겨주세요~”
그리고는 야동에나 나오는 여자들처럼 요염한 자세를 취하며 지껄였다.
“지랄 말고 빨리 벗어 미친 새끼야.”
내가 낄낄대며 말했지만, 그는 기어이 자기도 차야겠다며 그 꼴로 게임을 진행했다.
두 번째로 탑을 무너뜨린 것도 도찬호였다.
“아 씨발 진짜, 바닥이 이상한 거 아냐? 왜 자꾸 나만 이러냐.”
그는 손가락이 남들보다 두꺼워서 훨씬 불리한 거 같았다.
“으 씨발 눈갱.”
그가 바지를 훌러덩 벗어서 팬티바람이 되자 민규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 존나 한솜이 알몸 보려고 시작했는데 찬호 꼬추나 보게 생겼네.”
“씨발 내 알몸 봐서 뭐하게 미친놈들아. 집에 가서 야동이나 봐.”
이젠 나도 이 새끼들의 성희롱을 어느 정도 받아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야, 솔직히 그만한 가슴은 야동에도 안 나와.”
민규가 반쯤 넋이 나가서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내 가슴을 보면서 말했다.
“요, 요기 있네.”
나는 민규가 차고 있는 브라를 찌르면서 대답했고, 그가 여자처럼 가슴을 가리면서 몸을 뒤틀었다.
“어머, 이러지 마세요! 제 몸은 호수 거란 말이에요!”
“이 씨발 역겹게 지랄하지 마라.”
그러자 호수가 먹던 과자를 민규의 얼굴에 던져 버렸다.
“씨발 역겨운 건 찬호 꼬추고.”
민규가 낄낄대며 자기 얼굴에 던져진 과자를 주워 먹었다.
“씨발 지랄 말고 빨리 계속 해. 이번에는 안 넘어뜨린다.”
찬호가 비장한 얼굴로 젠가를 다시 쌓았지만, 이미 한참 전부터 술에 꼴아서 풀어진 얼굴로 비장해봤자 우스운 꼴밖에 안 됐다.
휴우....
이제 한 번만 이기면 된다. 찬호 옷이 팬티밖에 안 남았고, 또 다시 찬호가 질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해지면서 이 분위기를 즐길 수 있게 됐다.
“한솜아, 니 차례야.”
찬호가 첫 번째 차례 블록을 정말 아슬아슬하게 빼낸 뒤, 민규와 호수를 지나 내 차례가 됐다.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나는 한껏 집중한 뒤 가장 만만해 보이는 블록을 슬며시 검지 손가락으로 밀었다.
스르륵....
제대로 코팅이 되지 않은 나무 결끼리 스치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온다.
“어어?”
하지만 잠시 뒤, 나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오! 한솜이 아웃!”
민규가 일어서서 오두방정을 떨었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내 손가락 끝을 노려봤다.
방금,
내 손가락이 이상하게 움직였는데?
“벗어라~ 벗어라~”
민규와 호수가 박수치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