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5화
그래 보통은 남자들끼리도 몸을 만지지는 않는다.
가슴? 당연히 만질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끼리 손이 가슴에 좀 닿았다고 쌍욕하면서 정색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도찬호의 반응이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다.
남자끼리였다면 말이다.
이상하게 행동한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그냥 그에게 웃어버리면서 재수 없는 새끼라고 해버렸으면 별 일 없이 지나가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단순히 정색을 하고 분위기를 경직시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까칠하고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에이스 유한솜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자꾸 생기면, 내가 여자인 것처럼 행동하게 되면 그들이 나를 보호 해줘야 할 여자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게 가장 위험한 상황이고,
아마도 훈련자가 기대하는 상황일 것이다.
보호해줘야 할 여자 다음에는, 보호해줄 필요 없는 여자의 위치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지금부터라도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써야 한다. 최대한 남자답게, 허세 넘치는 에이스답게,
씨발 그런데 이렇게 좆만해 본 적이 있어야지...
나는 항상 남들보다 키와 덩치가 큰 편이었다.
가장 크지는 않더라도, 누군가를 올려다 볼 일이 거의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고, 고등학생 때부터는 누군가를 올려다 볼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런 탓인지 남자든 여자든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줬던 게 사실이고, 특히 남자들은 나를 올려다보면서 주눅이 드는 게 내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여자가 된 뒤로는 거꾸로 내가 가장 작아져 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을 올려다본다는 것부터 이미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특히 도찬호의 키와 덩치가 그렇게 크고 위협적이었는지 이전에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그래도 그 새끼가 단순해서 다행이지, 괜히 여자 밝히는 변태새끼였으면 좆됐겠네.
그 자식은 지독한 관심병 종자였기 때문에 여자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는 데 더 열정을 쏟았다.
이 남자가 우글우글한 과에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일단은 헤비 캐논 튜닝부터 할까.
나는 미리 전술 기동 훈련장으로 이동한 뒤 헤비 캐논을 내 몸에 맞춰서 다시 튜닝하면서 테스트 시간을 기다렸다.
“브라보 다음 엄폐물로 전진.”
나는 귀에 달려 있는 전술 마이크에 대고 지시했다. 테스트에서는 별 이견 없이 내가 조장인 걸 유지했다. 교수가 여자가 돼 버린 날 보고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역시 프로인 건지 내 성별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전술 기동 훈련은 게이트가 열려서 시가지로 몬스터가 침투했을 때를 상정하고 퇴치 작전을 수행하는 훈련이었다.
이때는 팀 전술 능력을 훈련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헌터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용 자동 소총을 들고 평범한 보병으로서 훈련을 하게 된다.
으으....이게 이렇게 무거웠나....
물론 진짜 소총이 아니라 레이저 센서를 달고 있는 훈련용 모형 소총이었고, 실제 총기보다 가벼운 모델이었지만, 나에게는 돌덩어리를 들고 뛰는 것처럼 버거웠다.
그래도 죽을힘을 써서 훈련장 대부분을 무리 없이 소화하면서 마지막 장애물을 남겨 놓고 있었다.
“브라보 엄호 사격, 알파 전진.”
나는 침착하게 조원들을 한 단계씩 진행을 시켰다.
마지막 장애물은 진지를 만들어 놓고 대기하고 있는 조교들이었다. 그들이 몬스터 역할을 한답시고 쿠아앙 하는 소리를 입으로 내고, 물풍선 같은 걸 내던지고 있었다.
불쌍한 대학원생 새끼들. 저러자고 대학원에 들어간 건 아닐 텐데. 저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풍선도 어제 밤을 새서 만들었을 걸 생각하니 불쌍해졌다.
클리어 조건은 간단했다. 마지막 엄폐물까지 조원 손실 없이 이동한 뒤, 몬스터를 제압하면 된다. 레이저 소총으로 제압해도 되고, 근접 공격으로 제압해도 된다.
내가 있는 분대까지 마지막 엄폐물로 이동했다. 이제 소총으로 몬스터를 제압하기만 하면 A+가 나온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 테스트를 그렇게 싱겁게 끝내버려서는 안 된다.
이참에 내가 아직 상남자 유한솜이라는 걸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육탄전으로 조교놈들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이글 진입한다, 알파, 브라보는 엄호 사격.”
나는 뛰어 들어갈 준비를 하며 무전을 쳤다.
“굳이 진입해야 돼? 여기서 끝내면 이미 A+ 아니야?”
도찬호의 목소리였다. 보병 브라보A는 그냥 닥치고 있어라.
나는 순식간에 엄폐물에서 튀어 나갔다.
“에이씨!”
내가 있던 곳을 보고 있던 도찬호와 알파팀 조원들이, 정말로 내가 튀어 나가는 걸 보고 엄호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 민첩성은 여성화로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미숙한 대학원생들이 던지는 물풍선 정도는 피할 수 있다.
나는 쏟아지는 물풍선들을 피해서 순식간에 상대 진지로 들어갔고, 상대 헤드 몬스터에 해당하는 조교의 앞으로 뛰어 들어갔다.
“으읏!”
그가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진압봉을 휘둘렀지만, 나에게는 너무 둔하게 보였다.
틱!
“아아아얏!”
나는 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강하게 때렸다가, 도리어 콘크리트 벽에 주먹질 한 것처럼 내 주먹이 아프고 손목이 찌릿 하는 통증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아픈 손목을 부여잡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헤드 조교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이고~ 제압당했다~”
어린 조카와 놀아주는 듯한 어투. 그는 바닥에 누운 채로 날 올려다보며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꼴도 보기 싫은 얼굴을 발로 밟아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씨발....이게 아닌데....
주먹에 힘이 없는 것도 없는 거지만,
원래였다면 내 주먹에 실신했을 자식이 이렇게까지 나를 배려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야, 역시 한솜이 클래스 어디 안 가네.”
훈련장에서 복귀한 뒤 훈련 장비를 반납하면서 조원들이 나를 추켜 세워줬다.
그래도 무리를 한 효과가 어느 정도 있었나보다.
“씨발, 역시 한솜이는 여자가 돼도 이길 수가 없네.”
또 도찬호 새끼가 겁대가리 없이 내 어깨를 잡고 안마하듯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파 새끼야....”
나는 그의 안마를 견디지 못하고 온 몸을 비틀면서 손을 피했다.
“뭐 그 정도로 아프다고 하냐. 힘도 별로 안 줬는데.”
“씨발 내 몸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나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화냈다.
“왜 그렇게 유난을 떨어? 한솜이 너 진짜 여자처럼 군다?”
내가 계속 그에게 화낸 것이 슬슬 짜증을 불렀는지, 이번에는 도찬호도 지지 않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여자고 지랄이고, 너는 남자가 니 몸 만지는 게 좋냐?”
하지만 나도 지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거 좀 닿을 수도 있지, 그리고 내가 뭐 나쁜 의도로 한 것도 아니고 수고했다고 안마해준 건데 그게 그렇게 기분 나빠?”
“씨발 재수 없으니까 그냥 만지지 말라고!”
내가 소리 지르자, 또 다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 씨발! 진짜, 좆같이 구네.”
도찬호는 인상을 팍 쓰더니, 훈련 도구함을 발로 쾅 차 버리고 씩씩대면서 나가 버렸다.
“한솜아 니가 이해해, 쟤 원래 저런 놈이잖아.”
다른 조원들이 나를 달래줬지만, 나는 깜짝 놀라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에게 소리 지를 때까지는 괜찮았지만, 그가 소리를 꽥 지르면서 훈련 도구함을 쾅 차버리자, 내 의지와는 달리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 들면서 온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으윽....
이게 내가 여자가 된 탓인 건지, 그와 몸싸움을 하면 내가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처절하게 깨달았기 때문인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내 몸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어지는 경험이었다.
하아....하아....
두근거리는 심장은 훈련장을 벗어나서 조원들과 헤어질 때까지도 진정되지 않았다. 화장실에 들어온 뒤 변기 위에 앉아 한참동안이나 심호흡을 한 뒤에야 좀 나아졌다.
이거 빨리 어떻게든 해야겠어...
이대로는 심장이 못 버텨서 심장마비로 죽겠네 좆같은 거.
나는 아는 사람이 없지만 막무가내로 염파 능력과를 찾아갔다. 지난번 무기 개발과에서 그랬던 것처럼 예쁜 여자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건을 들고 가면 누구라도 받아줄 거라는 걸 알게 됐다.
끼익!
나는 노크도 없이 다짜고짜 염파 능력과 과방에 들어갔다. 여기는 여학생 비중이 좀 높아서 그나마 깔끔했다.
그나마 깔끔했다는 거지, 개판이긴 매한가지였지만.
“무슨 일로 오셨어요?”
할 일 없이 빈둥대고 있던 여자 한 명이 웃으면서 나를 맞았다.
나는 뚜벅뚜벅 다가가서 대뜸 단말기를 보여줬다.
“이거 뭔지 알아?”
그녀가 잠깐 인상을 찡그리며 단말기를 쳐다봤다가 금세 흥미롭다는 눈빛을 했다.
“오잉? 그냥 핸드폰이 아니네?”
그녀는 순식간에 일반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뭔지 알겠어?”
나는 굉장히 희망적인 기분이 돼서 그녀에게 질문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가느다란 염파가 느껴져. 혹시 니가 만든 거야?”
“아니, 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그런데 열어볼 수도 없고 부술 수도 없어. 이거 염파 도구 맞아?”
그녀가 손에 염동력을 모으자, 내 손에 있던 단말기가 둥둥 떠서 그녀의 앞으로 이동했다.
와우 이게 고랭크 염파 능력자인가.
단말기는 공중에 뜬 채로 그녀의 앞에서 빙글빙글 돌았고, 그녀가 정신을 집중하며 그걸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듯했다.
“염파 도구는 맞아. 그런데 핸드폰을 만드는 능력자가 있었나? 굳이 왜 핸드폰을 만들지? 능력 아깝게?”
씨발 그냥 핸드폰이 아니니까 그렇지.
나랑 연결이 돼 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식으로 연결 돼 있고 이게 무슨 기능을 하고 있는지까지 깊이 들어가게 되기 때문에 그건 불가능하다.
“없앨 수는 있겠어?”
나는 지난 번 이걸 파괴하려다가 패널티를 받았던 걸 떠올렸다. 괜히 또 제모 당한 보지가 욱신거리는 느낌이다.
그러나 잠자코 그가 하는 걸 다 당해줄 생각은 없다. 나 나름대로 이걸 중간에 멈춰버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뭐, 염파 도구니까 파괴할 방법은 있겠지? 그런데 나는 못하겠네. 잠깐 살펴보니까 방어막이 꽤 강하게 쳐져 있어. 최소한 SS급 염파 능력자는 돼야 풀 수 있겠는데? 도대체 누가 만든 거야?”
단말기가 다시 둥둥 날아와서 내 손에 들어왔다.
“그럼 SS급 염파 능력자가 누가 있어?”
그러자 그녀가 과방에 있는 다른 학생들을 향해 SS급 능력자가 누구 있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생 중에는 SS급 능력자가 없다는 대답밖에 안 돌아왔다.
“그럼 교수님한테 찾아가보지 그래? 심화 염동력 교수님이 아마 SSS급 능력자였을 걸? 충분히 분석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래 고마워.”
나는 과방을 나오면서 씨익 웃었다.
봐라 이 씹새끼야, 니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진짜 프로페셔널한테는 비비지도 못하는 말종 변태새끼일 뿐이지.
나는 경쾌하게 교수 연구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띠링~
아아.....
그러나 도중에 단말기에서 문자 도착음이 들렸고, 나는 가장 가까이 있던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냥 무시하고 달리고 싶었지만, 바로 확인하지 않으면 또 목이 졸렸다.
후우....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번에는 어떤 패널티를 줄지 걱정이 됐지만, 한 번만 참으면 된다.
만약 단말기를 파괴하지 말라는 금지 사항을 만들 거였으면 지난번에 이미 했을 것이다.
이 자식도 아마 만능은 아니고, 뭔가 제약이 있음에 틀림없다.
한 번만, 한 번만 참으면 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화면을 바라봤다.
<훈련 대상자와 훈련 기기의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어?
이해할 수 없는 의미의 문장이 잠깐 뜬 뒤 손에 들려 있던 단말기가 빛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어어?
그러고는 내 눈 앞에 홀로그램 같은 스크린이 나타났다.
마치 증강현실(ar)이 눈에 이식된 거 같은 느낌으로,
그 스크린에는 단말기의 화면과 똑같은 게 떠 있었고, 문자 한 줄이 떠 있었다.
<실망이다 유한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