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77화. 지고지순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는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 이미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있었다.
“으아... 팔다리 후들거려.”
“나도 힘들어 죽겠다.”
“헤헤. 석현아, 자고 갈 거야?”
“그럴까?”
시간도 늦었고,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여기서 자고 가라고 했다.
처음 자취방에 초대한 날, 같이 자기까지 한다니.
좁은 침대지만 함께 누워있으니 서로가 더욱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
“희지야, 더 가까이 와. 이불 덮어.”
“으응. 너 좁을까 봐.”
“됐으니까 빨리.”
몸을 가까이 붙이고 품에 안기다시피 한 자세로 누워있으니 잠이 솔솔 왔다.
둘 다 격렬한 밤을 보낸 탓에 기진맥진해서, 이야기를 얼마 나누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잠들었다.
※
다음 날 아침.
많은 것이 바뀌었다.
화장실에는 칫솔이 하나 더 늘어났다.
내 침대는 이제 석현이의 것이 되기도 했다.
어딘가 불안하던 자취방 분위기가, 석현이가 온 탓에 조화가 맞아 한결 더 안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칼을 꺼내 들었다.
석현이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칼을 들었다.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칼집이 벗겨지고, 예리하게 다듬어진 칼날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석현아⋯”
“네 비밀을⋯ 알아버렸어⋯”
비장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실수하지 않도록 각도를 조절한다.
빗나가지 않도록 한 번에⋯
그 순간 석현이가 눈을 떴다.
“어우, 뻐근해─”
“일어⋯났어⋯?”
“으으으, 잘 잤⋯ 어어⋯ 지금 뭐 하는 거야?”
석현이 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런 모습 본 적 없으니까 놀랄 만도 하지.
두 눈을 크게 뜨고서는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는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으응,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깔끔하게 한 번에 해버릴 테니까.”
너무나도 부드럽고, 물컹하기 때문에 서툰 손놀림으로는 잘 안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실수하지 않도록 한 번에, 세게 내리쳐야만 한다.
칼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간다.
당황한 석현이를 뒤로한 채, 팔을 휘둘러 힘차게 내려치고─
쾅─!
도마를 내리쳤다.
그리고 칼날을 내리치는 순간, 흐물흐물한 두부가 반으로 갈라지며 두 개로 쪼개졌다.
“어우⋯! 누가 칼을 그렇게 써?!”
“해냈다아!”
“기뻐하지 말라니까! 도마에 대고 조심히 썰어야지 그걸 왜 내리쳐?”
“헤헤⋯ 처음 해봐서 그래.”
“어휴, 됐다. 조심 좀 해. 근데 웬 두부야?”
“으응, 찌개 끓여보려구. 이것 좀 봐! 히히, 두 개로 쪼개진 거 보여? 엄청 잘 쪼개졌어. 두부가 두부/두부가 되어버렸어!”
“초딩이냐⋯. 그리고 갑자기 무슨 찌개를 끓여.”
“너 해줄라구 그러지. 아침 먹구 가!”
널 위해서 아침식사를 차리고 있다는 말에, 일순간 놀란 표정을 짓던 석현이가 이내 밝게 웃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올⋯, 아침 차려준다고? 근데 너 칼질하는 거 보니까 영 불안한데⋯ 괜찮은 거 맞지?”
“그러엄! 반으로 갈라진 두부 좀 봐. 너무 깔끔해서 아무런 논란도 없을 정도잖아!”
“두부에 너무 몰입하는 거 아니야?”
“니가 불안하다며! 엄청 맛있게 해줄 테니까 기대해!”
사실 기대 안 했으면 좋겠다.
원래 식사를 차려줄 생각이긴 했는데, 우연히 들은 석현이의 비밀, 그러니까 잠꼬대를 하면서 중얼거렸던⋯ 찌개 먹고 싶다는 말 때문에 요리를 바꿨다.
하지만 유튜X에서 본 20분짜리 속성 동영상을 보고 따라 하고 있어서 자신이 없었다.
한마디로 지금 찌개 끓이는 게 인생 첫 번째 요리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였다.
“자아, 잠시 비켜보세요~ 찌개가 가구 있어요~”
“어, 응. 손 조심해.”
“읏챠⋯ 잠깐만 기다려! 밥 떠올게!”
바닥에 차린 작은 상 앞에 석현이를 앉혀두고서는, 밥솥을 열어 큼지막하게 한 그릇을 떴다.
“이 정도면 돼?”
“음⋯ 조금만 더.”
“엄청 많이 먹는구나, 히히.”
여자가 된 이후로 먹는 양이 줄은 거에 익숙해져서 석현이한테도 밥을 조금 떠줬나 보다.
내 밥그릇이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한가득 푼 밥의 양을 보니 남자랑 여자의 차이가 다 느껴질 정도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밥그릇을 석현이 앞에 먼저 놔주고, 이어서 젓가락과 숟가락을 놓고 물을 한 잔 따라다 주었다.
“오⋯ 서비스 엄청 좋은데? 고마워.”
“응, 여기 밑그릇.”
석현이를 앉혀두고 이것저것 다 챙겨주는 모습이, 누가 보면 새색시가 사모하는 서방님을 챙겨주는 것 같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을 차리고 나까지 자리에 앉으니, 이제서야 찌개를 한 숟갈 뜨고서는 잘 먹겠다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잘 먹을게.”
“많이 먹어!”
“으음─”
“어,어때⋯?”
“음.”
“별로야⋯?”
“오⋯ 맛있는데?”
만세!
엄청 기쁘고 정말 기쁘고⋯!
칭찬은 희지를 춤추게 하기 때문에, 활짝 웃은 채로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다행이다! 맛있게 먹어!”
본격적으로 숟가락을 들고 찌개를 뜨면서 식사를 시작한다.
재료를 준비하지 못해서 있는 걸 활용했는데, 다행히도 가리지 않고 계속 먹어줬다.
“헤헤, 같이 먹으니까 꼭 부부 같다.”
“빨리 먹어. 후우우- 어후, 뜨거워.”
“응, 나 조금밖에 안 먹으니까 너 많이 먹어! 히히.”
“어후, 뜨거워. 후우- 후우- 크으, 야, 두부 진짜 맛있다.”
“두부 너무 많이 먹으면 안되는데⋯”
“후우- 후- 왜 안 되는데?”
“두부 많이 먹으면 정력 떨어진대⋯”
“어 괜찮아. 나 정력 강해.”
“앗, 맞아⋯ 킥킥⋯”
“큭큭, 마저 먹기나 하자.”
맛있다는 칭찬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밥그릇이 순식간에 비었고 찌개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석현이는 미리 떠준 물을 마시고는 잘 먹었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희지야, 진짜 잘 먹었어. 요리 잘하네.”
“처음 하는 거라 걱정했잖아. 다행이야, 정말.”
“진짜 맛있었어. 우리 엄마가 해준 거 같더라. 후, 집 가서 찌게 해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이걸로 풀렸네.”
“앗⋯! 그 정도야⋯?”
“그렇다니까. 혼자 자취하니까 누가 해줄 사람도 없는데 진짜 잘 먹었어.”
“으응, 근데 그⋯ 혹시 홍다희는 이런 거 안 해줬어⋯?”
이렇게나 맛있어하는데, 어디 가서 먹을 데가 없었다며 아쉬워하는 걸 보니 의문이 들었다.
자기가 해 먹는 건 논외로 치고, 홍다희가 여자친구랍시고 옆에 붙어있었을 텐데 한 번도 못 얻어먹었다는 걸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 걔는 아침 안 먹거든. 요리 안 해주더라.”
“으⋯ 너무하다.”
“아냐, 됐어. 내가 해 먹는 게 맞는 거지. 어쨌든 네 덕분에 아침도 얻어먹네.”
“으응, 나라면 매일매일 해줄 텐데. 아무튼 잘 먹었다니 기뻐!”
널 위해서라면 네가 원할 때 아무 때나 식사 차려줄 수 있어.
매일매일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도록 요리 연습 많이 해둘게.
그러니까⋯
“저기, 석현아.”
“응.”
“밥, 매일 차려줄 테니까⋯ 아니다⋯ 너 먹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차려줄 테니까, 편할 때 연락하고 와⋯.”
“에이, 힘들게 뭘 그렇게까지 해.”
“정말로 괜찮으니까, 요리연습 많이 할 테니까 꼭 와줘⋯.”
“음⋯.”
고민하는 표정을 하며 잠시 침묵에 빠진다.
내가 수고로울까봐 고민하는 걸까?
아니다, 생각해보니 날 차단하도록 만든 홍다희 때문에 연락하고 자취방에 찾아오기가 불편한 듯했다.
그렇게 잠깐 생각에 빠져있던 석현이는, 이내 핸드폰을 꺼내서 앱을 몇 번 조작하더니 과감하게 차단을 해제해버렸다.
“음, 그냥 네 연락처 차단돼있던 거 풀어버렸어.”
“정말⋯?”
“응, 봐봐. 여기. 생각해보면 다희 때문에 너랑 연락 못 한다는 게 말도 안 된다 싶네.”
“기뻐, 엄청 기뻐⋯”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없다.
마침내 차단이 풀리고 우리 관계에서 부족했던 부분이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더 당당하게 연락해도 되는 거야?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말 다 보내도 되는 거냐구.
앞으로 자주 톡을 주고받을 생각을 하면서 기뻐하고 있으니, 석현이가 나도 한 번 확인해보라며 톡을 보냈다.
과연 내 핸드폰을 확인하니, 톡의 연락처 목록에 석현이가 다시 나타나 있었다.
[ 석현이♡: 하이 ]
“앗, 왔다.”
“그치?”
“응⋯! 잠깐만!”
언젠가 무료로 받은 이모티콘 중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느낌이 나는 걸 골라서 보내본다.
[ 석현이♡: 하이 ]
[ 나: (사랑해 이모티콘) ]
하트가 마구 쏟아지면서 캐릭터가 빙글빙글 돌고, 마지막에는 사랑해 문구가 나오는 귀여운 이모티콘이었다.
“봤어?”
“응, 잘 왔네.”
“히히.”
서로 바로 옆에 붙어있음에도 톡을 주고받으면서, 잠시 침대 위에 앉아 찰나의 여유를 즐겨본다.
석현이 손에는 내가 타준 믹스커피 한 잔이 들려있었다.
언젠간 필요할 거라며 부모님이 사다 주신 믹스커피를 이렇게 써보게 되다니, 그때는 돈 아깝게 맛도 없는 걸 산다고 싫어했는데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마 다른 여자 친구를 데려오면 타주라는 뜻이었겠지만⋯ 아무튼 잘 쓰게 되어서 잠시 고마움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아침 먹은 게 어느 정도 소화가 되고 노곤함이 풀리자, 석현이는 이만 가봐야겠다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하, 엄청 잘 대접받고 가는 것 같은데?”
“으응, 잠깐만. 여기 먼지 묻었어.”
최대한 깔끔하게 챙겨주고 싶어서 먼지 한 톨도 없도록 신경을 써줬다.
내가 정성스럽게 옷을 다려준 덕분에, 하룻밤 자고 오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깔끔하고 옷 태가 살아있었다.
“됐다아⋯ 엄청 멋있어.”
“음, 고마워. 이제 가볼게.”
“또 올 거지?”
“하하, 자주 보는 사이인데 뭘 그렇게 멀리 가는 사람 취급해? 수업 때 또 보면 되잖아.”
“아무 때나 와도 좋아. 칫솔 그대로 놔둘 테니까. 응⋯?”
“어휴, 알았어. 가능하면 톡 보내줄 테니까.”
“으응, 조심히 가.”
“그래, 간다─”
자취방을 나서는 석현이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다리 사이가 욱신거리는 탓에 멀리 배웅해주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거리낄 것 없이 연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가깝게 이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다시 만날 기회가 찾아왔다.
한층 더 새로워진 모습을 보여줄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