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75화. 잘못된 만남?
반가운 마음에 손인사를 하며 달려가는데,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도 보인다.
홍다희였다.
“희지야, 여기 앉아.”
“어⋯, 응.”
“하⋯.”
홍다희를 마주 보고 석현이와 나란히 앉게 되니, 언짢아하는 게 한눈에 보인다.
저 표독스러운 표정 좀 봐.
누군 반가운 줄 아나?
둘 사이에 싸늘한 기류가 흐르자, 석현이가 가볍게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자자, 인사는 해야지. 응? 다희야, 희지야.”
“⋯안녕하세요.”
“하, 그래. 안녕?”
날 못마땅해한다는 게 느껴진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차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그런데 석현이는 왜 우리 둘을 한데 불러모은 걸까.
데이트인 줄 알고 마냥 신나서 달려왔는데 홍다희를 보게 되니 뭘 해야 할지 불편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건 홍다희도 마찬가지인지 나를 한 번 째려보고는 석현이를 쏘아붙였다.
“얘는 왜 부른 거야?”
“너네 지난번에 싸웠잖아. 희지가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대서.”
“뭐어?” “어, 어⋯?”
황당하다는 반응과 당황하는 내 반응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갑자기 할 말이 있다니, 그런 약속은 한 적이 없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석현이가 테이블 아래로 내 손을 몰래 잡아주며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희지야, 다희한테 하고 싶은 말 있다고 그랬잖아. 지난번에 싸운 것 때문에. 오늘 말하기로 했잖아?”
아⋯ 확실히 홍다희랑 싸운 거에 대해서 내가 먼저 사과하는 게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었다.
그런데 오늘이라니, 석현이는 아마도 둘이 만나기 껄끄러운 걸 우려해서, 깜짝만남을 주선한 뒤 화해를 시키려는 생각인듯했다.
“어, 음⋯”
“하, 참나⋯.”
내가 아무 말을 안 하고 있자 홍다희가 혀를 차며 비웃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석현이가 내 손을 점점 더 강하게 잡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화해를 시키고 싶어 하는지를 전해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분위기가 냉랭해지고 석현이도 난처해질 게 틀림없었다.
그래, 내가 석현이를 사랑하니까 이런 건 얼마든지 맞춰줘야겠지.
“저기, 음⋯ 홍다희 선배님, 죄송합니다⋯.”
“참나.”
선배라고 호칭하고 고개를 깍듯이 숙이며 사과를 하는데도 반응이 시원찮다.
별다른 말을 안 하고 벌레 씹은 표정을 계속하고 있는 걸 보니, 홍다희는 내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어쩌지.
사과하는 사람은 나니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지난번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드릴게요⋯.”
“어이없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석현이의 권유로 사과를 하는 거지만, 계속 고개를 숙이며 말을 하다 보니 정말로 미안한 마음이 아주 약간은 생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홍다희는 얼마나 속이 좁은 건지 여전히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나조차도 이렇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데, 역시나 이런 면에서도 내가 석현이한테 더 어울린다는 증거가 되는 거였다.
속 좁은 년.
홍다희가 가소롭다.
그래, 계속 버팅기고 있어 보던가.
네가 그러거나 말거나 난 계속 사과할 거니까. 그럼 석현이가 보기에 누가 더 못마땅할까?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땐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 다희야. 이렇게까지 사과하는데 네가 받아줘. 응?”
“하, 어이가 없어서. 야, 너! 너 내가 신고 안 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아. 그 짓을 해놓고 사과하면 다야?”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구나. 얼마나 속이 좁은 년인지 알만하다. 나이를 허투루 처먹은 게 틀림없다.
이런 여자는 석현이한테 하나도 도움이 안 될 텐데.
결국 마음이 넓은 내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사과하기로 했다.
“홍다희 선배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좋아했는데 중간에 끼어들고, 새치기하고 석현이 뺏어가셔서 화가 났어요⋯. 죄송합니다.”
“이 미친년이!”
순식간에 내 얼굴에 물벼락이 쏟아진다.
홍다희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물잔을 들고는 나한테 뿌려버린 탓이었다.
“⋯”
“너 진짜 제정신이야? 야, 말 좀 해봐. 이 미친년아!”
얼굴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사이, 홍다희는 계속에서 울분을 내뱉고 있었다.
먼저 사귄 건 자기라고, 뺏긴 뭘 뺏었냐고, 지난번도 그렇고 제정신이 맞긴 하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석현이가 기다려준다고 한 사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가로챈 게 홍다희 본인인데, 도리어 나한테 화를 내며 인격을 모독하고 있다.
대답할 가치도 없고, 석현이 말대로 사과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무 대꾸를 하지 않자 이번에는 석현이가 나서기 시작했다.
“물은 왜 뿌려! 어후, 희지야 괜찮아?”
“어, 응. 하하⋯.”
“닦아줄게. 나 좀 봐봐. 응, 그렇지.”
“고마워.”
“시발, 니네 지금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갑자기 물을 뿌리면 어떡해?”
“야, 강석현! 너 얘가 하는 말 못 들었어?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좀 힘들어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다고 전에 말해줬잖아. 그리고 사과 좀 받아주지, 왜 자꾸 그래? 희지야, 저쪽 닦아줄게. 얼굴 돌려봐.”
“응⋯.”
“와, 참나. 강석현 너 누구 편이야?”
“아 좀 있어 봐, 얘 옷 다 젖었잖아.”
“시발, 어이가 없어서.”
석현이가 상냥하게 닦아주는 거에 질투가 났는지, 홍다희는 씩씩거리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너무 다정한 우리 석현이는, 뛰쳐나간 걸 붙잡겠다며 나한테 양해를 구하고 홍다희를 따라나섰다.
“미안, 여기 티슈 있으니까. 미안─”
“으응, 괜찮아. 어서 가봐.”
속 좁은 년.
사과하는 것도 안 받아주고, 석현이가 다정해서 날 챙겨주는 건데도 그걸 못 견디고.
그에 비해서 우리 석현이는 나도 홍다희도 다 챙겨줄 정도로 마음이 넓다.
저런 년이 왜 석현이 옆에 붙어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정리하고, 옷이 얼추 마를 때까지 자리에 앉아 기다려본다.
홍다희는 나보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 반대이다.
남의 남자한테 꼬리치고, 내 자리를 뺏고, 사과도 안 받아주고, 석현이를 곤란하게 만들고.
그래놓고는 주말에 석현이와의 데이트를 취소해놓고 친구들 만나러 가는 꼬락서니가 참 위선적이다.
누가 누구보고 제정신이 아니란 거야.
“미친년⋯ 걸레년⋯ 더러운년⋯.”
아무리 생각해도 석현이한테 어울리는 여자는 나였다.
※
대충 정리가 되고 나서 카페를 나와 자취방에 돌아가는 길에 반가운 사람을 다시 만났다.
“어, 석현이⋯!”
편의점 앞에서 콜라 캔을 쥐고 핸드폰을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고작 캔을 들고 있는 것인데도 분위기가 살고 너무 멋있다.
석현이를 발견하자마자 마치 자석이 끌리는 것처럼 몸이 먼저 튀어 나갔고, 바로 석현이를 부르면서 달려갔다.
“석현아!”
“어⋯?”
“석현아, 석현아!”
다짜고짜 품을 파고들어 안겨버렸다.
아, 따뜻해⋯.
물에 흠뻑 젖었던 몸이 따스한 기운 덕분에 위로받기 시작한다.
하루에 몇 번을 봐도 질리질 않아서, 반가운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석현아. 히히⋯.”
“어, 아깐 미안해. 걔가 그럴 줄 몰랐네.”
“아냐, 괜찮다구 했잖아.”
그런 거 아무래도 좋다.
석현이 품에 안겨서 얼굴을 부비대는 애교를 부리니까 물기가 남아있는 내 머리를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미안, 다희한테 말해봤는데 화만 내서⋯ 미안해. 많이 놀랐어?”
“으응, 별로 신경 안 써. 헤헤. 근데 왜 여기 있었어?”
“걔랑 말하다가 싸웠거든. 후우⋯, 좀 나와 있다 가려고 서 있었어.”
“싸웠다구⋯?”
고개를 들어서 석현이를 쳐다본다.
내가 얼굴을 비빈 탓인지, 석현이의 옷 한구석에는 립스틱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냥, 오늘 일 말고도 지난번부터 잘 안 맞았던 거나⋯ 데이트 못 하고 그랬던 거 때문에 좀 싸웠어.”
“석현아, 화 많이 났어⋯?”
“응? 아니, 내가 왜 화가 나. 하하, 걱정하지 마.”
“⋯나 속상해.”
“어⋯ 뭐가?”
“난 네가 엄청 소중한데⋯ 자꾸 홍다희때문에 상처받고, 또 나도 도움이 못 되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히이잉⋯.”
입술을 내민 채 울상을 지으면서 석현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정말로 사랑하고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진심이었다.
다행히 내 마음이 전해진 건지, 석현이 표정이 한결 나아지며 마치 감동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후우, 너밖에 없다. 진짜.”
“히잉⋯ 정말루 미안해⋯. 너무 좋아해서 항상 곁에 있고 싶은데, 내가 너무 부족해서⋯ 미안해, 미안해⋯.”
“어이구, 울보 다됐네. 네 마음 안다고 했잖아. 그치?”
“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너랑 사귀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미안해⋯ 흑흑.”
“괜찮다니깐.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응?”
오히려 석현이가 날 위로해주기 시작한다.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면서 어르고 달래는 듯한 말투로 위안을 준다.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나에 대해 고마운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미안해, 그리구 고마워⋯.”
“근데 왜 계속 훌쩍거려.”
“힝,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잖아⋯.”
“에휴, 어떻게 해야 마음이 풀릴까?”
언제나 그렇듯 상냥하게 내 마음을 달래주려고 하고 있다.
석현이와의 데이트인 줄 알았던 아쉬움이 크기에, 남은 시간만이라도 함께하고 싶어졌다.
“부탁 들어줄 거야⋯?”
“어. 말해봐.”
“⋯치킨.”
“응?”
“치킨 사줘.”
“어? 음, 좋아. 기분도 꿀꿀한데 먹으러 가자.”
“아니이. 그거 말구⋯.”
“응? 그럼 뭐?”
“내 방에서 먹구가⋯.”
응, 오늘이 끝날 때까지 나랑 같이 있어 줘. 남은 시간 내 곁에 있어 줘.
그리고 석현이 표정에는 일순간 희미한 웃음이 번지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뭐, 그래. 생각해보니 네 방은 한 번도 못 가봤네.”
“앗, 그러네. 왠지 부끄럽다⋯.”
“우리 사이에 뭐 어때.”
“으응⋯. 히히.”
※
깜빡했다.
석현이와 함께 내 자취방까지 가다가, 문 앞에 와서야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석현이 만날 생각에 급하게 뛰쳐나오느라 방 안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저,저기 석현아⋯?”
“응? 문 앞에서 멈춰선 왜 그래?”
“하하⋯ 잠깐 기다려?”
쾅.
손님을 문밖에 세워두고 급하게 정리를 시작한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속옷들을 쑤셔 넣고, 옷을 꺼내면서 어질러졌던 서랍장을 닫아둔다.
이불보를 다시 정리하고, 앗⋯ 왠지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구석구석 탈취제도 뿌려주었다.
“석현아? 이제 들어와. 하하하⋯”
“그래. 오, 자취방은 어딜 가나 다 비슷하구나.”
“어? 아니, 원래는 잘⋯ 꾸미고 사는데⋯? 오늘 청소⋯하다가? 나왔거든⋯? 아하하⋯?”
“아니, 그런 거 말고. 집 구조가 비슷하다고.”
“어, 어! 나도 그 말이었어. 응응, 다 비슷해! 아하하⋯!”
으, 창피해.
나 혼자 찔려서 방 더럽다는 얘기인 줄 알았잖아.
그런데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게 하나 더 있었다.
방 안에 들어와서 이리저리 둘러보던 석현이가, 한구석에 놓여있는 택배 상자 하나를 발견하고는 거기로 관심을 돌렸다.
“이거 뭐야?”
어어⋯ 지금 보면 안 되는데⋯!
“멈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