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74화. 검사
왜 이러지.
앨범 보면서 딸기를 집어먹으려는데 갑자기 구토감이 몰려왔다.
상한 건 아닌데⋯ 설마⋯?
바로 인터넷에 증상을 찾아봤다.
[ 음식 먹고 속 안좋을때 ]
[ 딸기 구역질 ]
“입⋯덧?”
정상적인 음식을 먹고도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난다면, 임신 증상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설명이 나왔다.
말도 안 돼.
혹시나 싶어서 석현이와 관계했던 기억들을 되짚어 보지만, 문제가 될 만한 상황은 없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피임은 꼭 했고, 내가 기억을 아예 잃었을 때 한 적도 전혀 없었다.
⋯솔직히 기억이 없을 때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지만, 석현이가 그런 짓을 하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그리고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그저께 신입생 환영회를 하다가 둘이서 화장실로 갔을 때가 의심됐다.
둘이 분위기에 취해서 노콘으로 하긴 했었는데⋯
하지만 분명 마무리는 밖에다 했다.
내가 이성을 잃고 다리로 꽉 조이는 걸 석현이가 풀어버리고는 밖에다 싸는 걸 봤으니까 확실하다.
설마 그걸로 문제가 된 거야⋯?
아무래도 이상하다. 고작 며칠 만에 입덧 증상으로 이어질 리가 없잖아.
혼자 생각하는 걸로는 답이 없겠다 싶어서 결국 임테기를 사러 나갔다.
편의점에도 있다던데 아무리 봐도 찾을 수가 없어 문을 연 약국을 찾아야만 했다.
[ 사랑약국 ]
약사 선생님께 임테기를 달라고 말하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 죄를 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하게 된다.
“... 임테기 주세요⋯.”
혹시 몰라서 오천 원짜리를 세 개 샀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석현이라던지 우리 부모님, 고등학교 친구들같이 내가 아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임신한 거면 어쩌지⋯?
난 아직 20살인데⋯?
사랑의 결실을 맺는 건 기쁜 일이지만,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그리고 석현이도 어떻게 반응할지 자신이 없다.
내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나 확신이 없었다니, 스스로가 너무 어설프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설마 아니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임테기를 꺼냈다.
사용방법은 전혀 어렵지 않지만, 막상 임테기를 쓰자니 너무나도 두렵다.
제발, 제발⋯
임테기가 축축하게 젖어 든다.
다 적셔진 걸 확인한 후 시간을 맞춰놓고 결과가 나오길 기다렸다.
정말로 임신한 거면 어쩌지?
부모님한테 혼나겠지?
석현이는 뭐라고 그럴까. 지우자고 그러면 어떡해⋯?
그치만 우리 둘 사이의 아이가 있으면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복잡하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기다리기를 5분.
마침내 알람 소리가 울리며 검사 결과가 나왔음을 알려주었다.
쿵 쿵
심장이 세차게 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나 마찬가지라서 눈을 딱 감고 임테기를 손에 들었다.
“어⋯?”
검사 결과는 의외였다.
한 줄.
처음에는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줄 알고 설명서를 다시 읽었다.
임신은 두 줄, 아니면 한 줄.
내 결과로는 임신이 아니었다.
혹시 불량인가 싶어서 그 뒤로 두 개를 더 써봤는데 결과는 모두 같았다.
임신이 아니라고⋯?
아쉬운 마음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함께 들었지만, 어째서 머리가 아프고 속이 안 좋은 건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혹시 큰 병에 걸리기라도 한 걸까?
갑자기 안 좋은 생각이 몰려든다.
요즘은 20대에도 심하게 아프거나 난치병에 걸리기도 한다는데⋯
아니면 여자로 몸이 바뀌어버려서 내가 모르는 문제라도 생겼을 수도 있다.
일단은 확실한 건 없으니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만 한다.
어느 병원에 갈지 정하기 위해서 내 몸의 증상들을 정리해봤다.
두통. 메스꺼움. 울렁거림. 구토감.
주로 겪는 증상들을 정리해보니 혹시 머리나 배 쪽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증상을 바탕으로 병원의 진료 과목들을 찾아본 결과, 내과에 가보는 게 제일 적합해 보였다.
※
월요일이 되자마자 내과에 다녀왔다.
정말 다행히도 별 이상 소견은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다.
다만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으니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다면 잘 관리할 수 있도록 하라는 조언이 있었다.
하지만 검사 결과가 정상으로 나온 것보다는, 진료를 접수하며 카운터에서 겪은 일이 너무나도 치욕적이었다.
“짜증나⋯”
접수할 때 개인정보를 기입하는 걸 우려해서 일부러 모자와 마스크를 철저하게 썼지만, 가슴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누가 봐도 여자의 몸인 상태로, 카운터에 가서 접수하는데 그게 너무 창피했다.
직원들은 별다른 신경을 안 쓰는 척 내 카드를 전산에 입력하는 듯했지만, 내가 뒤돌아보는 순간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게 들려왔다.
‘뭐야? 주민번호가 왜 이래?’
‘헐, 저 사람 그건가 봐요.’
‘트젠?’
‘가슴도 수술한 거 아니에요?’
‘어쩐지, 너무 크더라.’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하지만 그걸 따져봤자 내가 진짜 여자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소란을 피우다가 사람들의 눈총 속에서 비난을 듣고 말겠지.
너무나도 치욕적이었다.
결국 집에 돌아와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며 내 신세를 한탄할 뿐이었다.
“흑, 흐윽⋯ 꼭 바꿀 거야⋯ 꼭 바꿀 거라구⋯⋯!”
※
석현이와 함께해서 즐거웠던 기분이, 순식간에 속상함으로 뒤덮이기도 한다.
주말과 월요일을 거쳐 자취방에 돌아왔을 때는 꽤나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소외감⋯.
그나마 문 앞에 놓여있던 택배가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우울한 한 주의 시작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한국택배 ]
[ 받는사람 : 박희지 ]
[ 주문자 : 박희준 ]
[ 개인정보 유출 방지를 위해⋯⋯ ]
결제할 때 이름을 바꿀 수가 없어서 송장에 다르게 찍혀버렸다.
칼로 난도질을 해놓으니 마음이 좀 풀린다.
응, 이런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은 내가 참아야겠지.
기다리던 택배가 왔는데 송장 쪼가리 하나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다.
바로 상자를 뜯고 비닐 포장이 되어있는 걸 벗겨내니 새것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으아⋯”
생각보다 엄청 부끄러울지도 모르겠어.
딸랑딸랑 방울소리가 울려퍼진다.
끈에는 귀여운 장식이 달려있다.
그리고 굉장히.. 적극적인 디자인이었다.
좋아해 줄 것 같아서 과감하게 샀는데, 아무래도 좀 더 용기를 내서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 같았다.
택배 상자를 정리하고는 언제가 좋을지 시나리오를 짜고 있는데, 석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희지야, 난데. ]
“아! 응⋯! 왜 전화했어?”
나도 모르게 사랑해!를 외칠 뻔했다.
뭐만 하면 자꾸 사랑한다는 말이 튀어나와 버리는데, 이러다가는 자동응답기 대신에 자동사랑기가 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어서 자제했다.
[ 오늘 시간 돼? ]
“당연하지! 시간 엄청 많아! 지금 당장도 되구, 이따가도 되구⋯ 아, 새벽도 괜찮아! 나 잠 하나도 안 자!”
[ 에이, 잠은 자야지. ]
“나 그건데? 그, 아⋯! 그거! 오분대기조! 하여튼 시간 엄청 많아!”
널 위해서라면 자다가도 뛰쳐나갈 수 있는걸?
너만 바라보는 연중무휴 희지니까 아무 때나 시간 낼 수 있다구!
신이 나서, 시간이 펑펑 남아돌고 아무 때나 다 괜찮다니까 석현이가 픽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 하하─ 하여튼 지금 시간 된다는 거지? 별거는 아니고, 지금 잠깐 만나자고. ]
지금?
미쳤어미쳤어⋯!
이거 일일데이트 신청이지?
엄청 기뻐!
짱 기쁘고 완전 기뻐!
“지금 바로 나갈게!!!!”
[ 어? 아, 그래. 그럼 30분 뒤에 카페에서 만날래? ]
“응! 금방 갈게! 사랑해!”
너무 기뻐서 사랑해 스택을 하나 적립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히히,히히히⋯,히힛♡”
바로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아껴둔 비장의 코디!
배꼽이 드러나는 크롭탑과 핫팬츠를 입고는, 얼굴에 화장품을 펴 바르고 빠르게 고데기를 넣는다.
슬슬 꾸미는 게 손에 익는 건지, 급하게 하는 건데도 얼굴이 빠르게 바뀌어갔다.
거울을 보니 모델이 따로 없다.
누구한테 꿀리기는커녕 압도해버릴 최고의 몸매와 비율이다.
거기에 스타일리시한 코디까지.
오늘 같은 깜짝 데이트 신청에 보답하기에 걸맞은 최고의 여친룩이었다.
어⋯ 근데 어디 카페로 오라 그랬지?
혼자 신나서 말을 끝까지 안 듣고 전화를 끊어버렸더니, 어느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는지를 듣지 못했다.
다행히 석현이는 약속장소를 문자로 보내둔 뒤였다.
[ 학교 앞에 카페민트로 와. ]
“으엑⋯”
문자로 보내주는 친절함은 좋지만, 역시나 민트는 좀 어떨까 싶다.
얘는 다 좋은데 이게 문제야.
민트는 로미오와 줄리엣도 갈라놓을 중대 문제임이 틀림없지만, 오늘은 내가 양보를 해주는 게 맞는 것 같다.
응, 먼저 데이트하자고 말해줬으니까 보답으로 내가 다 맞춰주는 게 맞겠지!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단숨에 약속장소로 달려갈 때까지 고작 30분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해는 안 되지만 나름 인기장소인 학교 앞의 ‘카페민트’.
문을 열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곧바로 석현이를 찾을 수 있었다.
문을 등지고 앉아있는 저 모습만 봐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였다.
“석현아──!!”
“어, 여기.”
내가 반가워하며 크게 이름을 부르자, 뒤를 돌아보고는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을 해줬다.
그런데 석현이가 뒤를 돌아볼 때 생긴 틈으로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보고야 말았다.
“어⋯”
네가 왜 거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