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73화. 애모
화를 내고 집 밖으로 뛰쳐나와 버렸다.
놀이터의 그네에 홀로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마치 드라마 속 여주인공 같아서 더욱 처량하게 느껴진다.
누가 봐도 급하게 나온 듯한 추레한 차림에 울상인 표정.
실연을 당한 사람처럼 생기가 없는 모습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고 간다.
그나마 다행인 거는 차인 게 아니라 부모님과 싸우고 나왔다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분명 분위기가 좋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언성이 높아졌다.
내 잘못인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해주지 않는 부모님 잘못인 것 같기도 하고.
석현이가 그리워진다.
헤어진 지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그 온기가 그립다.
내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마다 석현이가 나타나 어떻게든 도와주고는 했다.
석현이의 말과 행동이 나에게 위안이 되어서 버틸 힘이 되어주고는 했다.
“보고싶다⋯”
발로 땅을 박차며 그네를 움직여본다.
끼익거리는 오래된 그네가 흔들릴 때마다 길게 자라난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저녁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내 처지에 대한 걱정도 조금씩 날아간다.
그래⋯ 고작 이런 일로 너무 다운될 필요는 없잖아.
순식간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바람에 꼭 막다른 길에 몰린 듯 격하게 반응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부모님께 목소리를 높일 일은 아니었다.
분명 자취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앞으로는 어른이 되었으니 주체적으로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니 오늘 일만 하더라도,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떼를 쓰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고작 한 번 꺾였다고 우울해하고 포기하면 안 되는 거잖아.
석현이 옆에 있기 위해서는 내가 여자로 남아있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분을 올바르게 고쳐야만 하고.
⋯다음에 다시 설득해보고 안 되면 나 혼자서라도 방법을 찾아봐야지.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이든 찾아내고야 말겠다.
사랑의 힘은 참 신기하다.
그렇게나 화가 나고 부모님조차도 날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울적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버텨낼 힘이 나기 시작한다.
날 보고 웃어주는 미소, 날 쓰다듬어 주는 자상함, 키스해줄 때 느껴지는 끈적한 사랑, 나를 안아줄 때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
그리고 내가 배시시 웃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면, 피식 웃으면서 자기도 날 사⋯
사⋯
⋯자기도 날 사⋯⋯
으⋯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마도 아까 소리 지르며 화냈더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보다.
요새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복잡한 생각에 빠지면 머리가 자주 아파온다.
이럴 때 석현이가 옆에 있다면 약을 먹은 듯 순식간에 나아질 텐데.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실 한오라기 없이 그와 몸을 겹치고 있으면 모든 생각이 녹아내리면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다리 사이가 젖어온다.
“흐읏⋯”
어쩐지 다리를 가만히 있기 어렵고 뱃속이 따뜻한 걸로 채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들뜬 숨을 내쉴 정도로 몸이 달아올랐지만, 이런 놀이터에서 몸을 만질 정도로 경우가 없지는 않다.
“하으으⋯”
이만 집에 들어갈까. 불을 다 꺼버리고, 이불을 덮고서는 석현이 생각을 하며 손가락을 움직이고 싶다.
베개를 입에 물고는 소리를 꾸욱 참아가며 이 애달픈 마음을 달래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신음을 참으며 꼼지락거리는 몸을 추스르고 있는데, 모르는 남자들이 몰려와서는 말을 걸었다.
“저기요─”
“하으,읏⋯ 힉? 네, 네!?”
“혼자에요?”
머리를 염색하거나 뒤로 넘겨서 멋을 냈는데, 하나같이 불량스럽게 생겨서 위압감이 든다.
세 명이서 날 둘러싸고는 킥킥대는데 놀란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야, 취했나 본데?”
“빨리 꼬셔봐. 큭큭.”
상기돼있는 내 얼굴을 보고 한 말인 것 같았다.
취한 사람을 꼬시려는 건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는 생각이겠지.
생김새도 그렇고 마음가짐이 너무나도 불량했기 때문에 빨리 벗어나고 싶어졌다.
“저희랑 놀러 가죠. 예?”
“저기⋯ 죄송해요.”
“에이, 우리랑 놀러 가면 되는데 뭐가 미안해요.”
“이새끼 말 잘하네, 큭큭.”
무섭다. 그네를 꼬옥 붙잡고 있는 내 손을 억지로 풀면서 잡아끌려고 하고 있다.
날 취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혀 거리낄 것 없이 끌고 가면 된다는 태도였다.
“읏, 싫어요⋯”
“왜 자꾸 튕겨요. 혼자 이러고 있으면 안 심심해요?”
“차인 것 같은데 우리가 위로해 줄 테니까 놀러 갑시다~”
체격 차이가 나는 남자들에 둘러싸이니까 몸이 굳어버렸다.
그넷줄을 잡고 있는 손을 억지로 풀려고 하고, 자꾸만 몸을 터치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다행히도 불량배들의 행패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순찰을 돌고 있던 경비 아저씨가 놀이터 쪽으로 후레쉬를 비췄기 때문이다.
“아, 자꾸 뻐팅기지 말고 놀러 가자니까?”
“싫어요, 싫다구요⋯!”
“고집 존나 쎄네.”
“거기 학생들! 뭐 하는 겁니까!”
“시발, 경비 온다. 그냥 가자.”
“존나 아깝네. 딱 봐도 어리버리했는데.”
“학생, 괜찮아요? 아는 사람들이에요?”
“흐으⋯ 흐⋯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밤에 혼자 나와 있지 말아요. 어서 들어가 봐요.”
“네에⋯, 정말 감사합니다⋯.”
아 석현이 보고 싶다. 이럴 때 옆에 있었으면 지켜줬을 텐데.
※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는 부모님은 이미 저녁식사를 하시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화내서 죄송하다고, 너무 흥분했었다고 일단 사과부터 하니 괜찮으니까 좀 차분히 생각해보자고 날 받아주셨다.
물론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다음에 또 말해보고 안되면 나 혼자라도 해결할 생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간단하게 설거지를 해놓고 나니, 부모님은 내일 아침예배를 하러 교회에 가야겠다며 일찍 주무시러 들어가셨다.
난 교회를 다니지 않기 때문에 일찍 잘 필요가 없다.
지금부터는 온전히 내 시간이기도 하다는 소리였다.
불이 다 꺼지고 냉장고 소리만 나는 조용한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신음을 참으며 혼자 끙끙댄다.
“흐긋..흐윽,흐윽..흣...”
누가 들으면 울고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슬프기는커녕 오히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온몸을 쓰다듬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실 한오라기조차 걸치지 않은 알몸을 양손으로 쓰다듬으며 그리운 손길을 상상한다.
상냥했던 손길을 떠올리면서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는 젖가슴을 세게 꼬집어본다.
“흐으,흐읏⋯하앙,하아앙⋯”
마음껏 교성을 내지를 수 없는 이 방 안이 너무나도 답답하다.
내가 여자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그 공간, 석현이와 몸을 겹치는 그 공간이 그립다. 내가 여자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그 행위가 그립다.
지금이라도 당장 새빨간 벽지와 어두운 조명으로 장식된 모텔 침대에 몸을 던져놓고 하루 종일 안겨버리고 싶다.
혼자서 사랑으로 애달파하며 몸을 위로하다가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다음 날 일어났을 때는 침대보와 베갯잇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어째선지 내 눈가까지도 축축해져 있었다.
※
일요일은 부모님이 교회에 가시는 날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은 예배를 드리겠다며 두 분 모두 일찍 나가셨다.
침대를 정리하고, 미리 차려져 있는 아침을 먹은 뒤에는 두통약을 먹었다.
확실히 요즘 자주 아프기는 하다.
왜 이럴까. 병원에 한 번 가봐야 하는 걸까?
그래도 약을 먹으니 좀 나아지는 느낌이 든다.
침대맡에 머리를 대고는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좀 찾아봤다.
[ 갑자기 머리 아픈 이유 ]
[ 스트레스 관리법 ]
[ 개명하는 방법 ]
[ 주민등록증 ]
[ 성별정정하는 방법 ]
[ 변호사 무료 상담 ]
검색하다보니 정처 없이 이것저것 찾아보게 된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미리 알아보기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개명과 성별정정에 대해 찾아봤는데, 나는 쉽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보였다.
요즘 추세로는 개명은 잘 받아준다고 하니 비용만 준비하면 된단다.
그리고 성별정정은⋯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출생신고할 때 잘못된 거를 바로잡는 거고, 다른 하나는 트랜스젠더들이 서류를 제출해서 인정을 받는 방법이었다.
⋯둘 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내 몸은 완전히 여자의 몸이다.
학기 초에 검사를 받았을 때도, 신체 내부까지도 완전하게 여자 몸이라는 결과가 나왔었다.
신체검사를 다시 받아서 그걸 서류로 제출하고, 행정적인 도움을 구하면 해결될 거라는 희망이 보인다.
아니면 어디선가 수술을 받은 것처럼 서류를 꾸며서 제출해도 되는 거고.
포털 사이트의 블로그를 찾다 보니 자기가 브로커라면서 태국의 얀X 국제 병원을 소개시켜준다는 글을 보고 사정을 알게 되었다.
트랜스젠더들은 브로커를 끼고 태국에 다녀온다는데, 그 허점을 노려볼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난 트랜스젠더가 아니잖아.
그 사람들을 비하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난 진짜 여자이니까 그런 불법적인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된다.
정식 서류를 준비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니, 신분 문제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변호사님의 도움을 받으면 될 거라는 청사진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 비용 부담이나 가족의 허락 같은 것 때문에 부모님께 한 번 정도는 더 말씀드려봐야 하는 거고.
나중에 분위기를 봐서 다시 말하기로 하니 걱정이 좀 덜해진다.
“헤헤⋯”
기분이 빠르게 좋아진다.
빨리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서 당당하게 석현이 곁에 있고 싶다.
베개를 꼬옥 껴안고 행복한 상상을 해봤다.
석현이한테 새로 나온 민증을 자랑하고, 기념으로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그러고 나서 함께 잠자리에 들고⋯
점점 더 가까워져서 홍다희를 밀어내고, 서로에게 서로만이 남게 되어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그 기념으로 멀리 여행을 떠나고⋯
응응, 그러고 나서 석현이한테 프러포즈를 하는 거야.
요즘 시대에는 남자, 여자 구분이 없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만큼 정성스럽게 준비한 프러포즈를 하는 거지!
그리고 거기에 감동한 석현이가, 너 같은 여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라면서 날 받아주고, 뜨거운 키스를 하고, 반지를 교환하고 결혼까지⋯!
어떡해,어떡해─!
너무 행복하잖아♡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하고 결혼까지 골인하는 거, 상상만 해도 가슴속이 따뜻해진다.
“히히⋯”
하객으로는 누굴 부르면 좋을까?
결혼식을 할 때쯤이면 고등학교 친구들한테도 내 사정을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졸업앨범을 펼쳐놓고 사진들을 구경하며 누굴 부를지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엄마가 씻어놓고 간 딸기를 옆에 가져다 놓고 한 장 한 장 넘어가며 추억을 곱씹어본다.
얘는 부르고, 음⋯ 얘도 부를까? 그냥 다 부르는 게 맞겠지?
신부 측 하객으로 부를 생각을 하니 귀에 웃음이 걸린다.
“헤헤헤⋯”
친구들 사진을 구경하면서 딸기를 집어 먹어본다.
색깔이 빨간 것이 꽤나 싱싱해 보여서 맛도 좋아 보인다.
이거 먹어야지.
제일 맛있어 보이는 딸기를 먹으려고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갑자기 구토감이 몰려온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아파져서 딸기를 내려놓았다.
“으, 뭐지?”
환영회 때 술 너무 마신 게 아직까지 여파가 있는 걸까?
대수롭지 않게 다시 딸기를 입에 넣으려고 한 순간, 또다시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꺼워졌다.
“욱⋯”
딸기고 앨범이고 뭐고 다 내팽개쳐 둔 채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욱, 우욱, 우에에에엑────”
헉, 허억⋯ 뭐야⋯?
나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