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66화. 환영회 (1)
신입생 환영회 날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학과 동기나 선배들과 친해질 생각으로 가겠지만, 난 석현이랑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이유로 참석하기로 했다.
기대돼. 빨리 만나고 싶어.
석현이도 온다고 했다. 이왕 가는거 미리 만나자고 그랬고, 그를 기다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지금부터 부지런히 준비해야만 했다.
솨아아─
아끼는 바디 워시로 몸을 씻고, 구석구석 깔끔하게 정리하다보니 화장실 안에 뿌옇게 김이 서릴 정도로 시간이 지나간다.
덥다, 더워─
화장실 문을 연 순간, 좁은 자취방 안으로 후끈한 열기가 퍼졌다. 알몸으로 나오니 바깥 공기가 차갑게 느껴진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혹시라도 밖에서 보일까봐, 창문을 아주 살짝만 열어본다. 으⋯, 여성전용 원룸같은 곳으로 이사라도 가고싶어.
아, 참!
잠시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기초화장품을 발라줘야 한다는 게 생각났다.
아직 습관이 안 돼서 까먹고 있었나 봐. 혹시라도 피부가 상하지 않도록, 기초화장품을 바르고 온갖 미백크림까지 발라준다.
머리에 에센스를 뿌리고, 정성스럽게 말려주고, 고데기를 조심조심 말아가며 펌을 살려주고⋯
머리하는 데만 벌써 1시간이나 써버렸지만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찰랑거리는 것 좀 봐.
공을 들인 머리를 확인하려고 거울을 보는데, 머리카락 아래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웨이브가 마음에 든다. 진한 카키브라운 색이 감돌아서 더 세련돼 보인다.
머리를 말린 뒤에는 얼굴을 꾸밀 차례였다. 화장을 안 해도 되는 얼굴이었지만 욕심이 나기 때문에 아주 살짝만 하기로 했다.
염색한 머리와 얼굴이 따로 놀지 않도록 파운데이션을 옅게 발라준다.
그리고 나선 갈색의 섀딩으로 턱밑과 콧대의 음영을 살짝 강조해 입체감을 키워준다.
이 정도면 됐겠지?
뭐든 너무 과하게 칠하면 우스꽝스럽게 보일게 분명해.
얼굴에 연한 홍조를 내도록 볼 안쪽에서 바깥을 향해 연분홍색 블러셔를 칠해준 뒤에는, 둥그런 솜처럼 생긴 퍼프로 얼굴 전체를 가볍게 문질러준다.
컨실러는 안 해도 되겠네.
화장을 간단히 했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게임 캐릭터에서 따왔기 때문인지, 한 점 티 없는 인형같아 보였다.
얼굴 쪽을 마무리하며 거울을 보니 연한 녹색의 눈동자가 나를 마주했다. 마치 렌즈를 낀 것처럼 시선을 잡아당기는 깊은 눈동자이다.
물론 눈 화장에도 그다지 공을 들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과하지 않은 쌍꺼풀과 짙은 속눈썹 덕분에, 눈가에 아이섀도를 살짝 발라주고 아이라인을 얕게 그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또 입술마저도 앙증맞은 것이 어느 누구와 비교돼도 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입술에 틴트가 잘 발라지도록 드라이기로 바짝 말려준 뒤에, 선홍색 틴트를 발라주는 것으로 화장을 마무리했다.
기분이 좋아진다.
그토록 괴로워하며 게임마냥 커스텀했던 내 얼굴이, 이제는 정말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앗, 화장한 걸 구경하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슬슬 옷을 골라야겠지.
마침 백화점에서 옷을 여러 벌 사왔기 때문에 입을 만한 게 많았다.
뭐 입을까?
침대에 이것저것 펼쳐두고는 뭘 입어야 석현이가 칭찬해줄 지를 고민한다.
배꼽이 드러나는 크롭탑을 손에 들고 몸에 가져다 대봤다가, 왠지 환영회가 열리는 저녁 시간대에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관뒀다.
그럼 이거 말고 블라우스 입을까?
어깨가 드러나는 오프숄더 블라우스가 나쁘지 않아 보인다. 여기에 힐 신으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니야, 다른 거⋯.
고민이 된다. 블라우스도 마음에 들지만, 옆에 있는 네이비 색 원피스도 엄엄청 끌려서 고르기가 어렵다.
민소매 원피스⋯ 석현이가 예쁘다고 해줬었는데. 나 역시도 이 옷이 제일 마음에 든다.
한 번만 더 입을까?
새로운 옷을 잔뜩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제일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싶은 마음도 강하다.
결국 모든 옷을 한 번씩 다 입어본 후에야, 네이비 색 민소매 원피스를 다시 한 번 입기로 결정했다.
저녁 시간이 되면 쌀쌀해지니까 그 위에 가디건도 걸치는 게 나아보였다.
좋았어-!
코디가 제법 마음에 든다. 핸드폰의 카메라 앱을 켜고 오늘의 착장샷을 찍어본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집 밖에 나서며, 담벼락 앞에서 셀카를 한 번 더 찍었다.
흐흥- 콧노래가 나온다.
요새 셀카 찍는게 많이 늘은 것 같아. 석현이 만나면 사진 보여줘야지.
석현이와 미리 약속한 장소에 가니 약속시간이 딱 맞았다. ⋯사실은 늦을까봐 조금 빨리 걸었다.
우리의 약속 장소는 언제나 그렇듯 학교 안의 조그마한 광장이었다.
잔디가 깔려있고, 어린 나무가 몇 개 심어져 있고, 한쪽으로는 큰 거울과 작은 분수대가 있는 곳이었다.
“석현아─!”
“응, 왔어?”
“후아─ 많이 기다렸어?”
“아니. 방금 왔지. 왜 이렇게 헉헉대?”
“으으⋯ 조금 빨리 걸었더니 힘드네. 흐아아-”
숨을 고르니라 헥헥대는데, 석현이가 날 보는 표정이 꼭 강아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왜에-”
“귀엽다고.”
“으⋯ 갑자기 그러지 마.”
만나자마자 하는 대화가 이런 거라니. 심장에 무리를 주는 반칙 행위잖아.
자꾸 반칙을 해대는데 나한텐 옐로 카드가 없었다.
“오늘도 예쁘네. 나 좀 잠깐 볼래?”
“으응? 응.”
“음- 화장도 잘 어울려.”
“앗, 고마워⋯. 안 이상하지?”
“그러엄. 이상하면 이상하다고 말했지.”
“다행이다⋯. 이상하게 될까봐 나름 신경썼거든.”
“잘 됐다니깐. 기특해.”
예쁘다고 해주고, 화장 잘 됐다고 해주고, 기특하다고 해주고⋯ 반칙 카드 부족해질려고 하잖아. 마음이 간지러워.
괜히 부끄러워서 어쩔줄 몰라하며 옆머리를 넘겨본다. 땅바닥을 톡톡 차보기도 하고.
석현이는 그런 나를 보고는 가볍게 웃으며 이제 출발할 시간이 다 됐다고 알려주었다.
“슬슬 가야겠는데? 지금 포차로 가면 딱 맞을 것 같아.”
“어딘지 알아? 난 안 가봐서 잘 모르겠어.”
“별로 안 멀어. 조금만 가면 되니까 출발하자. 참가비 가져왔지?”
“응, 지갑에 있어. 여기 에코백에 넣어뒀어.”
핸드백 대신에 들고온 에코백이지만, 네이비색 원피스와 어울려서 오히려 더 여학생다운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근데 석현아, 혹시 오늘 홍다희...도 오는 거야?”
“어? 아니. 고학년이라 눈치 보인대서 안 간다네. 오늘은 친구는 아니고 스터티 간다더라.”
“으응. 그렇구나.”
스터디⋯. 왠지 예상이 간다. 석현이도 별 말은 안하지만 아마 불안감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였으면 학년 상관 없이 무조건 석현이를 따라왔을 텐데. 홍다희는 철저하게 석현이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하다.
그래놓고선 자기 아쉬울 때 여자친구임을 내세워서 석현이와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거지.
저런 여자한테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 한다니⋯ 석현이 부탁만 아니었어도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석현이 부탁으로 기회가 되면 먼저 사과를 하기로 했지만, 어쨌든 오늘 당장은 안 봐도 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그 마음만큼이나 내 발걸음도 가벼웠다.
더 먼 곳에서 환영회가 열리는 거였다면 계속 함께 걸을 수 있어 좋았을텐데.
약속 장소인 포차까지 걸어가는 동안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석현이가 계속해서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었다.
백화점에 가서 쇼핑했던 얘기, 집에서 혼자 동영상을 보면서 화장 연습을 했다는 얘기, 힐을 신고 균형잡기를 하다가 발을 삘 뻔 했다는 얘기⋯
그런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신입생 환영회가 열리는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포차는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입구에서 모르는 선배가 참가비를 걷으며 출입 명부를 작성했다.
석현이랑 같이 앉아야지.
옆에 앉아서 장난 치고, 술도 얻어마시고, 재밌는 얘기 많이 해야지.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포차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내 계획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별 생각 안하고 있었는데, 신입생 환영회를 할 때 조별로 테이블을 정해놓고 앉는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 경제학과는 사람이 많은 대형 과이기 때문에 포차 전체를 빌렸고, 그 포차 안에는 테이블이 굉장히 많았고⋯
결국 석현이와 나는 다른 조로 나뉘었기 때문에 같이 앉을 수가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석현이를 쳐다봤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같은 조에 속한 신입생들을 기다리며 먼저 앉아있는 선배들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에 결국 석현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석현아⋯”
“괜찮아. 재밌게 놀고. 응? 너 술 약하니까 그냥 마시지 말고. 알았지?”
“응⋯”
얼굴이라도 보이는 곳이었다면 좋았을텐데.
안내를 받아 내 자리에 앉았을 때는, 석현이와 멀리 떨어지게 되어 얼굴조차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안돼⋯!
※
나는 고등학생 때도 그랬지만, 낯을 가리는 편이다.
그래서 대학교 올라오고 개강 하기 전 날, 새로운 시작을 다짐했던 거고.
이후로 석현이를 알게 되고 내 마음을 모두 주었기 때문에 결국 낯을 가리는 성격에서 바뀐 게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조별로 나뉜 테이블에 앉은 지금, 모르는 선배들과 동기들 앞에서 나는 마치 한 명의 벙어리가 되어있었다.
먼저 말해야 하나⋯? 혹시 나댄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선배 3명과 나를 포함한 신입생 5명의 구성인데 서로 눈치만 봤다.
나만 걱정하고 있는게 아닌지, 서로 얘기하는 선배들을 뺀 우리 신입생들은 대화에 제대로 끼지 못하고 있었다.
신입생들의 침묵이 깨진 건, 마지막 빈 자리가 채워지고 나서 한 여자 선배가 본격적으로 분위기를 전환한 덕분이었다.
“자, 후배님들. 저희 5조, 다 모였으니까 통성명부터 할까요? 자기소개 돌아가면서 하죠.”
“넵.” “네⋯!” “네.”
선배의 말에는 적극적으로 대답하려는 건지, 너도 나도 알았다는 대답이 나온다.
“일단 저부터 할게요. 20학번 윤희정이구요, 새터주랑 조장을 맡고 있습니다. 2학기에라도 놀러가게 되면 제가 따라갈 거에요.”
박수- 짝짝짝─
“20학번 김현성입니다. 학교 생활 하면서 궁금한 거 저한테 물어보세요.”
“얘 학회도 해요. 후배님들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보세요.”
짝짝짝─
“20학번 방나래입니다! 혹시 여기서 노래 좋아하시는 분? 손!”
“저요-”
“잘 불러요? 아니다, 못 불러도 상관 없어요~ 아무 때나 되니까 저희 동아리 지원해보세요─”
짝짝짝─
으아⋯
선배님들이 먼저 자기소개를 하긴 했는데, 이름을 못 외울 것 같다.
긴장돼서 다들 뭐라 말한지도 기억이 안난다.
그리고 선배들 차례가 다 끝난 후, 우리 신입생들이 자기소개할 차례가 됐다.
“저희 조에서 자기소개 하고 나서, 좀 있다 FM이란 것도 할 거거든요. 일단은 부담 같지 말고 저희끼리 먼저 친해져야 해요. 그럼 이쪽 계신 후배님부터 다시 시작할까요?”
“아, 넵. 안녕하십니까. 저는 21학번 황준형이고, 스포츠에 관심이─”
─박수, 짝짝짝.
“황준형 후배님 반가워요. 아 참, 학번 말할 때 이십일 학번이 아니라 이일 학번이라고 하시는 거에요.”
“넵.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분도 자기소개 해주세요.”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21학번 이준영이라고 합니다. 사는 곳은 경기도 안양이고, 지금은 서울에서─”
─짝짝짝.
⋯으아 어떡하지!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뭐 말해야 하는건지 잘 떠오르질 않는다.
이름, 학번, 사는 곳 말하고⋯ 아, 안녕하세요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좋아하는 거 말하면 되나? 나 뭐 좋아하지!?
뭘 해야할 지 머릿속으로 계속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 이럴 때 안좋다.
이상하게 말할까봐 걱정되고, 혹시 반응이 안좋을까봐 소심해진다.
너무 튀지도, 너무 짧지도 않게 무난한 거⋯
머릿속에서 미리 대사를 준비하다보니 어느새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왠지 아까 전부터 선배도 그렇고, 다른 동기들도 그렇고⋯ 특히 남자들이 날 계속 흘겨보는 것 같아서 긴장된다.
싫어하거나 눈총을 주는 게 아니라, 무언가 기대를 하고 있는 듯한 표정들이라서 더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대사를 연습하기를 여러 차례, 마침내 내가 자기소개할 차례가 되었다.
“안, 안녕하세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