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65화. 이정표
“희지야, 부탁 하나만 더 들어줄래?”
“응⋯ 말해줘.”
“너도 다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아까 그랬잖아? 네가 잘못한 것 같기도 하다고.”
“으응⋯.”
“그럼 다희한테 먼저 사과하는 게 어때? 그래 줄 수 있어?”
“응..?”
뭐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잠깐 딴생각 해버렸나 봐. 갑자기 사과하라는데, 중간에 내가 놓친 말이 있는 게 틀림없다.
“석현아, 미안한데 다시 말해줄래?”
“너랑 다희랑 화해했으면 좋을 거 같아서. 먼저 사과해줄 수 있겠어?”
사과.. 하라는 거야? 홍다희한테? 내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
“미안해.. 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걸. 갑자기 사과라니..?”
“다희랑 너랑 싸운 거, 빨리 푸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그래도 학교 선후배 사이인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선후배 사이⋯ 듣기 싫은 말이다. 졸업도 못 하고 있는 사람한테 선배 대접 해주기도 싫고, 무엇보다도 석현이가 다희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게 듣기 괴롭다.
“어떻게⋯ 나랑 홍다희랑 싸웠는데, 어떻게 금방 화해를 해⋯? 그것도 내가 먼저 사과를 하라구⋯?”
먼저 사과하는 거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꼭 내가 잘못해서 고개 숙이는 것 같고, 석현이와의 관계에서 내가 홍다희에게 밀리게 되는 것 같아서 싫다.
“하기 싫어⋯”
“희지야, 나 봐 봐.”
“으응.”
눈 마주치는 거 치사해. 이런 거 반칙이야. 내 얼굴 빤히 바라보면서 설득하는데 자꾸 마음이 약해진다.
“희지야. 널 많이 챙겨주고 싶지만, 난 아직 헤어지지 않았잖아. 착하지, 응? 먼저 사과하자.”
“싫어, 싫어어⋯”
“부탁할게. 응? 나 보고. 착하지?”
사과하기 싫어⋯ 그런데 달래주는 목소리 너무 좋아. 눈 마주치고 물어보는 거, 이런 거 너무 치사해⋯.
“미워. 진짜 미워⋯.”
“나 미워해? 정말로? 다시 나 보고. 응?”
“⋯좋아해.”
미워할 리가 없잖아. 엄청 좋아하는 걸. 네가 말하는 거 다 잘 따르고 싶고,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맞춰주고 싶단 말이야. 완전 좋아한다구.
“응, 나도 너 많이 아끼니까. 그러니까, 더 심해지기 전에 얼른 화해하자. 네 생각해서 이러는 거니까. 응?”
“화해⋯ 먼저 사과해야 하는 거야⋯?”
“아까 네가 먼저 잘못한 거 같다고 말해줘서 기뻤어. 너 착한 거 내가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먼저 사과하자. 무슨 말인지 알지?”
으응⋯ 널 위해서라면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다 될 수 있어. 네가 착하다고 해줬으니까 말 더 잘 듣고 싶어.
“어쨌든 선배인데 너무 앙금 쌓이면 안 좋잖아. 응? 앞으로 너랑 다희랑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은 차근차근 해결하자.”
“⋯그럼 나는?”
“너? 아⋯. 그런 걸 왜 걱정해? 네가 먼저 사과해도, 난 네 마음 다 아니까. 많이 아낀다고 했잖아.”
“응⋯ 그 말 들으니까 안심돼⋯.”
석현이 말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홍다희와 나를 마냥 화해시키고 일을 무마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나를 생각해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분명 날 우선으로 생각해주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나를 이렇게나 아껴주고, 내 앞일을 생각해준다는 게 느껴져서 못된 고집이 풀려간다. 사과하기 싫다고 어리광을 부렸던 게 미안해진다.
“그래. 착하지. 희지야, 내 마음 알지? 그러니까 먼저 사과할까? 응?”
“응⋯ 네 말대로 할게.”
석현이가 날 생각해서 사과하라고 그러는 거니까⋯ 말 잘 들어야겠지. 석현이를 더 곤란하게 만들어서도 안 되니까.
“나랑 다희 사이의 문제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해결해볼 테니까. 기다려줄 수 있지?”
“응⋯.”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는 거지? 그 정도라면 괜찮아. 여태껏 기다렸으니까 조금 더 기다리는 거 정도는⋯.
“우리 희지 착하네. 나 다시 볼까? 여기 봐.”
“으응.”
“어휴- 왜 또 울려고 그래. 네 마음 다 안다니까. 울지 말고. 응, 착하지.”
안 울어⋯.
그런데 눈가 닦아주는 거 때문에 설레잖아. 상냥하게 머리 쓰다듬어주는 거,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린다.
결국 그 후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모른 채로 시간이 지나갔다.
석현이한테 착하다고 칭찬받았다.
석현이가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화해하라고 그랬다.
난 착하니까 먼저 사과해야만 한다.
석현이 말을 잘 들어야만 한다⋯.
집에 돌아와서도 석현이의 말을 잊을 수 없었다.
날 생각해서 해준 말이니까 절대 까먹지 않을 거야.
석현이가 말한 거를 잘 지키면 역시 착하다고, 기특하다고 또 칭찬받을 수 있을 거야.
칭찬받으면서 품에 안기는 상상을 하니 행복해진다.
침대에 누워있는데 자꾸만 발로 팡팡 차버리게 된다.
칭찬 받고 싶어.
더 많이 받고 싶어.
칭찬 더 받을 수 있도록, 더 많이 말해줬으면 좋겠어.
날 위해서 해주는 말들⋯ 더 많이 말해줬으면 좋겠어.
뭘 해야 할지, 뭘 하지 말아야 할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좀 더 말해줬으면 좋겠어.
그래서 더 많이 칭찬해줬으면 좋겠어.
“윽⋯.”
또 머리가 아프다.
왜 이렇게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까.
석현이한테 칭찬받는 기분 좋은 생각 하고 있는데 왜 머리가 아픈 걸까.
지끈—
두통이 심해진다.
이럴 때 석현이가 옆에 있어 주면 하나도 아프지 않을 텐데.
석현이가 그리워진다. 같이 있었던 시간이 생각나고 추억하게 된다.
머리 아프지만, 기분 좋은 생각 하면서 이겨내 보려고 노력한다.
응, 석현이를 생각하면 좀 나아질 거야.
다정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생각난다. 내 이름을 말할 때마다, 마음속 한가운데에 ‘희지’라는 소중한 글자가 진하게 새겨지는 것만 같다.
지끈—
그날 밤 침대 위에서, 날 내려다보면서 다른 남자랑 엮이지 말라고 했던 게 생각난다.
다른 남자 앞에서 춤추지도, 노래하지도 말라고 했다. 술도 같이 마시지 말라고 그랬다.
또 자기 없이는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고, 절대 다른 남자 만나지 말라고도 했다.
아⋯ 이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하, 자기 허락 없이는 다른 사람을 아예 만나지 말라고 했었다. 말도 하지 말고 밖에 돌아다니지도 말라고.
아닌가⋯ 맞는 거 같은데.
지끈—
어쨌든. 석현이가 나한테 말했던 내용들을 떠올리니까 실시간으로 행복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으으⋯”
왜 이렇게 자꾸 아픈 거지. 행복한데 아파. 속도 울렁거리고.
좀 메스꺼워져서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꾸욱 눌러본다.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꽉 눌렀다가, 팍 쳐보기도 하고⋯.
아.
생각났어.
왜 이렇게 아픈 건지 알 것 같다.
분명 내 신분 문제 때문에 그런 게 틀림없다.
석현이 옆에 당당하게 있으려면 해결돼야 할 문제가 좀 있다.
석현이가 나한테 다른 남자들이랑 엮이지 말라고 말했던 날, 그러니까 군대 가는 친구들 본다고 술자리 가졌던 그 날⋯.
그때 신분증도 그렇고 군대 문제도 그렇고⋯ 좀 골치 아팠던 걸 여태껏 애써 미뤄두고 있었다.
보통 1학년 때 신검을 받는다는데⋯
남자들은 보통 20살이 되면 신체검사를 받으라고 병무청에서 알려준다고 한다.
나한테는 아직 그런 게 안 왔는데, 보통 생일이 되기 몇 개월 전에 알림을 보내주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자기 날짜에 맞춰서 신검을 받으러 가면 인적사항을 조사하고, 신체검사를 진행하고, 몇 급으로 군대에 가게 되는지 알려주고⋯.
하지만 난 여자니까 그런 거 의미 없잖아. 남자 아니니까. 응⋯ 난 여자야.
그러니까 신검... 지금 상태로라면 받지 않아야 하는 거니까, 일단은 성별부터 ‘올바르게’ 고쳐야 하고⋯.
이름도 석현이가 지어준 소중한 이름으로 올바르게 고쳐야 한다. 희지라는 이름이야말로 내 진짜 이름이다.
물론 신분증도 다시 발급받아서, 이름이나 사진, 주민번호 같은 거를 올바르게 고쳐두어야만 하니 챙길 게 많다.
부모님께 말씀드려야겠어.
부모님이라면 분명 이번에도 알았다며, 내 뜻대로 하라고 말씀하실 게 틀림없다.
처음에 내가 변해버렸을 때도, 날 믿어주시면서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위로해주셨으니까.
아직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름을 내 ‘진짜’ 이름으로 바꾸고 싶다고 말하고, 신분증도 다시 만들고 싶다고 얘기하면 분명 방법을 찾아주시겠지.
행복하다.
앞길이 꽃길인 것 같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석현이와, 날 도와주실 부모님이 내 인생을 함께하고 있다. 소중한 사람들이 내 편이라서 다행이다.
신입생 환영회가 금요일이니까 주말에 부모님께 다녀오면 되겠지?
석현이랑 재밌게 놀고 나서 다음 날 집에 다녀오면 시간이 딱 맞다.
전화로 얘기해도 알았으니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씀해주실 게 틀림없지만, 아무래도 부탁하는 건데 예의상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고민이 해결되니까 좀 홀가분해지네.
고작 이런 것 때문에 머리가 아팠던 걸까? 요새 자주 아픈 것 같은데, 너무 사소한 걱정이 많았나 보다.
최근에 두통이 자주 오는데 아무래도 자기관리에 소홀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산책이라도 하면서 머리를 좀 식히고, 편의점에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따뜻한 차를 사다 마셨다.
왠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차분한 노래를 듣고, 좋은 글귀 같은 걸 찾아서 읽고⋯.
그런 식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데 남은 시간을 쏟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훅 가 있었고, 그걸로 하루를 마무리해야 했다.
그리고 날이 바뀌어, 신입생 환영회를 하기로 한 금요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