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64화. 약속
“석현아!”
[ 하아, 희지야. ]
어..?
목소리가 많이 어둡다. 왜 이러지..?
“무슨.. 일이야?”
[ 아까 있었던 일 때문에. 지금 통화할 수 있지? ]
아⋯ 아까 홍다희랑 싸웠던 거 때문에 전화했나 봐.
난 딱히 할 말 없는데. 아무래도 홍다희 때문에 석현이가 전화한 것 같았다.
[ 아까 왜 그렇게 된 거냐고 다희한테 물어봤거든. ]
“응.”
[ 후⋯, 너네 싸우고 있었던 거냐고 좀 물어보려는데⋯ 계속 신고한다고 해서 겨우 말리고⋯ 계속 미친년이라고, 너보고 미친년이라고, 자꾸 이상한 소리 한다면서— ]
“음.. 나 미친년 아닌데. 아하하⋯”
[ 알아, 알아. 내가 그랬다는 게 아니고. 하여튼 왜 그랬냐고 물어보는데 자기보고 바람피운다면서 욕을 했다는 거야. ]
“⋯홍다희 바람 피운 거 맞잖아. 너 놔두고 다른 사람 만나러 놀러 갔다며.”
[ 하여튼 네 얘기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한다고⋯ 이상하다고 자꾸 그러길래, 내가 지난번에 남자들 만나러 간 거는 맞지 않냐고 말했거든. ]
[ 그랬더니 도리어 화를 내면서 의심하는 거냐고 물어보는데, 하⋯ 아무래도 다른 남자들 만났던 거 맞는 것 같거든? ]
“어- 내 생각도 그런 것 같아.”
[ 그니까, 어쨌든- 얘기가 그걸로 흘러가서, 친구들 누구 만나고 왔던 거냐고 물어보니까 대답을 안 해주는 거야⋯ 근데 사실은 내가 다희 SNS에 태그된 사진을 봤거든. ]
아⋯ SNS 하면 사진에 사람별로 이름 달 수 있었지.
[ 후— 남자들 사이에서 사진 찍는 게 말이 되냐. 아무리 친구들이라지만 거기 껴서 술 마시고⋯ 하여튼, 그 얘기 하니까 말싸움이 되어버려서⋯ 결국 좀 전에 어떻게 된 일인지는 하나도 못 들었네. ]
“어..? 으응.”
[ 아까 왜 그러고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네가 먼저 그런 거야..? ⋯혹시 다희가 너 때리고, 심한 말 했어? ]
아⋯ 너무 착해. 자기 여자친구랑 말싸움한 와중에도 날 걱정해주는구나. 이렇게 다정한 사람을 두고, 홍다희랑 싸우는 바람에 석현이를 걱정하게 했다.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조금씩 고이기 시작한다.
“으응⋯ 아냐, 아냐. 내 잘못인걸⋯.”
[ 그러지 말고, 응? 무슨 일이었는데. 말해봐. ]
“아니야... 흑, 아무것도 아니야. 내 잘못이야.”
[ 왜 그랬는지 말해야 알지. 응? ]
“흑⋯ 아니야⋯ 흑흑, 흑⋯”
[ 뭐야, 너 울어? 왜 울어. 응? 울지 말고. ]
“미안해⋯ 흑흑, 좋아해서 미안해⋯ 너 엄청 좋아하는데, 흑⋯. 홍다희가 너랑 사귀는데, 그래놓고.. 흐윽⋯”
[ 어어- 울지마. 울지마, 응? ]
“너랑 사귄다면서, 바람피우는 거 싫어서⋯ 너랑 사귀면서 그러지 말라고 말하려고 한건데⋯ 흑흑⋯ 미안해 정말⋯”
[ 희지야, 희지야—, 일단 진정해. 울지 말고. 응? 좀 진정되면 다시 얘기하자. 울지 마. 다음 수업 때 만나서 얘기하자. 응? 알았지? ]
“응, 흑⋯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 그래, 진정 좀 하고. 다희한테는 잘 말해놓을 테니까. 수업 때 또 보면 되잖아. ]
“응, 알았어⋯.”
[ 그래, 울지 말고. 또 연락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또 보자. 끊는다- ]
“...”
홍다희 존나 짜증 나.
※
제때 졸업 못 했으면 공부나 하지 뭐하러 석현이 옆에 붙어 있는 걸까.
우리랑 나이 차이도 나면서 굳이 석현이랑 사귀려는 홍다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으로 며칠을 보내고⋯
못마땅한 마음에 샤프를 튕기면서 공책에 줄을 주욱 긋고 있는데, 학생회에서 문자가 왔다.
[ 경제학과 학생회입니다! ]
⋯학생회?
신종 바이러스 때문에 개강 직후 학교에 가질 않아서 엮일 일이 없었는데. 이런 게 있다고는 들었지만 막상 나한테 문자가 오는 건 처음이었다.
[ 조금 늦었지만 신입생 환영회를 열려고 합니다! ]
[ 신입생 여러분들! 새내기 생활을 즐기고 싶은데 분위기가 안 나서 아쉬우시죠? ]
[ 그래서! 저희 학생회에서 신입생 여러분을 위한 환영회를 준비했습니다! 소정의 참가비만 내시면 누구나 환영! 시간과 장소는— ]
5월달에 신입생 환영회라니. 학교에서 대면수업을 하는 것도 그렇고, 신종 바이러스가 잠잠해지니까 학생회도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이번 신입생들은 새내기 분위기를 못 내서 아쉽다는 여론이 많아서, 지금이라도 환영회를 여는 것에 대해 호응이 좋았다.
확실히 이번 새내기들은 입학식이나 학교 오리엔테이션, 엠티, 개강 파티 등 매년 하던 걸 못 해봐서 소외당하는 학번이라는 얘기가 많기는 했다.
그러니까 다들 좋아하는 거겠지.
이번에 신입생 환영회를 하게 되면, 저녁 시간이 조금 넘어서 포차에서 술을 마시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질 기회가 될 거라고 한다.
같은 학과끼리 모여서 서로 인사하고 말을 트기에 좋다는데, 나는 그냥 석현이랑 같이 있는 시간이 또 생기는 게 좋기만 했다.
그리고— 다행히 석현이도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할 생각이 있어 보였다.
“석현아. 신입생 환영회 하는 거, 너도 갈 거야?”
“음, 가야지. 너도 갈 거지?”
“응, 너 가면 나도 갈래.”
다행이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쩔 거냐고 물어봤는데 학과 사람들 알게 되면 재밌을 거 같다며 당연히 가겠단다.
“그럼 나도 좋지. 안 뻘쭘하고. 환영회 할 때 만나서 같이 갈까?”
“응...! 아, 그런데⋯ 홍다희는⋯?”
“아— 선배학번이라 못 올 거 같은데. 너무 고학번이잖아.”
“그래?”
잘됐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참고 있는데, 석현이가 눈치를 보더니 잠깐 따로 얘기하자고 그랬다.
“근데 지난번에 일 말이야⋯.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할래?”
“어..?”
“여기선 좀 그래서. 나가자.”
무슨 얘기 하려 그러지. 나랑 홍다희가 싸운 거, 그거 때문에 혹시 화낸다던가 날 혼내려는 거일까 봐 걱정된다.
별로 내키진 않지만 나가자는 석현이 말에 건물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아서 석현이가 말을 꺼내길 기다려야 했다.
“음⋯ 너네 싸운 거 있잖아.”
“..혹시 그거 때문에 홍다희가 뭐라 그랬어?”
“아니, 화내긴 했는데 내가 달랬거든. 근데 너는 내가 따로 챙겨주지도 못해서 좀 신경 쓰여가지고. ⋯괜찮아졌어?”
으응.. 지금은 괜찮아. 그날 집에 돌아갔는데 열이 받길래 물건도 몇 개 집어 던지긴 했지만⋯
괜히 석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웃으면서 괜찮다는 말이 나온다.
“난 괜찮은걸. 그런데 사실⋯ 그날은 내가 잘못했던 것 같아.”
“네가?”
“너도 알다시피⋯ 내가 너 엄청 좋아하잖아. 그래서 그냥 너한테만 초점이 맞춰져서⋯ 홍다희가 너 놔두고 다른 친구들 만나러 다니고, 너한테 상처 주는 것 같고⋯ 그래서 화가 났나 봐.”
네 생각을 한 나머지 홍다희에게 화가 나버렸어. 그런 말을 하며 조심스럽게 석현이에게 손을 포개본다.
“그냥.. 내가 너무 욱했던 것 같아. 후회하고 있어⋯.”
“음, 그래.”
살며시 손을 얹으면서 눈썹과 입을 모으고⋯ 잘못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어깨를 기대는데, 석현이는 그걸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은 나도 홍다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이해한다고? 무슨 말이야?”
“으응.. 내가 너 많이 좋아해서 사귀고 싶다 그러고, 자꾸 연락하고 싶어 하고 그랬잖아.”
“어? 그랬지. 하하⋯”
“그런데 생각해보면, 홍다희 입장에서는⋯ 자기가 여자친구인데 다른 여자가 너를 좋아하는 셈이니까. 내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다가가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닌가 싶구⋯.”
분명 옆자리의 주인은 원래 나여야만 했지만 홍다희가 뺏어갔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저 홍다희의 입장을 알겠다면서, 마치 그녀가 나를 질투하고, 반대로 내가 그녀를 이해하고 있다는 식이었다.
“속상하지만⋯ 너랑 같이 있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속상하지만, 그래도 난 기다릴 수 있어. 홍다희 입장도 이해가 되고⋯ 난 그냥 네 생각하면서 참아볼래.”
응. 솔직히 내가 많이 양보해주고 있는 거잖아. 석현이를 좋아하는 마음..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고.
다행히 석현이에게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갑자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엄청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희지야.”
“으응.”
“정말 고마워. 혹시 네가 다희한테 앙금이 있을까 봐 걱정했거든⋯. 내가 어떻게 해야 될 지 고민이었는데, 네가 이해해줘서 너무 고맙고 다행이야.”
“응⋯ 너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
“고마워 정말. 그리고 우리 관계⋯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조금만 더⋯?”
“응. 이런 말 정말 미안한데⋯ 데이트가지고 한 번 틀어졌다고 바로 헤어지기도 어렵고, 그냥 뭔가⋯ 나 좋다고 고백했던 애를 차기가 좀 그렇네.”
“⋯으응.”
...우리 문제, 아직 해결 안 됐었지. 이제야 생각이 난다. 군대 가는 친구 위로해준다고 같이 술자리 갔을 때⋯ 그때 사귀어 달라고, 아니면 몸만이라도 좋으니 만나 달라고 그랬던 게 생각난다.
그리고 지금 석현이 대답은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괜찮아. 기다릴게. 기다리는 거 익숙한걸⋯.”
여기서 조른다고 달라질 게 없잖아. 기다리는 거 싫은데, 다른 여자랑 있는 거 보기 힘든데, 그래도 네 부탁이니까 얌전히 기다려볼게.
“미안해, 기다려줄 거지?”
“근데 나 마음이 아파⋯ 네가 너무 좋아서 괴로워⋯.”
“이리 와. 나 믿어줄 거지? 내 마음 알지?”
“으응⋯. 더 안아줘. 꼬옥 안아줘.”
입구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가끔씩 스치고 지나가지만, 지금은 그냥 석현이 품에 안겨있고 싶다. 약간이지만 위로가 된다.
나보고 마음씨가 넓다며 기특하다고, 그래서 널 아낀다고 계속 속삭여준다.
그리고 내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해주던 석현이가 무언가를 또 부탁해왔다.
“희지야.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될까?”
“응⋯”
지금이라면 뭐든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사실은 언제나 그런 상태다.
“아까, 다희 이해할 수 있다고 그랬지? 네가 잘못한 것 같기도 하다고.”
“응⋯.”
이해할 수 있긴 한데, 그건 널 생각해서 그런 거야. 근데 그 얘기는 왜..?
“..그럼 다희한테 먼저 사과해줄래?”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