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62화. 장난을 잘 치는
백화점에 다녀오고 나서 며칠 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평소보다 몇 분 뒤늦게 일어나서, 급하게 씻고 아침을 먹던 와중에 학교에서 문자가 왔다.
[ 2021년도 1학기 수업방식 변경 및 대상 강좌 안내 ]
[ 우리 학교 학생 여러분, 개강 이후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비대면 원격 수업에 성실히 참여하고 있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 그동안 우리 학교는 방역당국의 지침을 준수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신종 바이러스 유행 상황을 주시해왔습니다. ]
[ 최근 일일 감염자 수가 정부 방역 기준 아래로 내려감에 따라 우리 학교 역시 대면 수업으로 수업 방식을 전환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
[ 다만 우리 학교는 신종 바이러스의 감염력을 우려하여, 언제든 재유행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신중히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
[ 따라서 학생 여러분의 건강을 최우선시한다는 대원칙 아래 5월 X일 위원회 심의를 거쳐 다음과 같은 조치를 결정하였습니다. ]
[ (1) 일부 강좌를 대면 수업으로 전환합니다. (2)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대면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에도 별도로 녹화 강의를 제공하도록 하겠습니다. (3) 기말고사는 비대면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
[ 앞으로도 우리 학교는 정부 방역 지침을 준수하고⋯⋯⋯ ]
“아⋯!”
다음 주부터 일부 수업들을 대면으로 전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대상이 되는 강의들 중 일부는 원래 분반이었던 걸 합쳐 운영하기로 결정돼서, 결론적으로는 수업 몇 개를 석현이와 내가 같이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드디어 나한테도 기회가 온 거야. 아무리 홍다희가 석현이한테 연락 못 하게 차단을 걸어놔도, 결국 나랑 석현이 사이를 갈라놓지는 못하는 거구나...?
석현이랑 같은 대면 수업을 듣게 된 이상, 더이상 거리낄 게 없어졌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게 됐다.
어차피 학과에 아는 사람들도 딱히 없다. 다른 친구도 없고, 아는 선배도 없다. 그러니까 눈치 안 보고 석현이랑 함께할 수 있는 거네?
이건 정말이지... 최고의 기회잖아...?
졸업도 못 하고 있는 홍다희 그년이 재수강한답시고 다른 강의실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나랑 석현이랑 알콩달콩하게 붙어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거잖아...!
“아, 진짜 행복해⋯⋯.”
이제 연락 안 돼서 끙끙거릴 필요 없겠네? 하루종일 목소리 못 듣는 건 아쉽지만, 조금만 참으면 석현이를 직접 볼 수 있게 된 거야.
나 화장하는 거, 너 보여주려고 연습 엄청 많이 했거든...? 동영상 보면서 따라 했다가, 지우고, 또 따라 했다가, 지우고, 밤새 그러면서 엄청 노력했으니까..
그리고 이번에 머리 예쁘게 한 거, 고데기 어떻게 하는지 머리 어떻게 말리는지 머릿결 어떻게 관리하는지.. 그런 거 다 알게 됐으니까..
응, 예쁜 옷 산 거 돌아가면서 다 입어볼 테니까, 그런 거 만날 때마다 전부 다 보여줄 테니까... 직접 만나면 똑똑히 봐줘...?
“이거 최고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그게 정말로 이루어진 게 분명해. 신이니 악마니, 그딴 거 나랑 엮일 때마다 하나도 도움이 안 됐는데⋯ 혹시 너희들이 내 바람 들어준 거야⋯?
아니지, 아니지. 그럴 리가 없어. 이건 사랑의 힘인걸..? 이건 누가 봐도, 하루종일 생각하니까 그 사랑을 자연스럽게 보답받은 거잖아..? 이거.. 정말 행복해—.
석현아, 널 생각했더니 이렇게 젖어버렸어. 어떻게 하지. 상상만으로도 이러는데, 실제로 만났다가 나 정신 못 차리면 어떡해..? 정말 미치겠어⋯♡
그리고 오매불망하며 기다리기를 며칠, 드디어 첫 대면수업을 하는 날이 되었다.
1교시부터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준비해야 했다.
혹시라도 늦지 않으려고 일찍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거울을 가져다 놓고는 정성스럽게 고데기를 하고⋯.
예전같았으면 대충 수건으로 닦고 드라이를 했을텐데, 이제는 정성스럽게 머리를 손질하는 거에서 마음가짐이 차이가 났다.
으음, 조금만 더 칠해볼까.
어떻게 보이는지 애매해서 손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해보는데 시간이 제법 든다.
애초에 연하게 할 거라서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혹시나 번질까봐 조심스레 공을 들였다.
눈에 아이라인을 먼저 그려야 하는지, 아니면 쉐도우를 먼저 칠해야 하는지⋯
동영상을 보니까 사람마다 다르던데, 어쨌든 삐뚤삐뚤하게 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연습한 보람이 있더라. 참 다행이야.
“됐다아—”
이 정도면 되겠지?
앗, 혹시 석현이가 날 보고도 누군지 못 알아 보는 거 아니야...?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 석현이 앞에 다가서는데, 내가 너무 달라져서 ‘누구세요?’라고 물어보는 거지. 나 희지라고, 이래도 누군지 모르겠냐며 얼굴을 부비대면 석현이는 그걸 보고 날 알아차리고 귀엽다고 칭찬해주는 거고!
“미쳤어, 미쳤어..!”
여자들이 혼자 상상하면서 침대를 팡팡 내려치는 게 이해가 된다. 이렇게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니⋯ 마치 모든 게 날 위해 돌아가는 것 같고, 내 시간이 온 것만 같고⋯ 그저 즐겁다.
위험해. 상상하다가 시간이 다 가버린다구. 빨리 옷 입고 나가야지.
뭘 입을지 고민하다가, 민소매 원피스⋯ 네이비 색이 참 예뻐서 아껴두었던 걸 개시하기로 했다.
위에 가디건을 걸치고, 학교에서 입학 선물이라고 보내줬었던 에코백에 전공책을 담고서는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아침 공기로 가득한 언덕길을 걸어가면서 새소리를 듣는데 꼭 내 앞길을 축하해주는 것만 같다.
골목 사이마다 주차되어있는 자동차에 올라타 있는 고양이도 귀엽고, 평소 길거리를 차지해 푸드덕거리며 날아다니던 귀찮은 비둘기 떼도 이젠 귀엽기만 하다.
기분이 좋기 때문인지, 아니면 힐을 신고 천천히 걷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더 여유가 넘친다.
이 속도로 가면 수업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겠지. 어차피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아침 풍경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어간다.
흐흐흥—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샌가 강의실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건물 안은 학생들로 가득했는데,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면서 해가 일찍 떴기 때문에 복도 안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복도를 분주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과, 자판기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 강의실 근처에는 삼삼오오 모여서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고, 혼자 핸드폰을 보며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강의실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찾던 사람도 있었다!
“아, 석현아...!”
석현이는 너무나 눈부셨기 때문에, 가까이 가서야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다.
“석현아, 석현아!”
“어⋯”
석현이는 나를 보고는 할 말을 잃은 듯이 멍하니 서 있었다.
“석현아 보고 싶었어⋯!”
“어, 어? 희지?”
“응...! 보고 싶었다구 정말...!”
다행히 날 못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바뀐 모습에 꽤나 놀란 듯했다. 두 눈의 시선이 잠시 가슴을 지나치고는 얼굴 근처를 한참 훑더니, 다리로 내려갔다가 다시 옷차림새를 살피고⋯
다른 남자가 이랬으면 바로 질색을 했겠지만, 석현이한테는 뭐든 괜찮았다. 바뀐 내 모습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도록 살며시 미소를 지어주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너, 며칠 새 엄청 바뀐 것 같다...?”
“흐흥- 어디가 바뀐 것 같아?”
“어.. 머리?”
“응. 헤어샵 다녀왔어.”
“어, 그런 것 같더라. 펌 하고 염색도 했네?”
응, 이름도 어려운 거.. 레인펌에 염색은 초코카키브라운인가 그걸로 했어.
“어울려?”
“연예인 같아. 잘 어울리네. 머리에 웨이브 넣은 거랑, 염색도 잘 어울리고.”
“고마워..! 그리고 또, 또 뭐 달라진 것 같아?”
“..화장?”
어떡해. 날 엄청 자세히 봐주고 있나 봐. 다 맞추면 어떡해. 이 설레는 거 어떻게 하냐구.
“화장.. 혹시 이상해?”
“아니, 아니. 절대 안 이상해. 화장 안 하다가 갑자기 해서 조금 놀라긴 했는데, 잘 어울려. 너무 안 진하게 한 게 엄청 잘 맞는 것 같네.”
칭찬받았어. 석현이 착해. 다 알아보는 거 대단해. 칭찬하는 거, 마음씨 넓어.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열심히 꾸민 거, 알아봐줘서 너무 기뻐.
너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원피스 입은 거, 잘 어울리고 싶어서 힐 신은 거, 전혀 후회되질 않아.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잘 어울려, 정말.”
“응, 다행이다⋯!”
다른 사람들이 강의실 들어가면서 한 번씩 쳐다보고 가는 거,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이렇게 서서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달달한 기분이 느껴지는 거구나⋯. 그냥 확, 이대로 어디론가 놀러 가자고 해버릴까.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석현이가 내 등을 토닥거리며 이제 그만 강의실에 들어가자고 날 이끌었다.
우리가 들을 수업은 전공수업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대형 강의였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강의실도 넓고 교단에서 맨 뒤까지의 거리도 상당했다.
우리가 복도에서 재회하는 사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뒷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그나마 뒷자리에라도 앉은 건, 꽉 들어찬 자리를 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나 대신 석현이가 재빠르게 빈자리를 찾은 덕분이었다.
나를 왼쪽에 앉혀두고 바로 옆자리에 석현이가 앉는데⋯ 옆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야, 야, 부끄럽다⋯.”
“계속 쳐다볼 거야.”
강의 하나도 안 들어도 상관없어. 계속 바라보기만 해도 좋아. 눈치 볼 사람도 없는걸.
그래서 수업에는 집중을 안 하고 석현이를 감상하는 데 온 정신을 다 쏟았다.
“에, 이 레온티예프 효용함수라는 건 말이죠? 두 재화가 서로 완전보완재 관계라는 말이거등요, 대체효과가 제로다 이 말이란 거죠—”
효용함수 어쩌고, 대체효과 어쩌고⋯ 교수님이 말하는 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사실 석현이 안 쳐다봐도,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설렘에 몸이 쭈뼛쭈뼛 긴장하게 되고... 숨 쉬는 것도 조심하게 되고, 혹시 나한테 땀냄새는 안 날까 걱정하게 되는데⋯
문득 내가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이미 익숙한 사이고, 서로 몸도 많이 겹쳤고... 무엇보다 여긴 홍다희도 없어서 눈치볼 게 전혀 없었다.
장난 좀 쳐볼까?
옆에 석현이를 쳐다보니 엄청 열심히 들으면서 필기를 하고 있다. 열중하는 모습 멋있어. 근데 지금은 잠깐만 날 봐줄래?
콕- 콕-
손가락으로 석현이 옆구리를 콕 찔러대니 아랫입술을 들어 올리며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아무래도 수업 중이니까 마스크를 내린 채, 소음이 되지 않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석현아—”
“어, 왜?”
“나 목말라—”
“아, 물 여기.”
“고마워어—”
※
자꾸 옆을 바라보던 희지가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댔다.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속삭이듯 조용히 말하는 거에 석현의 귀가 간지러워졌다.
“석현아아- 나 목말라아—”
물을 달라기에 마시던 생수병을 건네주었다. 간접키스니 뭐니, 그런 걸 따지기에는 서로가 워낙 가까운 사이여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마워- 라며 물병을 건네받은 희지의 다음 동작이 문제였다.
길게 내려온 옆머리— 며칠 전 웨이브를 넣고 염색을 했다며 자랑한 그 머리칼을 귀 옆으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대뜸 혀를 입술 밖으로 내민 채, 그대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물병의 입구는 분명 입술 사이에 걸려있어야 했지만, 희지는 촉촉하게 젖은 혓바닥으로 그것을 감싸고 있었다.
꿀꺽- 꿀꺽-
위로 고개를 쳐들고 물을 마시는데, 꿀꺽 넘겨 삼킬 때마다 새하얀 목덜미가 울렁거렸다.
석현이 그걸 바라보고 있자, 물을 다 마신 희지는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으며 눈웃음을 쳐댔다.
“하아⋯ 고마워어—”
희지가 이렇게나 장난기가 많았던가?
남자의 그것을 맛보는 것처럼 물병을 핥는 모습이 석현을 자극했다.
이후에도 희지는 계속해서 장난을 걸어왔다.
몸을 움직여 어깨를 괜히 툭 치기도 하고, 샤프심으로 손등을 콕- 찌르기도 하고⋯
희지를 쳐다볼 때마다, 마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아이처럼 킥킥대는데 그게 꽤나 천진난만해 보였다.
또 이번에는 필기를 잠깐 보여달라면서 얼굴을 들이미는데⋯
손의 위치가 아주 발칙했다.
허벅지에 손을 살며시 포개놓고는 은근슬쩍 앞뒤로 쓸어대는데, 희지의 동그란 어깨선과 깊은 가슴골이 석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
“야- 야—”
여기선 좀 곤란한데. 자꾸만 석현의 허벅지를 꾸욱 꾸욱 눌러대면서 일부러 가슴을 보여주려는 듯한 모습이⋯ 참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연붉은 틴트가 칠해진 앵두 입술을 석현의 귓가에 가져다 대고는, 마치 무언가를 질문하는 것처럼 속삭이는데⋯
“커질 것 같아..? 응..?”
귀에 바람이 들어감과 동시에 희지의 손이 고간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응? 커질 것 같냐구⋯”
바지 앞섶이 빳빳해질 정도로 손바닥으로 고간을 쓸어내면서 자꾸만 귀에 바람을 넣어댔다.
“석현아- 나, 끝나고 시간 많은데⋯. 응⋯?”
크윽, 사이 좋은 남녀 정도를 연기하면서 남몰래 유혹해대는 모습이 석현을 몹시 자극했다.
남들과는 다른 크기였기에 희지의 못된 손으로도 그 형태가 다 가려지질 않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시각, 청각, 촉각⋯ 모든 감각을 휘어잡고 끈적이는 목소리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바람에, 석현은 수업이 끝나고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희지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석현의 옆자리를 지키며 눈웃음을 친 채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나, 지금부터 시간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