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61화. 코스메틱 (3)
화장품을 샀기 때문인지 아니면 메이크업을 받았기 때문인지— 오랫동안 하지 않고 있던 화장하기 미션도 완료되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됐어. 어차피 미션 때문에 화장품 산 것도 아닌걸. 이건 홍다희한테 절대 안 밀리기 위해서, 꼭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노력하는 거야.
1층에서 볼 일은 더이상 없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3층으로 올라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서부터 돌아봤을 텐데⋯.
여성코너에 와보는 건 두 번째이지만 아직도 어색하고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냥 인터넷으로 살 거 그랬나 봐.
아무래도 한창 더워지는 6월부터 입을 여름옷을 미리 사는 거라, 직접 입어보고 고를 생각으로 매장에 온 거였다.
여름옷은 체형을 드러내는 게 많은데 혹시라도 이상하면 곤란하니까.
정말이지 이렇게나 많은 옷들이 진열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바로 집으로 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돌아갔을 것이다. 여성 수영복들까지 걸려 있어서 좀 민망했다.
작년에 재고 상품으로 남은 걸까, 비키니 같은 게 마네킹에 걸려 있는데⋯ 부끄럽지만 저걸 입고 석현이랑 바닷가에 놀러 가는 상상도 해버렸다.
여름에 같이 바닷가 놀러 갈 수 있을까? 홍다희⋯ 걔는 자기 친구들 만나러 가겠다고 석현이랑 떨어지기를 바랐다. 그래야 내가 대신 갈 수 있으니까.
내가 대신 가서, 비키니 입고... 석현이랑 같이 누워있고... 읏, 부끄러워.
어색한 시선 처리를 하면서 매장들을 둘러보는데, 대학생들을 타깃으로 한 것처럼 캐쥬얼한 스타일의 옷들이 걸려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 여자 옷을 샀을 때만 하더라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고, 여자 옷을 입어본 적이 없어 너무 어색했기 때문에 혼자서 고르는 게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이야 제법 익숙해지기도 했고, 옷을 예쁘게 입어서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도 있기 때문에 여러 옷을 과감하게 고르고는 탈의실로 갖고 들어갔다.
소매가 없는 네이비 색의 민소매 원피스. 어깨를 다 드러내야 해서 살짝 부끄럽지만, 베이지 빛이 감도는 게 마음에 드는 오프숄더 블라우스. 육체미를 아낌없이 과시하는 검은 색 크롭탑. 거기에 평소 입고 다니던 데님 팬츠 같은 거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미니스커트까지.
모든 게 이전과는 다른 과감한 선택들이었다. 날이 더워진다고 단순히 반팔을 입는 게 아니라, 여자 느낌을 물씬 낼 수 있는 옷들...
탈의실에서 하나하나 입어보는데 맨살이 확 드러나는 게 부끄럽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겨내야만 했다.
남들도 입는 건데, 나 혼자 부끄럽다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옆에 있어줄 석현이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속도로 옷을 갈아입으며 거울을 쳐다봤다.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서 각도마다 어떻게 보이는지 확인하고, 옆구리는 어떤지, 뒤태는 어떤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하나하나 입으면서 여러 포즈도 잡아봤다. 걸을 때는 어떻게 보일까? 가만히 서 있을 때는? 이렇게 하면 다리가 더 길어 보일까? 차라리 이렇게 하면 어떨까?
특히나 크롭탑을 입어보았을 때는 굉장히 색다른 느낌이었다. 집에 크롭티가 있긴 한데... 그보다 조금 더 짧고, 가슴골이 더 드러나고, 심지어는 아예 소매조차도 없는 옷이었다.
대놓고 배꼽이 드러나는데⋯ 꽤나 파격적이어서, 정말 이러고 다녀도 되는 건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배를 드러낸다는 건, 여자 몸 안에 있는 소중한 장기들을.. 가장 아껴줘야 할 소중한 아기방이 감춰져 있는 부위를 바깥에 드러내는 건데⋯
새하얀 뱃살 위에 자리 잡은 앙증맞은 배꼽이 다른 남자들의 시선을 끌면 어떡하냐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으음... 그래도 이거.. 꽤나 섹시해 보여서 마음에 든단 말이야.
분명 석현이도 좋아할 게 틀림없어.
아주 연하게 자리 잡은 복근이, 건강한 여자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그래도 석현이라면 뱃살이 좀 나오게 되더라도 귀엽다고 해주지 않을까? 막 옆구리살 살짝 잡히고, 타이트한 옷 같은 거 입으면 살짝 튀어나오고⋯ 석현이라면 다 괜찮다고 해줄 것만 같았다. 진짜 바보야.
크롭탑은 제법 마음에 들어서 합격 판정을 내리고, 다른 옷을 입으며 또다시 포즈를 잡았다.
괜히 어깨를 잡아당겨 보기도 하고, 휙 돌려서 옆태를 봤다가, 이번에는 팔을 들어서 머리를 쓸어넘기기도 하고⋯
머리칼이 긴 편에 속했기에, 마치 포니테일로 묶으려는 것처럼 손을 들어서 머리를 한데 모아 봤다.
팔을 움직여서 위로 들 때마다 겨드랑이가 드러난다. 여자가 아니었다면 무조건 가렸을 부분인데... 이제는 마치 무언가를 어필하려는 것처럼 드러내고 싶은 부위였다.
“—앗.”
그리고 머리를 이리저리 묶는 흉내를 내보다가, 부끄러운 걸 발견하고 말았다.
팔을 위로 들었을 때 겨드랑이가 훤히 드러나는데, 창피하게도 살짝 털이 올라와 있었다.
부끄러워⋯!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탈의실인데도 민망해진다.
언제 이렇게 자란 거야⋯. 아주 연하게 털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마치 내가 아무런 관리도 안 하는,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는 형편없는 여자가 된 것 같아서 너무 부끄러워졌다.
으으⋯. 혹시 석현이랑 잤을 때도... 그 때도 이랬던 거야...?
정말 우연히 발견한 게 아니었다면 몰랐을 정도로 아주 살짝 올라온 걸 봐서는 아마 석현이랑 잤을 때는 안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치만 그거랑 상관없이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잖아⋯.
이런 거, 석현이가 몰라서 다행이지 혹시라도 봤다면.. 진짜 완전 깬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행이야⋯.
까먹지 말고 다시 정리해야겠어. 여자가 아니었다면 그닥 신경 안 썼을 거지만, 여자인 이상 관리하는 게 올바른 마음가짐이잖아.
부끄러움을 뒤로 감추고 탈의실에서 나왔을 때는 매장 직원이 웃음으로 날 맞이하고 있었다.
옷 파는 사람들도 입는 사람이 잘 어울리면 기분 좋다고들 하던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친절한 응대를 받을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옷들을 따로 빼놓고, 서비스로 페이크삭스를 받고⋯ 계산을 마치고 나니 벌써부터 쇼핑백이 여러 개로 늘어나 있었다.
하나만, 하나만 더 살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더 사고 싶어.
가는 곳마다, 입는 것마다 잘 어울린다고 칭찬받는데⋯ 왠지 욕심이 나.
뭔가 부족한 마음에, 더 채우고 싶은 마음에 예정에도 없던 여성 신발 코너로 발걸음을 돌렸다.
힐⋯ 그동안은 단화나 운동화 같은 것만 신었는데, 이제는 힐 같은 것들도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부끄럽지만 여자가 된 내 모습은... 비율이 좋아서 그렇지 실제로 키가 큰 편은 아니었다.
요즘도 종종 후회하는 건데, 처음에 신이 미션을 줘서 내 외형을 고르고 있었을 때⋯ 너무 기분에 휩쓸렸던 게 아닐까 싶다.
게임 캐릭터 보고 골랐는데⋯ 남들 안 부러울 정도의 외모이긴 하지만, 키가 좀 문제였다.
재본 적은 없지만 평균인 163cm 보다는 조금 작을 것 같은 키⋯ 아마 날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가 비율이 좋은 거에 속아서 키가 167cm 정도 된다고 착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힐 신고 싶다는 거고⋯.
힐 신으면 여자라도 키가 커지고, 건장한 남자 옆에 있어도 너무 장난감 같지 않고⋯
석현이한테 부족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그렇게나 키 큰 석현이 옆에 서 있는데 너무 작으면... 석현이한테 폐를 끼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힐을 신어서라도 키를 맞추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서 적당한 가격대의 매장에 들어가서 진열된 힐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어서오세요, 손님!”
“안녕하세요. 음, 제가 힐은 처음 신어보는데요⋯”
잘 몰라서 그냥 갖고 있는 옷 말해주고 어울리는 거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펌프스 힐이니 스트랩 힐이니, 아니면 뭐더라.. 아! 메리 제인 슈즈. 하여튼 그런 의미 모를 힐들을 잔뜩 추천해주길래 제일 잘 어울리는 거 세 개를 집어왔다.
굽이 너무 높지 않고 발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거⋯
모양이 제법 마음에 들어서 일단은 다 사기로 하고 혹시나 지금 신어볼 수 있냐고 물어봤다.
직원은 당연히 골라준 힐들을 시착해보라면서 건네주는데, 역시나 힐을 처음 신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 신는 사람들이 엄청 뒤뚱뒤뚱 걸어간다더라- 그런 말은 아무리 나라도 많이 들어봤기 때문에 꽤나 집중을 하면서 걸어 다녔다.
그래도 꼭 오뚜기처럼 기우뚱하면서 중심을 잡으려고 이곳저곳을 잡고 다니고, 외나무다리를 걷듯이 양팔을 좌우로 펼치게 되고⋯ 마치 신장개업하는 가게 앞의 키다리 풍선 인형처럼 흐느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냥 지금 계산해주세요.”
“후훗, 네. 손님,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네⋯.”
부끄러워서 시착이고 뭐고 관두고 계산을 마쳤다.
힐을 신고 절뚝이는 내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성숙한 여자를 흉내 내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고⋯ 자격이 없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석현이의 여자임을 자처하면서 힐도 못 신는 여자라니, 이런 게 용납될 리가 없다. 이건 정말이지 두고두고 반성해야 할 일이었다.
자취방에 가져가서 틈틈이 연습해볼 요량으로 힐은 신지 않은 채 쇼핑백에 담아 가져가기로 했다.
당연히 쇼핑백 역시 개수가 늘어나서, 두 손으로도 들기 벅찰 정도가 되어있었다.
엄청 많이 사긴 했네. 이것보다 더 사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내 기준에서는 많이 산 거였다.
음⋯ 그건 아닌가 봐. 백화점에서 밖으로 나와보니, 길을 지나는 여자들은 너도나도 이 정도는 기본으로 들고 다녔다. 어떤 사람들은 꼭 쇼핑백에 끌려다니는 것 같은 모양새이기까지 했다. 이 정도는 평범한 거구나. 이 정도로 꾸미는 건 얼마든지 해도 되는 거구나.
왠지 그녀들과 동질감이 느껴졌다. 자기를 더 잘 드러내고 싶어서, 더 잘 보이고 싶어서 최대한 꾸미고 다니는 게 이해가 갔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도 동질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워낙 기다리는 사람이 많고, 주변에 지나가는 행인도 많아서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그렇게 질서정연하지는 않았다. 그냥 적당히 서 있고, 어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대충 뭉쳐있고⋯.
나 역시도 적당히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눈치를 채고 보니 나도 모르게 여자들 쪽에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꼭 똑같은 집단끼리 한곳에 모이는 것처럼,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은 그들끼리 서 있고, 학생들은 학생들끼리, 친구들은 친구들끼리⋯
그리고 우리들, 그러니까 쇼핑백을 잔뜩 든 채 화장과 유행하는 옷들로 겉을 감싼 여자들끼리도 따로 모여있었다.
이 사람들은 뭘 생각하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미워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질투를 불태우고 있을까?
적어도 머릿속의 꽃밭을 거닐고 있지는 않다는 게 분명했다.
모두들 자기 매력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는 것들로 온몸을 치장한 채, 또 다른 것들을 쇼핑백에 잔뜩 담아두고 있었으니까.
나 역시도 홍다희를 떠올리면서 기필코 밀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머지않아 기회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