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60화. 코스메틱 (2)
머리를 하고 나온 뒤 셀카를 찍어보니, 확실히 좀 꾸미는 티가 나기 시작했다.
사진 잘 나온 거, 석현이한테도 보여주고 싶은데⋯. 사람들 보면 자기 사진 찍어서 SNS에 올리고 칭찬받고 그러는데 나도 하면 어떨까 싶었다.
석현이가 보고 좋아요 눌러주고, 댓글 달아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
지금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지만...
홍다희가 마음에 걸렸다. 아직 걔 때문에 석현이가 내 연락처 차단한 거를 못 풀고 있단 말이야.
조금만 더 기다리자. 절대 홍다희한테 안 꿀릴 정도로 달라져서 석현이의 마음을 확실히 붙잡기만 하면 될 일이다.
응, 홍다희한테는 절대로 안 밀려.
핸드폰을 집어넣고 잠시 숨을 고르니 길에 있는 가로수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아직은 이렇게 서늘한 바람이 종종 불어오기도 하지만, 곧 있으면 날이 확연히 더워져서 새 옷들이 필요해질 것이었다.
이왕 밖에 나온 김에 옷도 사러 갈까.
날씨도 날씨이고, 머리를 하고 나니 무언가를 사고 싶은 마음이 물씬 든다.
다행히 유명한 백화점을 알고 있어서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만 가면 될 일이었다.
학교 근처의 매장들이 특별히 싼 것도 아니고, 이왕이면 좀 넓은 곳에서 여유롭게 고르는 게 낫겠지⋯.
물론 백화점도 그렇고 옷이나 액세서리 따위에 여성용이 붙는 순간 가격이 꽤나 나가기 때문에 예산을 먼저 확인해야만 했다.
음⋯.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
머리하면서 예상외의 큰 지출이 생기긴 했지만, 계좌에는 아직까지 여유가 있었다.
아무래도 술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 자주 놀러 다니는 것도 아니라 굳이 용돈을 모으는 게 아닌데도 돈이 남았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손 벌리기도 미안하고, 어차피 무언가를 많이 살 거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뭔가 잘 풀리네.
오늘은 확실히 잘 풀리는 날이었다. 머리도 잘 나왔고, 돈도 충분한 걸 확인했고⋯
방금 전에도 버스를 타는데 운 좋게도 양보를 받을 수 있었다.
“여기 앉으세요.”
“앗, 감사합니다⋯.”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서서 갈 생각에 한숨을 쉬는데, 어떤 남학생이 선뜻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리고는 꼭 나이 든 아저씨마냥 헛기침을 하면서 나를 쳐다보는데...
“?”
“크흠, 흠⋯.”
마치 무언가를 바라는 것 같았다. 꼭 번호를 물어보려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몰라서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남자는 시선을 휙 피하고는 출입문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뭐야, 이 사람⋯.
[ 이번 정류소는 신OO 백화점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고속터미널입니다. ]
이상한 남자를 떠나보내고 30분 정도가 지났을 때, 백화점 앞에 도착했다.
백화점에 들어서는데 1층부터 조명이 굉장히 밝고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퍼지는 향수와 화장품 냄새들이 날 압도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여긴 처음 와보는데. 옷을 사려고 온 건데, 아무래도 층별 안내도를 봐야 할 것 같았다.
2층, 3층... 음 여긴 아니고, 아, 여기가 여성용이구나⋯.
여성용 옷은 3층이나 4층의 매장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도 백화점 내부를 걸어가면서 진열된 상품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우와⋯.”
엄청 화려한 장신구들⋯ 보석들 같은 걸로 꾸며진 액세서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예 관심도 안 줬을 텐데 여자로 변한 탓인지, 저건 얼마나 할까, 나한테도 잘 어울릴까 따위의 생각이 들었다.
으응, 아냐, 아냐. 오늘 사려는 건 이런 게 아니잖아. 예산이 좀 있긴 해도 모든 걸 사기에는 빠듯하기에 이런 계획 밖의 지출을 해서는 안 된다.
“음⋯.”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뭔가 아쉬워서 무언가에 홀린 듯 1층을 전전하다가, 나도 모르는 새 화장품 매장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화장품 별로 안 비싸지?
사실 비싼지 안 비싼지는 잘 모른다. 그런데 화장품... 여자들은 다 갖고 있는 건데.
어른이 된 여자들은 다들 화장을 한다. 예쁘든 못생기든 다들 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화장을 아예 안 하면 다른 여자들이랑 경쟁이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내가 얼굴이 부족하진 않지만... 나도 마음속에 남자를 품고 있고, 다른 여자들에 못지않게 되고 싶은 마음이다.
하나 사볼까⋯.
다른 여자들에게 밀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뭐가 뭔지도 모른채 무작정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손님!”
매장 안에는 온갖 종류의 화장품들이 가득하고, 물건을 담기 위한 장바구니에, 벽에는 연예인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눈부신 조명으로 가득해서 눈을 두기가 어려웠다.
완전히 여자들만을 위한 공간⋯
마치 내가 들어와서는 안 될 곳을 들어온 것만 같았다. 남들 보기에는 나도 여자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쭈뼛거리고 있는데, 다행히도 여직원이 와서는 찾는 거라도 있으시냐고 물어봐 주었다.
“찾으시는 제품 있으신가요?”
“어⋯ 음, 화장품.. 사려는데요. 제가 잘 모르거든요⋯.”
무슨 화장품이 있는지, 뭐가 나한테 필요한지 그런 거 하나도 몰라요.
잘 모른다고 도움을 청하니 직원을 내 얼굴을 유심히 보고는 뜻밖의 말을 했다.
“저, 손님. 손님께서는 짙은 화장은 안 어울리실 거에요.”
“네...?”
“손님 피부가 좋으시니까⋯ 화장 짙게 해서 얼굴의 장점을 가리기보다는, 옅게 해서 피부를 강조하는 게 낫겠어요. 워낙 예쁘셔서 굳이 센 화장을 안 하셔도 되거든요.”
“아.. 네, 네⋯.”
“일단 톤 확인부터 해보실까요. 손 좀 주시겠어요?”
직원은 내 손을 달라면서, 자기 손과 내 손을 번갈아 가며 손등에 화장품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피부 톤에 따라 느낌이 다른 걸 보여주고, 맞는 색이라던지 제품마다 다른 점 같은 걸 비교해주었다.
“어⋯ 죄송한데 잘 모르겠어요⋯.”
무슨 파운데이션이니, 리퀴드 컨실러니, 워터프룹 아이펜슬이니, 아이카라니, 워터틴트니 립클로즈니⋯.
별거를 다 보여주고 조금씩 발라주면서 이건 괜찮고, 이건 안 어울리고를 일일이 설명하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이건 몇 호, 저건 몇 호 하면서 의미 모를 숫자까지 불러대는데 하나도 이해가 안 됐다.
다 똑같은 거 아니었어⋯?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도 한참 설명하던 점원은, 결국 포기하고는 자기가 맞는 걸 추천해주겠다며 일단은 무난한 조합으로 골라주겠다고 방향을 바꿨다.
“그럼 제가 일단은 무난한 거 위주로 추천을 해드릴 테니까요, 집에 가셔서 발라보시고 아쉬운 부분은 따로 체인지를 해보시구요—”
“어.. 죄송한데요⋯”
“네, 말씀하세요.”
“죄송한데 저 화장할 줄 모르거든요⋯.”
으, 내가 생각해도 답없다. 화장품 사러 와서 하나도 모른다 그러고, 화장할 줄도 모른다 그러고.
엄청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역시나 당황스럽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어.. 정말 한 번도 안 해보셨어요?”
“네, 그.. 죄송해요.”
“아뇨, 손님께서 죄송하실 건 아닌데.. 음.”
정적. 화장품 가게에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손님을 어떻게 해야 하나.
황당한 손님 앞에서 직원이 고뇌에 빠진 동안, 때마침 다른 매장에 다녀오던 여자 매니저가 우리를 보고는 끼어들었다.
“자기, 왜 그래?”
“아, 매니저님⋯. 손님께서 메이크업해 보신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셔서요.”
“뭐어? 어⋯ 음. 저, 손님? 혹시 학생분이세요⋯?”
“네? 네. 학생 맞는데요..?”
“고등학생?”
“네. 앗, 아뇨, 아뇨! 대학생이에요.”
어머—
대학생이라는 말에 매니저와 직원 모두 깜짝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얼굴이 굉장히 어려 보여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쯤 되는 줄 알았다고.
저 대학생이에요⋯.
“화장 안 해봤다 해서, 애기가 와서 화장하려는 줄 알았어요. 손님께서 워낙 어려 보이시는데 예쁘시기도 해서 헷갈렸네요. 호호⋯.”
“아, 네. 하하⋯.”
“화장 별로 안 어려워요. 손님은 어려운 메이크업 하실 필요도 전혀 없구요. 유튜X 동영상이나 주위 지인들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일단 여기 앉아보시겠어요?”
“네?”
“시간도 남는데, 간단하게 메이크업해드릴게요. 집에 가셔서 제가 해드린 거 보고 연습하시면 될 거에요. 괜찮으시죠?”
어⋯ 보통 화장품 매장에서 화장도 해주나? 그런 말은 못 들어본 것 같은데.
에이, 깊게 생각 안 할래. 오늘 그냥 다 잘 되는 날인가 봐.
“저.. 그럼 부탁드릴게요.”
“네, 네. 눈 감아 보세요—”
읏, 눈 감으래서 시키는 대로 바보처럼 꾸욱 눈을 감았다. 고개를 들기도 하고... 입을 쭈욱 내밀기도 하고... 볼에 바람 넣으랬다가, 다시 눈 떠보랬다가, 입 오므리고 숨 들이쉬랬다가, 입술을 톡톡 해보랬다가—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어느새 메이크업이 끝나 있었다.
“손님, 거울 한 번 보세요.”
“네. ⋯어?”
“어떠세요?”
“우, 우와⋯”
거울 속의 내 모습은 화장을 살짝 하기만 했는데도 또다시 달라져 있었다.
아까 머리를 했을 때만 하더라도 인형 느낌이 났는데, 화장까지 하니까 아예 인형이 되어버린 느낌⋯.
마치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진짜 내가 드러난 것만 같았다.
“역시 우리 매니저님. 손님 진짜 예쁘게 잘 되셨다. 매니저님, 저도 나중에 해주세요. 네?”
“자기는 조용히 해. 손님 얼굴이 되니까 이렇게 잘 나오는 거지. 그렇죠, 손님?”
“네? 아, 네, 네. 아하하⋯ 감사합니다.”
진짜... 엄청나잖아. 엄청 대단하고, 엄청 달라 보이고, 대단하고, 진짜.. 엄청 다르고⋯.
바보가 된 것 같다.
이게 화장의 힘인 거야...? 아니이.. 고작 이 정도 화장했다고 이렇게 달라지는 거... 그럼 바깥에 돌아다니는 여자들... 화장 잔뜩 해놓고도 그 정도이면 본판은 대체 어떻다는 거야...?
“저기.. 화장.. 신기해요⋯.”
“호호호— 손님 엄청 재밌으시다. 얼굴만 귀여운 게 아니라 재치도 있으시네.”
“진짜.. 신기해요⋯. 아 참, 그러면 이거 다 살게요. 그.. 얼마죠?”
“네, 네~ 계산 도와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실까요.”
진짜 신기해. 이런 거 안 사고 못 배겨. 이런 거 진짜 반칙이야. 안 하면 바보고⋯.
응, 그래서 다 사버렸다.
영수증 같은 건 신경도 안 쓴 채, 추천해준다며 골라준 화장품들을 쇼핑백에 잔뜩 담아버렸다.
그리고 계산을 다 마친 순간 익숙한 소리가 또 들려왔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