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59화. 코스메틱 (1)
며칠이 지나고 나선, 긁었던 상처들은 물론 석현이가 남겼던 키스마크들까지도 거의 다 사라져 있었다.
“...”
머리가 아팠던 건 두통약을 몇 번 먹고 나니 나았다. 마음을 굳게 먹었던 덕분인지 쓸데없이 유혹하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마치 꿈에서 일어났던 일인 것처럼, 난리를 피웠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후우⋯.”
마음을 추스를 때는 쇼핑이 최고지.
원래는 이런 취미 같은 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마치 홈쇼핑 카탈로그를 보듯이 옷이나 액세서리 따위를 구경하는 데 재미가 들었다.
레이디샵—
최근에 알게 된 사이트인데 요즘 트렌드에 맞는 옷이 제법 많이 있고 코디하기 좋게 샘플샷도 올라와 있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음, 옷 같은 건 제법 사두었는데 액세서리나 가방, 신발 같은 게 좀 적지 않나 싶다.
이거 인터넷으로만 봐서는 어울릴지 잘 모르겠는걸.
손가락을 튕기면서 이 사이트, 저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보니 문득 석현이 핸드폰에서 봤던 게 생각났다.
‘그런 거 좋아하나⋯.’
분명 자기는 실수로 누른 거라면서 한사코 아니라고 했지만, 그런... 그런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거... 한 두 번만 보고 끝날 게 아니라는 건 나라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취향이 대단하긴 했지?
아마 다른 여자들이 봤으면 이해 못 해주고 뭐라고 엄청 화냈을지도 모를 만한 것들이 인터넷 이용 기록에 남아있었다.
으응, 아니야. 난 그래도 다 이해할 수 있어.
남자들이 그런 걸 본다고 실제로도 욕구를 못 참고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남자들이 상상하는 특별한 상황, 특별한 소품, 특별한 옷, 특별한 대화, 특별한 자세, 특별한 날⋯.
그냥 좀 땡길 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부럽다, 나도 해보고 싶다, 내 여자가 이런 걸 해줬으면 좋겠다— 그런 상상을 하고 만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혹시나 다음에 기회가 됐을 때 나도 해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걸 전문으로 취급하는 쇼핑몰을 좀 둘러봤다.
생각보다 비싸진 않구나.
아무래도 오래 사용하기보다는, 이벤트성으로 사용하고 마는 걸 타겟으로 판매하고 있는 듯했다.
용돈을 받아 쓰는 학생 신분이지만, 이 정도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써도 되는 거겠지. 어차피 그리 비싸지도 않으니 이런 걸로 석현이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과감하게 주문 버튼을 눌렀다.
주문이 확인되었다고, 빠른 시일 내에 배송을 해준다는 톡을 확인하고—
톡을 쭈욱 내려보던 와중에, 그년⋯ 홍다희의 연락처가 다시 나타나 있는 걸 보게 되었다.
걸레년⋯ 존나 더러워.
이름이랑 프로필 사진을 보기만 했는데도 기분이 나빠진다. 꼭 핸드폰이 더러워지는 것만 같았다.
차단을 풀은 걸까. 지난번에 석현이랑 홍다희한테 차단을 당했었는데, 아마 뭔가를 정리하다가 나까지 해제한 게 아닌가 싶었다.
후우, 기분 더럽게. 얘기 들어보니까 석현이 놔두고 지 친구들 만나러 갔다면서. 그것도 데이트까지 파토내고.
그런 주제에 나랑 석현이가 연락 못 하게 방해나 하고. 기가 찰 일이잖아.
꼴도 보기 싫어. 제발 사라져줬으면.
괜히 기분만 더러워져서 곧장 톡을 꺼버렸다.
기껏 쇼핑을 하면서 풀린 기분이 다시 나빠지려 해서, 기분전환이나 할 겸 외출을 나가기로 했다.
간단하게 옷을 갈아입고 거울을 보면서 매무새를 다듬고 있는데, 문득 아직까지도 나한테 남아있는 미션들이 생각났다.
뭐였더라?
아⋯ 화장하는 거랑, 머리 꾸미고 다니라는 거였지⋯.
이걸 하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어쩌고, 안 하면 성욕이 올라가고 어쩌고⋯ 그런 말들을 주절주절했던 것 같다.
그리고 왜 미션을 안 하냐면서, 앞으로는 보상 같은 거 안주고 패널티만 줄 거라고 그랬던 거 같은데—.
자존감은 무슨. 애초에 내 맘은 석현이로 꽈악 채워져서 이미 충만한걸. 그리고 성욕 같은 거도, 딱히 미션을 안 한다고 쌓이는 게 아니잖아. 좋아하는 사람 생각하면서 몸이 달아오르는 건 당연해.
그래서 굳이 미션을 깨야 한다는 목적이 아니라, 날 꾸미고 가꾸기 위해서라도 치장에도 좀 신경을 써야겠다 싶었다.
남들 다 하는데 나도 안 하기도 좀 그렇잖아. 세상에 어느 여자가 화장도 안 하고 머리도 마냥 기르기만 하겠어.
난 석현이를 위한 여자니까, 남 부끄럽지 않게 잘 꾸미고 다니는 게 맞아.
더이상 망설일 게 없었기 때문에 곧장 근처의 헤어샵으로 달려갔다.
예약부터 해야 하냐고 물어보는데, 마침 스케쥴이 비어있었던 건지 곧바로 할 수 있다고 그러더라.
“저기.. 저 머리 좀 하려고 하는데요.”
“혹시 생각해두신 스타일 있으세요?”
으음.. 솔직히 무슨 머리를 하고 싶다, 무슨 머리가 잘 어울릴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머리칼 찰랑이는 거, 길어서 마음에는 드는데⋯.
“음.. 단발은 말구요, 저기..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지금 나 봐주는 미용사⋯ 남자인데 잘 알까? 으음... 어차피 나도 잘 모르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혹시 저 어울리는 머리..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음, 추천이요— 그럼요. 어디 보자⋯.”
미용실.. 역시 어렵다. 말 한마디 꺼내기도 어렵고, 미용사가 나 쳐다볼 때 내 시선은 어딜 향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혹시 염색도 하실 거에요?”
“어.. 염색이요?”
나 염색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고등학교 때까지 완전 범생이라서... 그런 거 생각도 못 해봤어.
“염색.. 어울릴까요? 아니, 그.. 많이 비싸요?”
“여자분이시니까 아무래도 가격대는 좀 나가요—”
직원분은 내가 잘 모른다면서 가격대를 물어보니, 카탈로그를 가져와서는 이것저것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색깔은 뭐뭐 있고, 이 색은 무슨 머리에 어울리고, 요즘 많이 찾는 색은 이거고, 손님한테는 이런 거, 저런 거가 어울리고 등등⋯.
설명을 듣다 보니 얼음이 되어버렸다. 이거.. 이거 너무 어렵잖아. 윽.
“저기,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이거, 이거 그⋯”
“초코카키브라운이요.”
“아 네, 초코카키브라운. 그니까 이거 무슨 머리에 어울린다고 하셨죠..?”
“롱 웨이브 하면 어울리실 거에요. 근데 사실 손님 얼굴에는 아무 머리나 하셔도 돼요.”
어.. 아무거나 어울리는 거, 말도 안 되는데. 그런 거 인터넷에서 기만할 때나 허풍떨 때 하는 소리잖아. 막 입고 대충 하고 다녀도 다 잘 어울린다고.
그리고 아무 머리나 했다가 이상해지면.. 뭐라 말하기도 어려운걸. 미용실에서 이것저것 따지는 거.. 쉽지 않아.
“그건 아니에요⋯.”
“하하. 잠시만요. 카탈로그 가져다드릴게요. 이거요, 이 머리 보이시죠?”
“네⋯.”
엄청 특이한 머리였다. 미용사는 그걸 가리키더니, 이런 머리 보통 사람들이 하면 정말 이상하고 얼굴의 단점들이 부각되는데, 나 정도면 정말 하고 싶은 머리 다 해도 된다는.. 그런 칭찬이었다.
너무 영업용 멘트 아니야..?
“죄송한데.. 저 그냥 평범한 거 할래요⋯.”
“아, 네. 하하하— 그럼 커트는 살짝만 하고, 펌으로 웨이브를 넣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 네. 네.”
“이거, 레인펌으로 넣어드릴게요.”
“레인펌이요..? 저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요⋯.”
레인펌이 뭐야. 웨이브 넣는거, 그거 머리 곱슬곱슬해지는 거 아니야? 그런데 무슨 펌 이름이.. 레인펌?
이게 뭔지 잘 모른다니까, 뭐 어디를 어떻게 집고 나서 고데기로 풀어주고, 웨이브를 어떤 각도로 어떻게 해서⋯ 이렇게 저렇게 하면 내추럴하면서도 청순미를 살리면서 한편으로는 이국적인 느낌이 나고⋯ 그런 설명들을 막 해줬다.
더 어려운데요..?
“...이상한 거 아니죠? 안 어울릴 거 같아요.”
“에이, 확실합니다. 정말! 정말 어울릴 거에요. 안 어울리면 제가 환불해 드릴게요.”
몰라요. 환불해준다고 해도 말 못할 거란 말이에요. 정말.. 미용실은 너무 어려운 공간이라구요.
“그럼.. 그냥 그렇게 해주세요.”
“네- 머리는 레인펌 롱 웨이브 넣어드리고, 초코카키브라운으로 염색해 드릴게요.”
“네에⋯.”
으, 망하면 어떡하지.
—시선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눈을 꾸욱 감고만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 좀이 너무 쑤셔오기 시작할 때쯤 머리가 다 끝났다.
“손님, 거울 한 번 보시겠어요?”
“네? 아, 네⋯.”
음⋯
음⋯⋯
어⋯
오⋯?
오오...?
“우, 우와⋯”
너무.. 예뻤다.
이거 진짜 나야?
거울 속에 있는 여자는 마치 인형 같았다. 어.. 거울 앞에 있는 건 나니까, 거울 속에 있는 거도 분명 나인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분명, 머리하기 전에도 솔직히 예쁘긴 했는데, 머리하고 나서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거... 이게 정말 저인가요?”
“하하하, 머리 잘 나왔네요. 제가 뭐라고 했나요. 잘 어울리죠?”
“네, 네⋯ 너무 잘 어울려요⋯.”
그냥 잘 어울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아요⋯.
마치 외견을 커스텀하는 미션을 또 한 것처럼, 그⋯ 바보 같은 소리인 건 아는데, 외모가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올라가 버린 것 같았다⋯.
그런 생각들을 혼자 하면서 거울을 멍하니 쳐다보니까, 미용사분은 굉장히 흡족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칭찬을 시작했다.
“저 일 하면서 이렇게까지 잘 된 거는 손님이 처음이시거든요. 혹시 연예인 아니시죠?”
“네?”
“가수나 아이돌 뭐 그런 거요. 사실 처음 들어오실 때 연예인인 줄 알았거든요.”
“아, 아니에요. 저 그냥 학생...”
그 정도야? 아니.. 예전에 개강했을 때쯤 얼굴 고르라는 미션 할 때 확실히 예쁜 걸 고르기는 했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칭찬을 받는 건 또 색다른 경험이었다.
“머리도 잘 나오긴 했는데, 솔직히 이 정도 되면 오히려 머리가 얼굴빨을 받는 수준이네요. 정말, 제가 여짓껏 일 하면서 최고의 작품입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아하하⋯.”
부끄러운 칭찬을 들으면서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머리가 어떻게 나왔나 다시 한번 확인했다.
레인펌⋯ 다른 펌이랑 뭐가 다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꼭 이름만큼이나 비가 내리는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웨이브가 너무 굵지도 않고 자연스러워서 꼭 잔잔한 물결이 치는 것만 같았다.
신기하다⋯. 내 머리에 웨이브가 들어가니까 진짜 여자 머리 느낌이 난다.
“우와⋯.”
“하하, 마음에 드세요? 머리 전반적으로도 그렇고, 시스루뱅이라서 앞머리도 너무 무겁지 않게 했어요.”
“네.. 네.. 엄청 마음에 들어요...”
확실히 앞머리도 너무 답답하지 않고, 머리도 홀가분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거기다가 색깔도⋯ 그 초코카키... 아, 초코카키브라운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엄청 잘 어울렸다.
“색깔도 엄청 예뻐요⋯.”
이름에 초코가 있어서 진한 색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밝고 화사하다.
다행히 그라데이션도 들어가 있어서 굉장히 자연스러운 느낌이 났기 때문에, 괜스레 민망하다던가 날라리 같다던가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저, 감사합니다⋯.”
“뭘요. 저도 이렇게 머리 잘 나오니까 기분이 좋네요. 하하— 계산 도와드릴게요.”
“아, 네. 여기요.”
“네, 자⋯ 계산되셨구요. 됐습니다. 여기요.”
“앗, 네. 안녕히계세요⋯!”
“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 미션이 완료되었습니다. ]
머리를 다 하고 나오는 순간, 헤어를 꾸미라고 했던 미션이 완료되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션을 했다고 보상 같은 걸 더이상 주지는 않았지만, 달라진 내 모습을 보니 텐션이 올라가고 자신감이 회복되는 것 같았다.
그럼 그냥, 이왕 밖에 나온 김에 그것도 사러 갈까⋯?
응, 그게 나을 것 같아. 머리만 했는데도 이렇게나 달라졌잖아. 다른 사람이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야. 난 이렇게나 가능성이 풍부한걸.
다른 여자도 그렇고, 특히 홍다희⋯ 그년한테는 절대로 안 밀려.
내 매력을 가꾸고, 확실하게 석현이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 바뀌는 날—
왠지 오늘이야말로 내가 본격적으로 변할 수 있는 날이 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