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9화 〉58화. 세이렌 (59/80)



〈 59화 〉58화. 세이렌



“석현아, 나   물어봐도 돼?”


“놀리지 말고.”



“아니이, 놀리는 거 아닌데.”

“그럼 뭔데?”

“이거.. 너도 비트코인 해?”

“어? 어. 아, 봤구나.”

“으응. 이거 앱, 비트코인 같은 거잖아.”



석현이 핸드폰을 구경하다가, 비트코인을 거래하는 앱이 깔려있는걸 봤다. 평소에 그런 얘기는 하나도 안 해서 몰랐는데⋯.


“이거 어려워?”

“음? 이거 그냥 주식이랑 비슷해.  안 해봤구나?”

“으응.. 엄청 어려워 보이는걸.  이거 잘해?”

“뭐, 그냥 용돈 가지고 조금씩 하는 거지? 소소하게. 봐 봐. 여기 가격 바뀌는 거 보이지?”


“응, 재밌어 보인다.”



실시간으로 체결된 거래가 보이기 가격이 휙휙 바뀌어대는데, 꼭 게임을 하는  같아서 재밌어 보이긴 했다.



“근데  이거 못 할  같아. 어려워 보여.”

혹시 돈 같은 거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 괜히 어려워 보이기도 하고, 자꾸 숫자가 바뀌는 게 정신없어서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냥 관심을 끄고, 다시 석현이한테 얼굴을 부비대며 애교를 부렸다.

“또,  애교 부리네. 귀여워 진짜로.”

“으응.. 머리 쓰다듬어 줘.”


“이리 와.”



아, 너무 좋아⋯. 왠지 애완동물 쓰다듬어 주는 느낌이 든다. 꼭 주인한테 안겨서 사랑받는 것처럼 마음이 충만해진다.


 강아지들이 주인한테 안겨서 조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주는데⋯ 막 나른해지면서 잠이 스르륵 오려고 한다.

“잘거야?”


“으응.. 졸려.”


“씻고 자야지. 응?”


“으⋯”



예전 같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씻고 잤을 텐데.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땀 흘리고 나면  씻고 잤을 거다.


근데 지금은 그냥 귀찮고, 안긴 채로 잠들어버리고 싶고⋯ 여자가 되고 나서, 사랑을 알고 나서 변해버렸다.


강박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쓰기 보다는 지금처럼 좋아하는 사람 옆에서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어쩌면 이런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동안은 항상 정해진 시간에 일어난다던가, 정해진 패턴으로 일과를 보낸다든가 하면서 너무 정해진 대로만 살려고 했고⋯.

그래도 오늘은 석현이가 있으니까, 혹시 냄새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겨우 씻고 잠들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평소 기상하던 시간보다  시간이나 늦은 8시 30분이 되어 있었다.


“일어났어?”

“으응.. 일어나 있었어?”

나보다 먼저 일어났나 봐. 혹시 바보 같은 얼굴로 잔 건 아닐지 걱정하며 물어보니, 조금 전에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바로 깨우지 그랬어.


“너 자는 거 보고 있었지. 귀엽더라.”

“으우⋯ 놀리지 마.”

“진짠데?”


“..키스해줘.”



츄우—

아, 모닝키스 엄청 기분 좋아.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만큼이나 따스하다.

입을 떼면 서로의 타액이 길게 늘어지며 여운을 남긴다.

“더 해줘⋯”

다시 한번 키스를 주고받은 뒤, 간단히 씻고서는 모텔을 나왔다.


사랑을 주고받은 다음이기 때문일까, 모르는 동네이지만 모든 게 우리를 반겨주는 것만 같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조차 우리를 환영해주는 것만 같았다.



석현이가 이끄는 대로 자그마한 카페에 들어가서 토스트를 먹고, 버스를 타고 돌아가고—

마치 여자친구처럼 옆에 붙어있을  있었다. 꼭 평생을 약속한 사이인 것 처럼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게 이렇게나 행복할 줄이야.


그리고 집 앞에서 헤어지는데 그건 또  너무나 속상했다. 응, 속상하다는 감정⋯ 이건 그동안 알고 있던 속상함과는 완전히 달랐다.


시험을 못 본다던가, 게임에서 진다던가 따위의 분함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더 있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아쉬움에 가까웠다.


어쩌면 이런 아쉬움이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더욱 키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자취방에 돌아와서도 꼭 연애를 시작한 것처럼, 여자친구가 된 것처럼 행복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응, 여자친구. 석현이의 여자친구⋯.


당당하게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솔직하게 마음을 내보일 수 있는 관계.

그런 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나랑 사귀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아으...”



머리가 아프다.


아무래도 전날 술을 마신 게 좀 무리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좀 생각해보려 하면 자꾸 머리가 지끈거리는 거지.


괜히 술 많이 마셨나 봐.

예전보다 주량이 늘긴 했는데 여전히  해서... 결국에는 중간에 잠시 잠들어버리기도 했고, 음.. 나 좀 정신없을 때 석현이랑 친구들이 뭐라 뭐라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으, 약 어딨지.”




자취방에 짐 들어올  엄마가 사다둔 상비약, 그거 분명 어디에 뒀다고 주의를 들은 것 같은데.


진짜 다음엔 술 마시지 말까 봐. 머리 너무 아픈걸. 근데  마시고 나서, 사람들이랑 헤어지고 나서 석현이랑 모텔 간 거... 그거 결국에는 술 마신 덕분인 거 아니야?



그니까, 술 마셔서 머리 아픈데, 술 마신 덕분에 석현이랑 단둘이 나갈 수 있게 된 거고..?


지끈—


으.. 아무튼 너무 황홀했어. 평생 못 잊을지도 몰라. 이렇게 큰 기쁨 주는 사람, 어디서도 만날 수 없을 거야. 엄청 훌륭하고, 엄청 오래  수 있고⋯.

그런 거에 반해버려서 고백해버렸어. 부끄러워. 그래도 너무 좋아.




...진짜 너무 좋아서,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고 싶어서 엄청 애원했던  같은데.

“두통약 어딨지⋯”




머리 아파⋯. 아, 맞아. 그러니까 정말로 너무 절실해서,  둘이서가 아니라면 차라리 세 명이서 사귀어도 괜찮다고까지 말한 것 같은데⋯. 엄청 이상하게 생각했을 거야.

왜 그랬지. 이런 거 평범한 거 아닌데.. 근데 그만큼 석현이랑 함께하고 싶어서...




으, 어지러워. 엄청 메스껍고⋯.

아무튼, 그러고 나서 석현이가 뭐라 했더라?


...


기억이 안 나. 엄청 중요한 건데, 사귀고 싶다는 거 엄청 중요한 고백인 건데. 왜 대답이 기억이  나지...?



아, 두통약 찾았다. 여기 있었네. 으으.. 먹고 좀 쉬어야지.



숙취가 아니라 체한 건가. 엄청.. 속이 울렁거려. 머릿속도 어지럽고.

아. 나랑 사귀자고, 아님 나랑도 사귀어달라고 말한 거⋯ 그다음에 내가 계속 말하는 바람에 대답 못 들었구나.


...나 왜 섹파라도 하게 해달라고  거지?


섹파.. 그거 사랑같은 건 없는 관계인데...

서로 감정 없는 사람들끼리 적당히 꼴릴 때 만나서 섹스만 하고 헤어지는 건데..?

마음 나누는 거 전혀 없고, 그냥 성욕만 풀려고 만나는 거잖아.

사랑하는 사이에는 그러면 안 되는  당연한데, 나 상식 잘못된 거야..?



근데 왜 섹파라도 하고 싶다고 매달렸더라..? 여자가 섹파.. 성욕 분출구로 써달라고 한 말은 아닌데, 왜 그랬지?




아.. 어쩌면 사실 섹파라도 괜찮은 거 아닐까?


여자라면 하면 안 되는 그런 가벼운 관계... 나는 괜찮은  아닐까?


그도 그럴 게, 어차피 언젠가는 다시 남자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분명 여신이랑 악마가 주는 미션.. 그런 거 끝까지 다 하면 원래대로 돌려준다고 했었단 말이야⋯.

⋯근데 원래대로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니야..?


여자 아니게 되면, 석현이랑 못 사귀잖아. 여자랑 남자랑 사랑하는 거, 자격 없어지잖아. 성별 똑같은 거.. 그런 사람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전혀 그런 생각 없단 말이야.


나 뭐지. 사실 원래대로 돌아갈 생각 아예 없었던 건가..?



“...!”
욱, 화장실..!

구역질 나와, 어지러, 메스꺼워,  나올 것 같아. 빨리, 빨리—!


우당탕,


쾅,

“우윽⋯ 욱, 우으으윽—!”


윽, 으으욱, 콜록, 콜록⋯

목구멍이 아려온다. 눈물이 핑 돌고 기침이 터져 나온다.


변기 앞에 쭈그려 앉은 채 타액을 떨구고 있는 나는, 몸 안의 메스꺼움과 함께 머릿속의 온갖 어지러움마저 전부 토해내었다.




“켁, 케헥, 콜록, 콜록⋯”



하아, 하아—

속을 게워내니 조금 나아지기 시작한다. 거북했던 느낌이 풀려가고, 머릿속이 멈춰버린 것처럼 복잡한 생각들이 사라져간다.

그리고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또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냥, 아무 남자나 붙잡고 사귀지 그래? 석현이 말고도 남자는 많아.



이거.. 여신 말고, 도서관에서 석현이랑 공부한  날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악마년의 목소리⋯.




—아니면 그냥 아무 남자나 꼬셔서 확 안겨버려! 뭐더라⋯ 그래, 원나잇! 너희들 그런 거 많이 하잖아. 응?



“꺼져⋯⋯.”

그딴 유혹, 절대  넘어가. 내가 섹파라도 자처하려 한 거는, 석현이와 어떻게든 붙어있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 머릿속에서 나가⋯.”


닥쳐, 꺼져, 빨리 나가버려⋯


그렇게 굳은 마음으로 절대 안 넘어간다고 중얼거리며 어떻게든 버텨낸다.


...악마년의 목소리 때문에, 그러니까 사람을 망치려는 더러운 기운이 묻어버린 바람에 온몸이 가려워졌다.


꼭 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날 더럽히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온몸을 벅벅 긁어댔다.

팔뚝, 허리, 가슴, 허벅지, 배⋯

손톱에 날을 세워 미친 듯이 긁어댔다. 정말로 필사적이었다.

내 몸에 더러운 게 붙어있지 않도록, 계속 긁고  긁어댔다.


다행히 악마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려는 노력 덕분에, 어느샌가 더러운 걸 떨쳐낼 수 있었다.



저주스러운 목소리도 더이상 들리지 않았고, 몸을 가렵게 만드는 더러운 느낌도 더이상 들지 않았다.

온몸에 상처가 주욱 나고, 빨간 피로 흉이 져버렸지만, 이건 사랑을 증명하는 영광의 상처인 셈이었다.


“사랑해 석현아⋯. 난 절대 흔들리지 않아. 영원히 사랑해⋯.”




“내가.. 내가 살아있는 건 전부  덕분이야⋯. 널 위한 거고, 너만을 바라봐야 하는 거야⋯.”


“내가 여자일  있는 것도 오직 네 덕분이야⋯. 나한테 이름을 준 것도 이 세상엔 너뿐이야⋯.”



“내 몸은 다 널 위한 거야⋯. 내 처음은 모두 네가 가져갔어⋯. 그리고 내 마지막도 너한테 다 줄 거야⋯ 항상 그럴 거야⋯.”





“응⋯ 난 희지야. 내 이름은 희지야. 희지는 석현이 꺼야. 희지는 석현이 여자야. 희지는 석현이 좋아해. 희지는 석현이 생각 뿐이야. 희지 기뻐. 희지 젖었어⋯”



 생각을 하니 또 젖었어.

하응⋯ 온통 네 생각뿐이야. 생각할 때마다 푸욱 젖고 있어.

다른 남자 같은   세상에 하나도 필요 없어. 다른 사람 얼굴 같은 거 하나도 기억 안 해. 다른 사람 목소리 같은 거 기억할 필요 하나도 없어.




흐읏⋯ 물이 계속 나와. 근데 아무리 쑤셔대도 네가 없으면 채워지질 않아.

아무리 혼자서 지분거려도, 혼자서 비벼대고 이딴 장난감 같은 걸 갖다 대봐도 너 없이는 절대 풀리질 않아⋯.



다시 한번 너한테 안겨서 온몸을 짓눌릴 그때까지 노력하고 있을게.




매일 매일 생각하면서 충실하게 준비할 테니까⋯ 푸욱 적셔둘 테니까 언제든 날 불러줘⋯. 날 언제든 안아줘⋯.





“아.. 석현아, 석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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