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8화 〉57화. regression (58/80)



〈 58화 〉57화. regression

두 번이나 몸을 섞고 나니 모든  달라 보인다.

여자로 변했을 때 괴로워했던 것들이 다 무색해질 정도로, 엄청난 기쁨이 날 감싸고 있었다.


오늘 기대만큼이나 엄청 좋았고⋯ 내가 귀엽다는 말, 정말 사랑스럽다는 말, 그래서 날 굉장히 아끼고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말 들어버리면 자꾸 두근두근해지는걸.


나 아낀다고 말해 준 거, 그럼 내가 다시 용기 내도 좋다는 허락이나 마찬가지잖아.

“석현아, 나랑 사귈래?”




그래서 분위기를 타서 고백해버렸다. 내가 사랑스럽다고, 날 아낀다고 말해줬으니까 지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막상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오니 걱정이 몰려와서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불안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사귀자고 해버려서 곤란해하면 어떡하지..? 안된다고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석현이가 뭐라 대답하려는 순간, 말을 가로챌 수밖에 없었다.



“석현아, 나랑 사귈래?”

“지⋯”


“앗⋯ 미안, 미안..!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 지금 말한 거, 잊어줄래..? 응? 아하하⋯ 잘못 말한 거니까. 아, 그래! 아니면...! 아니면, 나랑도 사귀어줘...!”



석현이한테서 나온 첫마디가 거절이나 외면, 버림 따위의 것일까 봐 다급해진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허둥지둥하게 된다.

“..뭐?”



“나랑만 사귀는 거 안 되면, 그니깐 홍다희랑 헤어지는 거  되면..!  다 사귀는 거라도 괜찮으니까...! 그니까 나랑도 사귀면 되는  아닐까? 그럼 여자친구 차버리는 나쁜 사람 안되고, 모두 좋은 거 아닐까? 응? 응—?!”

“응응,  정말 사랑하니까. 너 정말 좋아하니까, 이게 낫지 않을까? 나랑 너랑 사귀는 거 안 되면, 나랑도 사귀고 걔랑도 사귀면 되는 거잖아? 응, 나 괜찮아. 다 감수할  있어. 그만큼 사랑하는걸?”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희지야⋯!”



석현이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어간다. 아, 이러려던 거 아닌데⋯ 곤란하게 하려던  아닌데⋯. 나 때문에 대답도 제대로 못 해주고 난처해하고 있잖아. 내가 사귀자고 그래서, 나랑 사귀어달라고 그래서 할 말이 없어진 거잖아.

나 주제에,  같은 게 감히 사귀자고 그래서⋯ 먼저 차 놓고 뻔뻔하게도 뒤늦게 매달리는 질척한 여자라서 석현이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건가 봐⋯.


“아, 아하하.. 사귀는  말고, 아니면.. 아니면 섹파라도 좋으니까..! 응? 섹파, 섹파라도 좋으니까—!”



“희지야!”

“아무 때나 만나서 섹스해도 되니까, 응? 앗, 만나자고 귀찮게 안  테니까, 아무 때나 부르면 바로 대줄 테니까..! 연락하고 싶다고 안 졸라댈 테니까, 그냥 연락 올 때까지 고분고분 기다릴 테니까..!  편할  바로 안길 테니까, 그니까, 섹파.. 섹파라도 좋으니까 버리지 말아줘, 버리는 거 싫어. 버림받는 거 싫어..! 나 여자 되고 너밖에 없단 말이야..!”




“그만 해! 그만!”

“홍다희한테 질투도 안 하고, 헤어지라고도 안 하고, 나랑 사귀자고도 안 할 테니까, 차단한 거 해제해달라고 귀찮게 안 하고, 친구들 만나러  때 성가시게 안 하고, 옆에서 걸리적거리지 않게 조심할 테니까..! 그니까, 그러니까 섹파라도  수 있게 해줘, 응? 응? 제발⋯”



“희지야, 희지야!”



“섹스 잘  수 있게 매일 연습할테니까, 맨날 노력할 테니까—”


“희지야, 정신 차려!”




허억, 헉—

갑자기 버림받을까 봐, 선택받지 못할까 봐 무서워진다.

 인간관계는 석현이가 전부인데, 내 예전 모습과 지금 모습을 모두 알고 있는 건 석현이뿐인데 갑자기 사라질까  두려워진다.


석현이에게서 멀어지고 나 자신이 누군지   없게 될까봐 두려워진다.


그래서 미친 듯이 애원하는데 석현이가 날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쏟아내는 동안, 석현이는 내 어깨를 부여잡고 정신 차리라며 계속 외치고 있었다.


“진정해, 진정!”

“허억, 허억, 헉, 헉—”



“희지야! 날 봐.  눈 똑바로 봐.”


“헉.. 허억..?”


겨우 시선이 마주쳤다. 숨이 넘어갈 것만 같고 눈이 뒤집어질 것만 같은데, 석현이가  끌어안더니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기 시작한다.



“숨 쉬자, 숨. 착하지? 응? 옳지, 숨 마시고, 그렇지, 다시 내쉬고—”

“흐악.. 학..? 하악.. 학...”


“희지야, 내  들려?  얼굴 봐 봐, 내  들리지?”



“어.. 어.. 들려, 들려⋯”

“너 안 버려. 절대 안 버리니까, 진정해.”


“안 돼, 안 돼, 버리는  안 돼..  모습 기억해주는 사람 너밖에 없어⋯”

“희지야, 절대  버려. 절대 안 버린다고. 네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다 기억해 줄 테니까. 절대  잊으니까.”

“안 버려..? 나 안 버리는 거면, 그런 거면  섹파 할  있어..? 아무 때나 마음껏 대줄 테니까, 나 안 버려져..?”


“희지야, 너 많이 아낀다고. 응? 그러니까 진정하자.  다시. 다시 날 봐.”




“하아.. 하아...”


“옳지.. 착하지.  다시 쉬고—”



석현이가 시키는 대로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었다가 반복하며 호흡을 조금씩 되찾는다.

숨이 고르게 돌아올수록 미친 듯이 뛰던 심장도 점점 가라앉고 초점이 다시 또렷해지기 시작한다.


“..후우, 후우...”

“희지야.  진정 돼?”


“하아.. 응.. 미안,  잠깐⋯”


“괜찮아, 괜찮아. 안겨.”




으응,


석현이에게 푹 안기는 순간 마법처럼 모든 흥분이 가라앉는다.


 이렇게 갑자기 흥분한 거지⋯.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아낸 게 민망하고 부끄러워진다.


근데, 섹파라도 하게 해달라는 말... 진짜인데. 그 정도로 네 옆에 있고 싶은 거, 진심인데⋯.




하지만 한바탕 난리를 친 직후라 뭐라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꼬옥 안겨있기만 했다.

그러자 석현이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키스를 해주었다. 훨씬 차분하고 상냥한 키스였다.

따뜻한 위로의 키스⋯. 날 생각해주는 마음이 전해져온다. 석현이가 얼마나 마음이 넓은 남자인지 깨닫게 된다.


덕분에 복잡했던 생각이 녹아내리고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희지야. 아침까지 같이 있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응?”


“응, 고마워⋯.”


“좀 진정 됐어?”


“으응.. 네 덕분이야. 진짜 고마워.”

아주 차분한 어조로 날 달래주고, 칭찬해주고, 좋은 얘기를 해주고⋯ 석현이는 그렇게 수십  동안 나를 껴안고 있으며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희지야, 같이 씻을까?”

“응..? 완전 좋아.”


“일어나 봐.”


“응. 아, 앗..?”


아앗,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간다.

“괜찮아?”

“흐읏.. 미안,  조금만 쉴게. 먼저 씻어⋯.”

정사가 너무 격렬했던 탓일까, 아니면 조금 전에 난리를 쳐댄 탓일까. 몸도 마음도 모두 힘이 빠져버려 움직이기가 어려워서 석현이 먼저 씻으라고 보내주었다.

“그래, 누워있어.”

“응, 아..! 나 미안한데 핸드폰 좀. 내꺼 배터리 다 떨어졌어⋯.”


“여기. 비밀번호 풀어놨으니까 놀고 있어. 결제해놨으니까 보고싶은  있으면 네 맘대로 보고.”


“고마워-”







솨아아—, 뚝.

“후우— 시원하다. 다 씻었으니까 너도 씻어.”

“으응.. 근데 석현아..?”


“어, 왜?”



그, 저기..

“석현아, 이거...”

“이거? 뭔데?”



으으.. 석현아.

“너, 너 이런 거... 이런  좋아해..?”

“어?”


“이거.. 살색 나오고.. 근데 막.. 이런거.. 우와, 진짜... 으응, 나도 이해하긴 하는데. 음, 이런 거.. 그니까.. 음..”


“야, 야..! 핸드폰 이리 내!”

“아니이, 다 이해하긴 하는데..? 근데 좀, 아하하..?”


“야이,  이런 걸 뒤져봤어? 빨리 이리 내!”


“아하하.. 여기—”

“야, 핸드폰 빌려줬더니 이런 걸 뒤져보면 어떻게 해? 크흠, 이거 사생활 아니냐고!”


“으응.. 사생활.. 너 사생활,  이해해줄게..?”

“아오, 진짜. 잠깐 본 거니까! 아니..! 실수로 눌렀던 거니까! 아무튼 내가 본 거 아니라고!”

“응 믿어, 아무튼 믿어. 근데.. 이런 거 다른 여자 보여주면 분위기 순식간에 싸해질지도 모르는걸..?”

“야! 더 말하지마. 어후—”



“—후, 희지야. 근데 이건 어떻게 알았어?”


“으응..?”

“이거 사이트, 좀 그런 데잖아. 여자들이 싫어할 만한 거.”

“음.. 나도 원래 아는걸?”


“아⋯ 음, 그러겠네. 미안.”

“뭐어.. 괜찮아. 지금이 중요하니까?”


“그래. 누가 봐도 너 엄청 귀엽고 사랑스러워. 그니까 여자애는 이런  절대 보지 마.”


“우와아, 알았어.  잘 들을게. 근데,”


“근데? 또 뭐.”

“남자는 이런 거 봐도 된다는 거야? 그래서 보는 거야?”


“어휴, 그런 게 아니잖아.”

“개변태♡”


“너 진짜!”

“앗, 간지러..! 안 놀릴게- 으학, 꺄하핫..!!”


이히힛— 간지러, 진짜 간지러..! 미안, 안 놀릴게! 히히힛⋯









“—후, 박희지. 여기 앉아 볼까?”

“네!”



“앞으로 이런 걸로 까불기 있기 없기?”

“없기!”



“남의  함부로 뒤져보기 있기 없기?”


“없기!”



“이런 걸로 놀리기 있기 없기?”



“...”



“있기 없기?”


“..없기?”



“? 대답이 이상한데. 다시. 이런 걸로 놀⋯”



“앗, 잠깐만!”

“뭔데.”


“...”


“뭐.”





“...개변태인거 인정하기 안 하기?”

“야!”






“—으히힛, 안 놀릴게! 항복이야, 항복! 앗, 항복한다구! 히힛⋯”




“너 진짜 귀여워서 봐준다.”


“응,  놀릴게. 항복.”

“저기, 석현아.”

“또 왜.”



“나 근데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잘 생각하고 물어봐.”




“아니이, 놀리는  아닌데.”


“뭔데 그럼?”



“너도 이거.. 비트코인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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