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53화. monopoly
자신 없이 부른 노래가 칭찬을 받았다. 석현이 표정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타면서 같이 어울리게 되었다.
군대 가는 친구분이 노래 부를 때, 중간에 코러스를 도와주기도 하고 소절을 나눠 부르기도 해봤다.
즐거워.
이렇게 즐거운 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노래방 많이 갔을 텐데.
비록 신종 바이러스가 잡히진 않았어도 노래방 정도는 다니면서 스트레스를 풀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남자들 사이에서 나 혼자 여자라 그런지, 같이 노래를 불러주니까 분위기가 확 산다.
물론 석현이가 노래를 부를 때도 듀엣으로 나서서 함께 했다. 내가 다른 친구와 노래를 부를 때는 좀 못마땅해하던데, 같이 부르니까 또 좋아한다.
평소에 듬직하게만 느껴졌던 남자가, 이런 걸로 표정이 안 좋았다 다시 좋아졌다 반복하는 걸 보니 너무 귀엽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노래를 부르는데, 점점 흥이 나서 약간 춤 흉내도 내봤더니 갑자기 석현이가 핀잔을 주기 시작했다.
“야, 얘 춤 시키지 마. 취했잖아.”
그 정도로 취한 건 아닌데.
즐거워서 분위기 좀 내주는 건데. 그런데도 석현이는 내가 춤을 추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막춤이라서 싫어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닌 거 같고.
하지만 옆에서 계속 못 하게 하니까 다른 친구들도 눈치를 보면서 좀 쉬라고 양보를 해줬다.
아니 이거.. 아무리 봐도 내가 춤을 못 춰서 그런 게 아니라.. 꼭 석현이가 날 통제하는 느낌이었다. 으음⋯.
그냥 노래나 불러야지.
몇 곡이나 같이 불렀을까? 마이크가 수도 없이 옮겨 다닌 끝에 드디어 노래방 시간이 다 끝났다.
하지만 고작 이걸로 끝나기엔 아쉬운지 다들 2차를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희지 씨도 같이 가실 거죠—?”
“네에— 그럼요오—!!”
당연 가야지!
원래는 석현이 옆에 있으려고 따라서 온 건데, 이쯤 되니까 나도 즐거워서 계속 끝까지 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석현이는 내가 술을 잘 못 한다는 걸 걱정이라도 하는 건지 자꾸만 괜찮냐고 물어봤다.
“너 많이 취하지 않았어? 데려다줄 테니까 힘들면 이만 가자.”
“아냐아냐아—!! 완전 괜찮아!”
응, 완전 괜찮아! 너무 즐거워!
조금씩 조절하며 마시긴 했지만, 술도 많이 늘은 것 같고, 다들 너무 잘 대해줘서 즐겁단 말이야.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된다? 너 술 못하잖아.”
“아이- 괜찮다구. 너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히히. 너 믿고 있다구. 엄청 든든하단 말이야. 나 술 마시다가 기절하면 네가 지켜줘.
※
그리고 희지는 얼마 못 가 리타이어했다.
“니 친구 술 진짜 못한다.”
“어우, 얘 맨날 이래.”
2차도 달려보겠다며 자신만만하게 외쳐놓고는 몇 잔 마시지도 못하고 뻗어버렸다.
석현이 보기에 귀엽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다른 데서도 이러면 어쩌나 걱정이 들기도 했다.
자기 없는 데서, 그러니까 엄한 데서 술 마시다가 이렇게 뻗어버리면..
석현에게 희지는 여자친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른 체할 수도 없는 특별한 관계였다.
한동안 조금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그간 지내본 걸로는 성격도 잘 맞고 외모도 이상형에 가까워서 점점 거리감을 좁히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학교 친구를 넘어서, 남녀관계를 가지기도 했었고 사귈 생각도 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여자친구인 다희에게 불만이 생기던 차에 자꾸만 희지가 다가오니까 마음이 흔들리는 게 사실이었다.
자기한테 어깨를 기대고 잠깐 잠들어있는 희지를 한 번 바라보고는, 석현은 다시 술잔을 비우며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석현, 근데 너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냐.”
뭘 확실히 하라는 걸까. 석현 역시도 취기가 제법 돌았기에 생각이 빠릿하게 돌지를 않는다.
“뭔 소리야, 갑자기?”
“너 여친 있다며. 근데 쟤는 왜 데려왔어?”
아무래도 친구들끼리는 솔직한 말이 나오기 때문에, 석현도 복잡했던 속내를 터놓을 수밖에 없었다.
다희한테 먼저 고백을 받아서 사귀게 됐다는 말부터, 생각보다 지금 연애가 즐겁지는 않다는 말까지⋯.
“하 진짜.. 하여튼 증거는 없는데 좀 찝찝하단 말이야. 계속 사귀어도 되는 건가 싶고.”
“어휴, 카사노바 새끼. 너 이거 양다리잖아. 빨리 한쪽 정리해라.”
“신기하네 진짜, 난 여자들이랑 엮이지도 않던데. 두 명이나 좋다고 꼬이는 게 말이나 되냐?”
확실히 한 쪽을 정리하기는 해야 하는데. 석현도 확실히 지금 상황이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친구인 다희냐, 아님 자기한테 꾸준히 애착을 보이는 희지냐 선택을 해야 하고, 남은 쪽에는 깔끔하게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진짜 배부른 고민 아니냐. 군대 가는데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석현아, 진짜 잘 골라라. 괜히 둘 다 욕심내는 건 오바잖아.”
그렇게 석현과 친구들이 한창 여자 얘기를 하며 술잔을 비우고 있는데, 잠들어있던 희지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며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으우.. 오줌 마려어⋯⋯”
“같이 가줄게. 가자.”
“됐서어—”
희지는 창피하니까 오지 말라며, 혼자 다녀온다고 비틀거리며 걸어 나갔다.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에 뭐가 창피하다는 건지 공감은 안 됐지만, 여자 화장실 앞에 남자가 서 있기도 좀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화장실에 보내놓고 석현은 다시 친구들과 대화를 이어갔다.
“야야, 석현아. 근데 쟤랑 어디까지 갔냐?”
“리얼. 보니까 너 엄청 좋아하는 것 같던데.”
“시발, 뭘 그런 걸 물어봐? 말 안 해줄 거니까 물어보지 마라.”
“와— 갑자기 선비 됐네. 화장실 갔다 오기 전에 빨리 들려줘 봐. 궁금하다. 키스도 했음?”
“후, 했다 했어.”
“개부럽네 진짜— 그냥 둘 다 차여라. 억울해서 못 살겠네.”
십새끼, 양다리 걸치지 말고 그냥 뒤져버려—. 자리에서 여자가 빠지자마자 대화의 수위가 바로 높아진다.
희지가 자리에 돌아오기 전까지 그동안 눈치 보며 물어보지 못했던 걸 다 들어보려는 듯이, 온갖 질문이 석현에게 쏟아졌다.
언제 고백받았냐는 얘기, 어디까지 갔냐, 키스는 했냐, 잠도 잤냐는 얘기까지⋯.
아무래도 완전히 노골적인 질문까지는 안 하지만, 선을 지키는 선에서 남자들이 할 만한 대화는 다 나오고 있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한심한 새끼들, 니들이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라며 손사래를 치던 석현은 시간이 지나도 희지가 돌아오지 않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다.
“나 잠깐 찾으러 갔다 올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통로를 지나치며 주변을 훑어본다. 취기가 돌아서 제법 어지럽지만, 그래도 희지를 헷갈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자길 보면 환하게 웃어주는 그 얼굴을 떠올리며, 꽤나 잘 어울렸던 꽃무늬가 그려진 미니 드레스와 블라우스를 입고 나왔던 희지의 차림새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테이블 곳곳을 눈으로 훑으며 왔다 갔다 하기를 여러 번, 웬 모르는 테이블에서 흐느적거리고 있는 희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으우.. 석현아...”
희지는 술이 약한 탓에, 없는 정신에 화장실을 다녀왔지만 자리를 잘못 찾아갔던 것이었다.
석현이 옆자리에 잘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버렸다.
“석현아- 나 어지러..”
“이 사람 뭐야?”
“하으우⋯”
석현이일 거라고 생각해서 대뜸 머리를 기대고 애교를 부려대는 희지 때문에 남자들은 순간 당황했다.
“미친, 이거 꽃뱀 아니야?”
갑자기 자리에 껴서는 몸을 마구 비벼대니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처음에는 당황하던 남자들도, 결국에는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인 데다 원체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흑심을 품었다.
“가슴 존나 크다 진짜. 야야, 콜?”
“데려가자고? 좆되는거 아니냐?”
“지가 좋다고 앵기잖아. 개쩐다 진짜.”
술에 취한 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흐느적거리는 희지의 가슴으로 남자들의 시선이 쏠린다.
석현인 줄 알고 몸을 기대오는 거였지만, 희지의 커다란 젖가슴은 이 질 나쁜 남자들의 음심을 더욱 자극하기만 했다.
그리고 자리에 있던 한 남자가 겁도 없이 희지의 가슴팍에 손을 댄 채 거침없이 주물러대려고 한다.
“시발, 존나 꼴리네.”
“흐읏.. 뭐, 뭐야아...”
그렇게 희롱당하려던 순간, 석현이 모르는 남자들 사이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희지를 발견하고는 단숨에 뛰어왔다.
“야 시발, 일행 온다. 손 치워 병신아.”
“아오.. 존나 아깝네.”
석현이 테이블에 왔을 때는 이미 남자들이 손을 치우고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습관적으로 센 척을 하며 기선제압을 하려 했지만, 석현의 큰 덩치에 본능적으로 위압감을 느끼며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 내 일행이라고, 지금 뭐하고 계셨냐고 따지는 석현에게 시치미를 떼며 능글맞은 웃음으로 변명을 해댄다.
“아이고, 이분이 자꾸 달라붙어서 옷 좀 정리해 드렸습니다. 미안합니다, 예?”
후우⋯. 참자.
석현은 지금은 시비에 휘말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남자들을 한 번 째려본 채 희지를 데리고 나섰다.
“희지야, 일어나 봐. 가자.”
“으응..? 아, 석현이다. 히히.”
낯선 남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끙끙대던 희지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아주 달달하고 끈적이게 바뀌어 간다.
홍조를 띤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르고 마치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눈웃음을 쳐댄다.
그리고 그걸 본 석현은 더욱 화가 났다.
“나와.”
석현은 반갑다고 달려드는 희지의 손을 잡아끌고는 자기 친구들이 있는 테이블을 지나치며 먼저 가보겠다고 작별을 고했다.
“어, 석현 왜 그래?”
“후, 얘 취했어. 미안한데 나 먼저 가봐야겠다. 다음에 보자.”
“어, 어⋯ 그래. 얘 입소할 때 다시 연락 줄게. 잘 가라.”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희지를 잡아끌고 지하에 있는 포차에서 벗어나 계단을 올라가는 석현의 모습은 꼭 화가 난 것만 같았다.
“으읏.. 석현아, 나 손 아퍼⋯ 좀만 천천히 가-”
하아, 하아⋯
고작 계단을 오른 것뿐인데도 숨이 차오른다. 희지는 거친 숨을 고르며 갑자기 왜 그러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에.. 화났어..?”
“후— 너 많이 취했다. 오늘은 그만 가자.”
“더 마실 수 있는데.. 응?”
“지금도 비틀거리면서 뭘 더 마셔? 업혀.”
더 마실 수 있는데, 더 놀고 싶은데. 희지가 아쉬운 마음을 내보였지만, 석현은 그걸 절대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업히라니, 나 혼자 걸어갈 수 있다는 희지의 말도 단호하게 거절해버린다.
“집에 혼자 갈 수 있어— 안 취해써...”
“안돼. 지금 막차도 끊겼어. 모텔 데려다줄 테니까 빨리 업혀.”
아으.. 막차가 끊겼다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싶었지만, 워낙 경황이 없어 시간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석현이 말할 때마다 계속 더 마실 수 있다, 더 놀 수 있다, 혼자 갈 수 있다 떼를 쓰던 희지는 이번에는 모텔에 데려다준다는 말에 바로 고분고분해졌다.
부끄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무겁게 느껴지면 어떡하냐는 수줍은 걱정도 전혀 하지 않은 채로 순식간에 등에 업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