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52화. 가창력이라는 것이 폭발한다
아직 안 취해써어..!
계속 마시겠다고 칭얼대니까 석현이가 팔로 가로막으면서 못 마시게 한다.
몸을 살짝 꿈틀대면서 벗어나려는 척 하는데 못움직이게 하려고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우와.. 팔근육 봐. 너무 좋아.
어떻게 이런 식으로 여자 마음을 콩닥대게 만드는 일만 골라서 하는 걸까?
저런 두꺼운 팔로 날 침대에 밀치고, 허리를 부여잡고 거칠게⋯
자꾸 야한 생각을 하게 된다. 안 되는데. 남들 다 있는 곳에서 자제력을 잃으면 안된단 말이야. 책임져.
혼자 입을 헤 벌리고 바보처럼 구경하고 있는 사이, 다들 술은 어느정도 마셨으니 노래방이나 가자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얘들아, 우리 노래방 콜?”
“코노 말고 그냥 노래방?”
“우리 사람 많아서 코노는 안돼. 다들 괜찮지?”
음.. 여자되고 나서 노래방 간 적 없는데. 노래방은 커녕 노래를 불러본 적 조차 없다.
사실 예전에도 노래는 잘 안 불렀다. 뭔가 부끄럽기도 하고, 실력에 자신이 없기도 하고.
지금은 목소리도 제법 괜찮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 어떨 지는 모르겠어서 걱정이 된다.
노래 못 부른다고 다들 비웃으면 어떡하지? 석현이가 싫어하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아.
아는 노래도 많이 없고, 괜히 분위기 망치는게 아닐까 싶고.
에이 몰라. 그냥 석현이 옆에만 붙어있어야지. 다 필요없고 석현이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걱정같은건 다 떨쳐내버릴 정도로 그게 제일 중요하다.
우리가 간 노래방은 술 마시던 포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코인노래방은 아무래도 실내가 좁은 곳이 많아서 5명이서 놀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겠다 싶어 적당히 큰 노래방을 찾아갔다.
친구들 세 명이서 얘기를 하면서 앞서가고, 석현이는 나를 에스코트해주며 함께 걸어갔다.
같이 걸어가니까 나랑 체격 차이가 나는게 확실히 느껴진다. 원래 이렇게 컸었나? 내 마음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실제로도 석현이가 더 커지는 것만 같다. 너무 듬직해.
그리고 함께 걸어가면 손도 잡고 싶어지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아까 여자친구 얘기가 나왔던 게 좀 신경 쓰여서 그러지는 못했다.
나는 상관없지만, 혹시 석현이 친구들이 석현이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면 안 되잖아.
그래도 옷자락을 잡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마치 수줍은 소녀가 그러는 것처럼 뒤에서 옷을 잡아당기며 말을 걸었다.
“석현아.. 나 노래 자신 없는데..”
“에이,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냥 편하게 놀면 되는 거지.”
안 괜찮아. 너한테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단 말이야. 예쁜 모습, 잘 하는 모습만 봐줬으면 좋겠어.
“너무 못 불러도 놀리면 안돼..?”
별로라도 비웃거나 놀리면 안된다고 당부를 하는데 석현이는 그저 픽 웃기만 하며 괜찮다고만 말했다.
으우..
뭔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진다. 친구분들이 없었으면 더 적극적으로 어프로치할텐데 아쉽기만 하다.
“저기.. 아까 있잖아.”
이 정도는 괜찮겠지. 아까 나한테 희지라고 불러준거, 새 이름 붙여준게 생각나서 고맙다고 얘기를 꺼냈다.
“나 여자이름 지어줘서 고마워.”
“어? 아. 갑자기 생각나더라. 원래 이름 말하기 좀 꺼려하는 것 같아서. 맘대로 지어서 미안해.”
으응, 난 좋기만 한 걸. 좀 갑작스럽긴 했지만 네가 준 이름이라 좋다는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이다.
마치 소중한 물건을 꼬옥 쥐고 있는 것처럼, 희지라는 이름이 따스한 마음으로 감싸진 느낌이 들었다.
괜히 기분이 다시 좋아져서, 몰래 옷자락을 끌어당기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면서 장난을 쳐 본다.
별 것도 아닌데 그냥 이 시간이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데, 문제는 노래방에 도착에서 터졌다.
“민증 보여주세요.”
“네? 아⋯”
민증. 시간이 늦어서 그런가 일행 전부 신분증을 보여달라며 카운터에서 우리를 멈춰세웠다.
다른 친구분들은 마스크를 벗고 신분증을 보여준 뒤 통과하는데, 문제는 나였다.
어떡하지. 신분증이 지갑 안에 있기는 한데.. 문제는 내 예전 신상이 그대로 써있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이름도 희지가 아니고, 얼굴도 지금이랑 다르고, 주민번호도 2로 시작하는게 아니고⋯.
어떡해? 내가 원래 여자가 아니었다는게 알려지게 되면.. 상상도 하기 싫다.
석현이는 애초에 알고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사실을 알게되면 나 뿐만이 아니라 석현이한테도 이상한 시선이 쏟아질거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만 한다.
보통 얼굴 보고 적당히 어리면 신분증같은건 확인 안한다고들 하던데, 너무 깐깐하게 검사하는 거잖아. 그냥 놓고왔다고 말하면 통과시켜 줄까?
어떻게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우물쭈물하는데 석현이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왜 그래?”
“아.. 석현아, 나 신분증.. 그거..”
“어? 아.”
나 어떻게 해야 돼?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내며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데, 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석현이가 또다시 재치있게 나서주었다.
“음.. 너 신분증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았어?”
“응...? 아, 응. 잃어버렸어. 저기요, 저 신분증을 잃어버려서 지금 없는데요..”
안 갖고 있다고 하니까 카운터 직원은 순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하다못해 학생증, 아니면 카메라로 찍어둔 거라도 없냐고 물어봤다.
“아뇨, 어떻게 좀 안될까요? 죄송해요 진짜.”
죄송하다고, 그냥 들여보내 주시면 안되냐고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니까 직원은 조금 고민을 하더니 그냥 빨리 들어가라면서 보내주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머뭇거리는 날 위해 대신 나서준 석현이 덕분에 무사히 검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직원도 유도리있는 것 같고 정말 다행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동안 잘 생각하지 않던 내 신분에 대한 문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 내가 희지라는 이름을 쓴다고 해도 신분증이랑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사진도 다른데.
군대도.. 안 갈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할지 걱정되고 더 나아가서 앞으로도 신분 문제가 발목을 잡을 거라고 생각하니 골치아프다.
아니, 왜 이런 문제를 고민도 안 하고 있었지는지 갑자기 의문이 든다.
내가 왜 이렇게 됐더라. 분명 여신이랑 악마.. 이름도 참 우스운 정체모를 두 여자 때문에 여자로 변해버린 건데.
처음에 말할 때 미션을 끝까지 다 하면 원래대로 돌려준다고 했었나?
이거 중요한 거 아니야? 왜 이런걸 잊고 있었지?
모르겠다. 처음엔 분명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고, 또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근데 지금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잖아..? 나 요즘 행복한걸. 석현이한테 안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입을 맞추고, 다리를 벌리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희열을 느끼고⋯.
그냥.. 지금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면 내 소중한 이름.. 석현이가 준 희지라는 이름도 잃어버리는 거잖아.
으—
머리가 지끈 아파진다. 술을 마셔서 그런 걸까.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냥, 이런 건 지금 생각하지 않고 싶다. 다시 묻어두자.
※
‘음치의 서러움을 아시나요?’
‘제 차례가 다가올 수록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답니다.’
걱정된다. 긴장 좀 풀어보려고 본 적도 없는 가상의 인방을 흉내 내며 일인 독백을 해보지만 사실 큰 도움은 안된다.
술 마셔도 나름 젠틀하던 친구분들은 노래 앞에서는 얄짤없었다.
“아, 한 번 씩은 다 불러야죠! 예약하세요—!”
하하. 망했다.
큰 일 났다는 생각을 하며 하는 수 없이 그나마 쉬울 것 같다는 노래를 골랐다.
나름 머리를 써서, 지금 목소리랑 어울리게 미성을 쓰는 노래이면서도 왠지 부르기 편할 것 같은 걸로.
노래 못 부르는게 덜 티나도록 그나마 템포가 느린 노래로... 음, 이게 아닌가? 빠른 노래가 음치한테 유리한건지 불리한건지 잘 모르겠다. 으아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심장이 콩, 마이크가 넘어갈 때마다 심장이 콩, 하면서 내 차례가 오기만을.. 안기다렸다.
아으, 그냥 화장실로 도망가 버릴까? 내 차례 지나가면 안 시키지 않을까?
차라리 석현이한테 부탁하면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응, 석현아?
석현아.. 노는데 정신 팔려있는 거야..?
이게 인터넷 채팅이었으면 힝, 하면서 우는 이모티콘을 쓰고 싶었을 심정이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다.
“저기, 저 잘 못 불러도 웃지 말아요?”
미리 연막을 좀 쳐놓는데, 남의 마음도 모르고 다들 좋다며 박수를 치고 분위기를 띄워댄다.
만화였으면 이 바보들- 하면서 머리에 꿀밤을 쥐어박았을 상황인데. 에휴.
그래도 부르긴 해야겠지. 이미 노래가 시작되고 첫 음이 울려퍼져서 어쩔수 없게 되었다.
가사를 잘 모른다면서 등을 돌리고 화면을 보면서 반주를 기다리고.. 용기를 내어 첫 소절을 부른다.
“네가 아무리 지금 날 좋아한다 그래도, 그건 지금 뿐일지도 몰라. 왜냐하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맨 첫부분의 나레이션을 부른다.
가사를 놓칠까봐 등지고 있어서 반응을 확인할 수는 없는데, 어쩐지 방 안이 무척이나 조용해진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너무 못 불러서 그런 걸까. 내 목소리 이상한가 봐. 그치만, 등을 돌려서 얼굴을 보는게 더 무섭다.
으..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꾹 참고 계속 부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춘 채로 한 소절 한 소절을 부르고,
“세상은 분명히 변하겠지, 우리의 생각들도 달라지겠지—”
하이라이트까지 성대를 어색하게 쥐어짜며 부르고 난 뒤,
“어른들은 항상 내게 말하지- 넌 아직도 모르고 있는 일이 더 많다고—”
마지막 소절까지 부른 순간,
리액션이라는 것이 폭발했다.
“와, 개잘불러 진짜—!”
“목소리 미쳤네. 와..”
뭐야, 다들 반응이 너무 좋아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나 진짜 못 부른것 같아서,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봤는데 목소리가 좋다고, 엄청 잘부른다고 칭찬 세례가 쏟아진다.
“어..어..? 감사합니다..? 아하하⋯”
이거 그 무슨, 접대용 칭찬같은거 아니지? 진짜 잘 부른거 맞나? 그럴 리가 없는데..?
도저히 못믿겠는 반응 뿐이라 석현이는 어떤가 조심스럽게 쳐다봤는데 얘는 반응이 더 특이했다.
표정 뭐야.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모르겠다.
왠지 언짢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불렀다는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계속 듣고 싶어하는 표정 같기도 하고, 못마땅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마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한테 노래를 불러줄 때 질투하는 표정 같기도 하고.
석현이 속마음을 알 수는 없었기에 멋쩍게 웃으면서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