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51화. 옆자리 (3)
술이 들어가니까 다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껴있어서 어색해질까 봐 걱정했던 것도 무색하게, 다들 고등학교 때의 추억을 얘기한다거나 최근 학교 생활에 대해 떠드는 등 일상적인 이야기가 많이 오갔다.
그리고 군대 가려고 머리 짧게 자른 친구분도 분위기를 타면서 같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한참 덥거나 추울때 가는 것보다 지금이 나을 수도 있다는 얘기부터 훈련소 얘기, 주특기 얘기, 군대 괴담 얘기⋯.
아무래도 오늘 주인공이기 때문에 주로 군대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얘기들을 듣다 보니까 문득 나는 어떻게 되는 건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일단 지금 주민번호가 2가 아니라서 좀 애매한데.. 아무래도 여자들은 군대를 안가니까 무언가 행정적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게 아닐까.
에이, 다음에 생각하자.
조금씩 마시긴 했지만 나 역시도 슬슬 취기가 돌아서 복잡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도 석현이 옆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듣다 보니 시간이 잘 갔다.
솔직히 다들 원래 알던 사이인데 거기에 껴있는 내가 할 말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냥 중간에 맞장구를 가끔 쳐주고, 남자들 사이에 껴있는 홍일점 역할을 하는 걸로 충분했다.
그래도 역시나 신경이 쓰였던 걸까. 친구분들은 가끔씩 나한테도 말을 걸었고, 이전까지는 낯을 가렸던 머리 짧은 친구분도 나한테 할 말이 있는듯 했다.
“저, 희지씨⋯”
“네?”
자그마한 소주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기면서 얘기를 듣고 있는데, 군대 가는 친구분이 나한테 말을 걸었다.
“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라니. 갑자기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러는 걸까.
지금까지 살펴본 걸로는 다들 착한 사람들이라서 곤란한 부탁을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난처한 상황이 될까 봐 살짝 걱정이 됐다.
“저 힘내라고 화이팅 한 번만 더 해주실 수 있습니까...!”
“네? 아, 네. 네. 그럼요.”
난 또 뭐라고. 아까 전에 화이팅 해줬을 때 엄청 얼굴이 빨갛게 변하던데, 그게 그렇게 좋았나 보다.
진짜 남중남고인가 봐. 그런 불쌍한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자비심같은게 막 샘솟는 것 같았다.
“군대 잘 다녀오셔야 해요..! 항상 응원할게요. 화이팅—!”
석현이 말고는 애교 부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친구인데다가 군대 간다니까 서비스를 좀 해줬다.
최대한 상냥하고 귀엽게. 아자아자 화이팅을 해주며 잘 갔다 오라고 격려를 해주니까 엄청 좋아한다.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음.. 이게 뭐라고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말투도 특이해. 리액션이 너무 크니까 오히려 내가 더 민망하다.
“와, 이 새끼 진짜 쪽팔리네—”
다른 친구들도 오버 좀 하지 말라면서, 여자랑 인연 없었던 거 다 티 난다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이 찐따쉑, 너 훈련소 가면 인편 써줄 사람은 있냐?”
“인편? 당연히 있지— 아니다, 니네 말고는 없을 것 같다. 후⋯”
인편이 무슨 뜻이지. 군대에 대해서 워낙 관심 없이 살아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줄임말같기도 하고.
“저어.. 죄송한데 인편이 뭐에요?”
“아. 희지 씨는 여자라서 잘 모를 수도 있겠네요. 인터넷 편지라고 군대 간 사람들한테—”
훈련소나 신교대 같은 곳에 있는 신병들에게 외부에서 편지를 보낼 수 있는 거라고 한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받을 사람을 고른 후에 게시판에 글 쓰는 것처럼 하면 된다고.
“아.. 그럼 아무나 보낼 수 있는 건가요?”
“그럼요. 저도 직접 해보진 않았는데 다들 쉽다고 하더라구요. 글 쓰는 것처럼 사진도 같이 올릴 수 있구요.”
아하. 그러니까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글을 쓰면 그걸 프린트해서 편지처럼 보여주는 거구나.
확실히 그런 걸 받으면 답답한 환경에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줄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편지를 못 받는 사람은 좀 울적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남들이랑 비교도 될 거고, 아무래도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 테니까⋯.
마침 친구분들도 그런 걸 걱정했는지, 군대 가는 친구를 툭툭 치면서 무언가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야, 너 아는 여자 한 명도 없잖아. 부탁해봐.”
“아씨- 오늘 처음 만났는데 뭘 부탁해. 돌았냐.”
“하여튼 찐다쉑.. 내가 대신 말한다?”
뭘 부탁한다는 걸까. 여자 얘기가 나오는 걸 보니까 나랑 관련된 것 같기도 하고.
“저, 희지 씨.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네, 말씀하세요.”
오늘 왠지 부탁을 자주 받게 되는 것 같다. 괜히 석현이를 한 번 쳐다보고 괜찮다고 일단 말해보라고 했다.
“얘 찐따라서 그러는데, 군대 가면 인편 좀 써주실 수 있나요?”
“아, 무슨 찐따야. 좀.”
무슨 부탁인가 했더니 인편 써달라는 거구나. 음.. TV 같은데서 보기로는 군대 있을때 여자한테 연락이 오면 확실히 부대 내에서 관심을 끌게 되는 것 같긴 하다.
내가 써주면 군 생활에 도움이 되는 건가? 근데 석현이 말고 다른 사람한테 정성을 쏟고 싶지는 않은데.
다른 사람들, 특히 석현이가 아닌 다른 남자한테 내 마음을 나눠주기는 싫다.
지금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잘 다녀오라고 격려해주는 것도 이 사람들이 석현이 친구들이니까, 그 사이에 잘 녹아들어서 석현이가 난처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거란 말이야.
순간적으로 석현이를 힐끔 쳐다보는데 내가 인편을 서주는 거에 대해서 딱히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남녀 상관 없이 친구 사이에는 군대 가는 사람들한테 잘 대해줘야 하는게 맞긴 한데⋯.
그래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아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편지를 써주겠다고 했다.
“그럼요, 석현이 친구분인데 그정도는 해야죠! 석현이한테 물어봐서 군대 가시면 인편 써드릴게요!”
“이야 복받았네. 희지 씨 같은 분한테 인편도 받고—”
아하하⋯ 나중에 석현이한테 물어봐서 한 번 정도는 써주기는 해야겠다.
인편 쓰는 얘기를 하면서 술이 오고 가는데 분위기는 계속 좋아지기만 했다.
왠지 날 신경 쓰고 있어서 분위기가 좋게 유지되는 것 같기도 하고.
난 그런 것보다 석현이가 날 바라보고 신경 써주기를 원하고 있었지만 석현이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얘기하기에 바빠 보였다. 미워. 바보.
자기들 고등학교 때 얘기를 하며 핸드폰 앨범을 구경하는데, 다같이 사진이나 찍자는 얘기가 나왔다.
“얘들아. 얘 가기 전에 기념으로 사진이나 한 번 찍자.”
아.. 나도 찍어야 하는 건가? 원래 셀카도 그렇고 사진 같은 거 잘 안 찍었는데.
근데 또 나 혼자 빠지기는 좀 그런 분위기여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최대한 석현이랑 몸을 붙여 대고, 가까운 사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얼굴 각도를 잡아 본다.
카메라 안에 5명이 다 잡히려면 몸을 틀어야 했기 때문에, 은근슬쩍 석현이한테 몸을 붙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손도 살짝 얹어 보고. 아.. 손 엄청 커.
하나 둘 셋- 하면서 사진을 찍는데, 다들 자기들 얼굴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관심도 없고 갑자기 내 칭찬을 하기에 바빠졌다.
“와, 사진 진짜 잘 나왔다. 보세요—”
“아.. 고마워요.”
내가 보기엔 못생기게 나온 것 같은데, 다들 잘 나왔다면서 난리다.
석현이도 자꾸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게 너무 부끄럽다. 보지마⋯ 이상하게 나왔단 말이야.
“근데 희지 씨 인방에 누구 닮지 않았어요?”
“인방이요?”
“네- 그, 아.. 누구더라. 생각이 안 나네.”
갑자기 인방이라니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인방 안봐서 말해도 모른단 말이야.
석현이는 내가 누굴 닮았다는 얘기가 나오니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 아무 말도 안하는 거지. 자꾸 나 안챙겨주면 섭섭한데. 바보.
“죄송한데 제가 인방을 안봐서요. 많이 닮았나요? 제가 아는 분은 ‘오늘도 살아간다’의 ‘백아연’ 님 말고는 없어서요⋯”
예전에 개강했을때 석현이가 자기가 보는 인방이라면서, 은색 머리칼을 한 여자가 나오는 링크를 보내준 적이 있었다.
그거 말고는 딱히 인방을 즐겨 보질 않아서 누구 닮았다고 말해도 딱히 상상이 안 된다.
“아, 그 분도 예쁘긴 한데⋯ 희지 씨도 방송 하시면 인기 엄청 많을걸요?”
“오 인정. 근데 방송하면 불편한거 엄청 많다던데. 연애도 못하지 않나?”
자기들끼리 내가 누굴 닮았다, 방송 하면 인기 많겠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연애 얘기로 넘어간다.
“하긴 연애하다가 걸리면 괜히 욕먹는다더라. 사생활 같은거 좀 불편하긴 하겠다.”
“나였으면 방송 하라고 해도 절대 못할 것 같은데? 어떻게 참냐. 그쵸, 희지 씨?”
“아⋯? 네?”
“그래도 희지 씨 방송하면 저희가 무조건 봐드릴게요.”
“오올- 근데 희지 씨는 어차피 남자친구 때문에 방송 못하시지 않을까? 남친이 싫어할 것 같은데.”
왜 갑자기 내 연애 얘기야. 심지어는 마치 내가 남자친구가 있는 것처럼 가정을 하고 얘기를 하는데 바로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아녜요-! 저 남자친구 없어요!”
“아.. 있으실 줄 알고. 하하하⋯”
“와, 무조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좋아하는 사람도 없어요?”
다들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슬슬 사적인 것도 물어보기 시작해서 불편해진다. 그래도 석현이 얼굴 보고 참아야지.
그나저나 좋아하는 사람.. 당연히 있다. 눈을 뜨면 바로 생각나는 사람. 그리고 생각하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사람.
“있어요...”
있다고 대답하면서 석현이를 은근히 바라보니까 친구분들의 반응이 뜨거워졌다.
“와 미친— 진짜에요?”
“부럽네 진짜- 석현아, 너 뭐하고 다니길래 이런 분이랑 썸 타냐?”
부끄러워. 거의 공개고백 하는 느낌이 되어버렸잖아. 나도 그렇고 석현이도 갑자기 이렇게 되어버려서 헛기침만 하면서 딴청을 피웠다.
그런데 묘한 분위기가 생기려는 와중에 갑자기 군대 가는 친구분이 찬물을 끼얹었다.
“어? 근데 석현이 여친 있지 않냐?”
“야야, 눈치 좀 시발..”
“미친 아다새끼, 입 좀 다물어—”
석현이 여자친구.. 원래는 나였어야 하는데.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져서 입술을 앙다무니까 다른 친구들이 팔로 툭툭 치며 눈치를 줘댄다.
후우.
“저, 술 한 잔 더 주세요.”
홍다희만 생각하면 치미는 짜증 때문에 술잔을 채워달라고 확 내밀어버렸다.
그리고 술을 단숨에 들이키는데 다들 어색한 웃음만 지으며 싸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애썼다.
으으.. 너무 써.
괜히 나 때문에 어색해진 것 같아서 괜찮으니까 다른 얘기 하자고, 술이나 더 달라고 재촉했다.
안그래도 취했는데 자꾸 마시니까 어질어질하고..
처음에는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석현이도, 내가 계속 술잔을 비우기 시작하자 그만 마시는게 좋지 않겠냐며 말렸다.
싫어. 계속 마실거야. 더 마실거야.
“안 취해써어어..! 미워어, 진짜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