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1화 〉50화. 옆자리 (2) (51/80)



〈 51화 〉50화. 옆자리 (2)

머리 짧은 사람, 머리 염색한 사람. 머리 넘긴 사람.

석현이를 부른 테이블에는 세 명이 먼저 앉아 있었다.



소심하게 고개를 푹 숙인 채 석현이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니까 석현이 친구 분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석현 올만—”
“왔냐.”
“석현 하이~”


남자들이 다 그렇듯 의미 모를 하이파이브를  번씩 하며 석현이랑 인사를 주고 받는다.

난 아는 사이가 아니라  하기가 뻘줌해서 그걸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새끼, 뭔데 벌써 군대를 가?”
“야야 일단 앉어—”

벌써 간단한 안주를 먹고 있었던 건지 테이블이 조금은 차 있다.


친구 분들이 석현이 앉으라고 자리를 내주면서 그제서야 옆에 서있던 나에게도 시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근데 옆에 누구⋯?”

옆에 서있는 여자는 누구냐. 나랑 석현이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한다.

하기야 군대 가는 친구 환송해준다고 몇  모이는 건데 거기에 내가 껴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같아도 갑자기 모르는 여자가 나타나면 당황했을 것 같다.

“아, 저기.. 저 석현이 친구인데요⋯”

우물쭈물하면서 대답하니까 석현이가  어깨에 살짝 손을 얹으며 대학교 친구라고 말을 덧붙여 주었다.

“얘 학교 친구인데 오고 싶대서 데려왔어. 괜찮지?”


“어? 어, 괜찮지. 일단 앉으세요.”
“사람 많으면 재밌고 좋지? 나도 상관없음~”
아, 다행이다. 혹시 싫어하면 어쩔까 걱정이 됐는데 합석해도 된다고 하니까 마음이  놓였다.


친구분들이 말하는  들어보니까 머리 넘긴 사람은 일단 앉으라며 젠틀하게 말했고, 염색한 사람은 활달하게 말하며 나를 환영해주었다.


그리고 머리 짧은 사람은⋯ 이 사람 무조건 쑥맥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부끄러워 했다.

나는 석현이 옆에 앉아서 친구분들 얼굴을 둘러보는데 머리 짧은 친구분은 자꾸만 시선을 피하고 어쩔 줄 몰라했다.



저기.. 그쪽이 그러면 저도 민망한데요.


남중남고라도 나온 걸까? 그래서 여자인 나랑 눈도 잘 못 마주치고 말도 한 마디 못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남중남고군대라니.. 갑자기 좀 불쌍해졌다. 설마 공대 아니겠지. 아직 학기 중인데 군대 가는 걸 보면 잘 모르겠다. 그건 그거고, 어쩐지 힘내라고 응원을 해주고 싶은걸.



“저기요..?”


“네, 넷..!!?”




넷? 그쪽 아직 군대 가신 거 아닌데요. 너무 군기가 바짝 든 것 같은 목소리로 크게 대답해서 그만 웃음이 픽 나와버렸다.

그리고 석현이랑 다른 친구들도 그게 웃겼는데 이 새끼 갑자기 뭐냐며 놀려댔다.



“푸흡.. 아, 죄송해요—”


“왜, 왜 불러렸습니깟...!!”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당황하면서 허둥지둥하는데, 불러렸습냐고 이상한 말을 하는게 너무 재밌고 귀엽다.


어떡해. 진짜  때문에 긴장한거야?

놀리려던 건 아닌데 순식간에 웃음거리로 만들고 말았다. 나보다 더 바보가 있었구나.




“아하하⋯ 이번에 군대 가시는 거 맞죠?”

“넵!!”

“석현이 친구분이 군대 가신대서 응원해드릴려고 왔거든요.”

사실 그냥 석현이 옆에 붙어있고 싶어서 온 거지만, 예의상이라도 응원해주려고 온 거라고 말했다.

좋은게 좋은 거라고, 이러면 친구들 사이에서 인식이  좋아질테니 석현이한테도 도움이  지도 모르잖아.


당신 응원해주러 왔다— 그렇게 말하니까 머리 짧은 친구분이 눈을 크게 뜨고는 자기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를 말입니깟?!”



네. 그쪽이요. 군대 갈 때 머리 자르는데 여기서 짧은 사람은 그쪽밖에 없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먹을 꽈악 쥐고는 머리 짧은 친구분을 향해 화이팅 자세를 했다.



“힘내세요..! 화이띵!”

으아, 갑자기 안 하던걸 하려니까 어색하다.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겠지?

근데 왜 저래?


화이팅- 외치면서 힘껏 웃는 표정을 짓는데 머리 짧은 친구분의 표정이 다시 달아오르면서 입이 떡 벌어지고—


의자에서 드르륵 소리가 나도록 박차고 일어나더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차렷 자세를 하고서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쳐댔다.


“영-광입니닷—!!!!”




히익. 왜 저래??


머릿속에 물음표를 마구 띄워가며, 남중남고 출신이라 내성이 없다보다고 마음대로 단정짓는 동안 주변 친구들이 한 소리씩 거들었다.

“어휴, 병신.” “쪽팔린다 진짜. 앉어 새끼야.”


미안해요, 이름 모를 머리 짧은 친구씨.



“그나저나 저희 통성명도 안했네요? 석현이 학교 친구라고 하셨죠?”


그러고보니 진작에 합석했는데도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다. 나 근데 처음 보는 사람 이름 기억하는거 잘 못하는데.


초면인 사람이랑 아예 말도 못하고 그런건 아닌데 생각보다 이름과 얼굴을 외우는게 오래 걸렸던 기억이 난다.

“아, 네! 저 이름 박희..”
희—
이름을 말하려는데 순간 멈칫하게 된다. 아.. 내 이름 말해도 되는 건가?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 이름을 말하는  왠지 꺼림칙해진다. 나쁜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말하는 그런 느낌은 절대 아니지만, 왠지 내가 여자가  상태라는 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에 대해서는 고민을 하지 않고 있었구나.


얼굴이 바뀌고 몸이 바뀌어 가는 동안 그렇게나 고통스러워했는데, 정작 이름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쓰던 이름, 내 예전 모습에서 이어지는 얼마 안 되는 증거 중 하나.

그런 이름을 여자인 내가 밝히고 다녀도 되는 걸까?


왠지 원래 이름을 말하면 안   같아서, 이름을 말해버리면 마치 원래 내 모습이 오염되어 버리는 것 같아서 꺼려진다.

아, 정말.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혼자 끙끙대면서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그걸 이상하게 보던 석현이가 순간 눈치를 채고는 말을 가로챘다.




“아, 얘 희지. 박희지”


희지—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나 대신에 나를 소개해주면서 희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하. 그러시구나. 저는 김—”


 땡땡 입니다. 석현이가  대신 소개해주고, 이어서 친구분들이 자기는 누구 누구라고 이름을 말해 주었다.

근데 미안하게도 이름이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원래부터 한 번 듣고 기억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석현이가 나한테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이 그쪽에  팔려있었다.

희지.. 희지....


석현이가 이름을 지어줬다. 여자인 나를 위한 이름.


내가 난처해하는 걸 그새 눈치채고 재빠르게 도와줬다는  너무 고맙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한테 이름을 받았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희지라는 이름을 받은 순간부터, 나는 석현이라는 세상 안에 완전히 들어와버렸다.


살며시 웃음을 짓게 된다. 얼굴의 홍조를 가리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이게 되지만, 가슴이 콩콩 뛰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을 지도 모른다.


‘희지⋯’



그렇게 손을 꾸욱 움켜쥔 채로, 석현이한테 받은 소중한 이름을 수도 없이 되뇌이면서 마음 속에 꼬옥 담아두었다.






“야, 우리 왔는데 안주나  시키자.”


“당연하지. 여기 닭발 맛있는데 콜?”


“닭발 좋지~”


“근데 희지 씨 물어봐야 하는  아니야?”



아, 닭발..?
닭발 괜찮은데. 쫄깃쫄깃한 맛도 있고 양념이 매콤한 게 맛있어서 예전부터 꽤나 즐겨 먹었다.


순식간에 침이 고이는 걸 느끼고 있는데 석현이가 날 쳐다보며 먹을  있냐고 물어본다.



“너 닭발 먹을  있어?”

“응, 당연하지! 나 완전 잘 먹어.”



그냥 먹는 것도 아니고 완전 잘 먹어.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석현이 표정이 묘해진다.



“왜..?”

“너  마실때도 완전 잘 먹는다고 그러지 않았어?”

“그랬지?”


“그리고 몇 잔 마시더니 바로 취했고?”

“응. 그랬지.”


“그리고 지금 닭발.. 완전 잘 먹는다고?”




아. 설마 이것도 내 ‘완전 잘 먹어’ 시리즈에 포함될까봐 못 믿는 거야?

아닌데. 닭발 진짜 잘 먹는데. 갑자기 막 섭섭해지는데.

아닌가? 여자가 되고 나서는 좀 매운걸 먹었던 기억이 딱히 없는데, 설마 못 먹는건 아니겠지.

닭발 못 먹으면 인생의 절반은 손해 보는 건데.





다행히 갑자기 매운 걸 못 먹게 되었다던가 그러지는 않은  같았다.


여전히 맛있어. 짜릿해. 늘 최고야.

“와- 희지 씨 닭발 잘 드시네요?”


“네, 저 이거 좋아해요—”


“의외네요? 여자분들 보통 징그럽다고 잘 안 먹지 않나?”



어..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원래 여자가 아니어서 닭발 잘 먹는 건가?  모르겠는걸. 뭐 지금 여자인 내가 닭발  먹고 있으니까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내가 닭발을  먹고 있는 것과 별개로, 역시 이런 자리에는 술이 빠질 수 없었다.

나랑 석현이까지 다섯 사람이나 되어서 시킨 양도 제법 많고, 그에 맞춰서 소주도 테이블에 여러 병이나 놓이게 되었다.


매운걸 먹다보니 다들 술이 당기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예의상 술 한잔은 받아두었고.

“야야, 우리 사람도 적당한데 술게임이나 할까?”



한 두잔 들어가고 나서 부터는 슬슬 분위기를 올려야겠다 싶은지 머리 염색한 친구분이 운을 띄웠다.




근데 나 술게임 잘 못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잘 못하는게 아니라 아예 못한다.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해.

원래 같았으면 대학교 올라오면서 엠티나 오티 뒤풀이를 하며 술게임을 배웠을 것이다.


근데 신종 바이러스 때문에 그런 기회는 싹 날아가버렸고.. 난 술찐이 되어버렸다. 술찐은 당연히 술게임 못하고.


그리고 내가 술을 못 한다는 걸  석현이가 술게임 하자는 걸 말리면서 내 얘기를 했다.



“음.. 얘 술 못해서 안될 것 같은데?”
“아냐..! 나 잘 할 수 있어! 저   알아요!”



나 때문에 술게임 못해서 분위기 식으면 안되잖아. 석현이한테 피해주고 싶지 않은데, 이런 식으로 분위기 망치면 미안해서 어떡해.


그런 생각으로  마실 수 있다며, 할 줄도 모르는 술게임을 하겠다고 말했지만 친구분들도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어.. 저희 때문에 억지로 안 해도 돼요.”

“인정. 술 못한다는 여자 억지로 먹이는건 오바지~”
“죄송해요 진짜⋯”

다행히 석현이 친구분들은 고맙게도 억지로 술게임을 할 필요는 없다면서 그냥 안주나 마저 먹자고 그랬다.


그러면서 요즘은 사회에서 술을 강권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기야 우리 사이에 굳이 술게임 없어도 되지 않냐는 식의 말이 오갔다.


그리고 석현이 친구들이 술게임을 해봤을 때의 썰을 푸는 걸 들었다.

지하철 게임을 해본 적이 있는데, 갑자기 지역이 러시아로 바뀌더니 블라디보스토크 역, 상트페테르부르크 역, 하바롭스크  같은 이름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술 한 병을 그대로 원샷할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였다.


우와.. 내가 그런거 당했으면 역 이름을 몇  말하지도 못하고 바로 뻗었을지도 모른다.




 다행이야.

분위기 살려보겠다고 억지로 강권하거나 나 혼자 여자라고 골릴려고 하지 않는 걸 보니, 다들 좋은 사람인 것 같다.

하긴 석현이가 이렇게나 다정하고 좋은 남자인데  친구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술게임 없이 분위기가 잘 달아오를 무렵, 다들 조금씩 술에 취해갔다.


나는 술을 못한다는 말에, 다들 못 마시게 해서 아주 조금씩만 홀짝거렸기 때문에 일행이 취해가는 걸 지켜볼 수 있었다.

남자들이 다들 그렇듯 중간중간 욕을 섞어가며, 살짝 음담패설이 나오려다가도 나를 신경쓰며 알아서들 자제하고—


재밌는 건 머리 짧은 친구분, 그러니까 군대 간다는 당사자는 아직까지도 나를 보면 좀 부끄러워 한다는 거였다.

그렇게 쑥맥이면 여자랑 평생  사귈 텐데. 너무 낯을 가리면 안 좋다고 말하려다가도, 나도 솔직히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냥 살짝 장난치는 겸 중간중간 눈을 마주치면서 쳐다보기만 했고, 대부분은 석현이 옆자리에 꼬옥 붙어 앉아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석현이의 목소리를 듣는데 온 신경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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