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9화 〉48화. 만나다 (49/80)



〈 49화 〉48화. 만나다

기다리는 거 지루해.


차단 언제 풀어줄 거야?




석현이가 적당히 때를 봐서 차단을 풀어준다고 했었지만, 기약 없이 마냥 기다리는  썩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확 찾아가 버릴까 하다가도 괜히 석현이가 곤란해할까  그러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같이 즐기던 게임에 들어가 봐도, 최근 접속일이 꽤나 지나있었다.

SNS 같은 거도 가봤는데⋯ 이건 보지 말걸 그랬다. 둘이서 같이 찍은 사진을 올려놔서 무척 속상했다.


저 옆엔 내가 있어야 하는데. 내가 더 잘 어울릴 텐데.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옆에 있는 나쁜년에 대한 질투심이 마구 생겨났다.



그런 식으로 어떻게 연락이 닿지는 않을지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외로움을 달래고자 혼자 몸을 위로하기를 며칠—

아무래도 혼자서는 잘 해소되질 않았다. 역시 장난감은 장난감일 뿐인 걸까.



문 앞에 택배가  있는걸 보고, 부끄러운 마음에 얼른  안에 들여다 놨는데⋯ 다행히도 비밀스럽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작은 전지가 들어가는 거였고, 몇 단계에 걸쳐 강도를 설정할 수 있다던가 진동의 패턴을 바꿀 수 있는 등의 기능이 있었다.




근데 그걸론 내 몸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기엔 부족했다. 이미 남자를 알아버렸는데 이런 거로는 모자란걸⋯.




한편, 머릿속에서 종종 악마년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날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고 있었다.

자꾸만 본격적인 장난감들을 사라면서 그러면 자위가 더 기분 좋아질 거라고 속삭이고⋯ 심지어는 그냥 아무 남자나 꼬셔서 원나잇을 하라던가, 다른 남자를 찾아보라던가⋯



하지만 들을 가치도 없는 말들이라 무시해버렸다. 여간 성가신  아니지만, 저런 허접한 유혹에 넘어갈 필요는 없었다.


그냥 석현이랑 다시 이어지기만 하면  잘 풀릴 거였으니까.






서운해. 보고 싶어. 안기고 싶어.

며칠이나 지났을까. 그렇게 울상을 지으면서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데 드디어 친구 목록에 석현이가 다시 나타났다.







석현은 최근 자기와 관련된 두 명의 여자 때문에 은근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절친이었다가 어느 순간 섹스까지 하게  희준. 워낙 마음이 잘 통했었고, 어디 가서 이런 여자를 보기도 어렵겠다 싶을 정도로 예뻐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길 잊어달라는 말과 함께 연락을 피해서 어쩔 수 없이 포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고백받아서 사귀게 된 여자친구 다희. 다희 역시 꽤나 예쁘고 몸매도 좋아서 어디 나가서 선망받을 만한 여자였지만, 그녀와는 생각보다 잘 맞질 않았다.

‘자기는 왜 이런 것까지 간섭을 해?’



나이 차이가 나서 그런 걸까.
그저 남자친구로서 관심을 보이는 것인데 다희는 생각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을 했다.

핸드폰에 다른 남자와 찍은 사진이 종종 보이고,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는 게 궁금해서 살짝 물어본 것인데.

그러면서도 정작 다희는 석현이 희준과 연락을 나누지 못하게 했다.

확실히 석현이 생각하기에도 좀 과하게 연락이 왔던 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차단을 해야 할 것까지 있나 싶었다.




‘석현아.. 나 차단 풀어주면 안 돼?’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꼭 울 것만 같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자길 올려다보는 희준이 너무 안쓰러웠다.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좋아한다면서 몸을 부닥쳐오고⋯.

솔직히 한창 팔팔한 남자로서 참기 어려웠다. 자길 좋아한다면서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다가오는데—



그날 아침과 다르게 갑자기 바뀐 태도가 좀 의아했고, 여자친구인 다희 생각에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다희가 언짢아할 것을 고려해서 차단을 쉽게 풀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까지는.

‘자기야, 미안. 고딩  동창들이 보자 그래서. 응-? 아.. 당연히 남자도 있지?’



하⋯. 진작에 데이트하기로 약속까지 잡아 놨는데, 고등학교 친구들을 보겠다고 파토를 내버렸다.




주말이고 모처럼 날도 좋은데⋯.



혹시나 해서 누구 만나는 거냐고 물어봤는데, 여자랑 남자랑  있다고 애매모호하게 대답하는 게 좀 찝찝했다.


여자 무리에 남자가 있는  아니라, 그 반대인 느낌⋯.





친구를 만나겠다는데 너무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러면서도 석현은 찝찝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내가 쪼잔하게 구는 건가?

어휴-
친구 불러서 밥이나 사줘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기분 좀 풀려고 차단돼있던 희준의 연락처를 다시 활성화해버렸다.

여자친구도 친구 만나러 갔으니까, 나도 내 친구 정도는 만나도 되는 거겠지—.

지난번에 다짜고짜 입으로 해줬던 거는, 좀 우발적인 사고라고 생각하고 조심하면 된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어쩌면 은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아..!”


차단이 풀리자마자 거의 바로 알아차린  같다. 실시간으로 석현이랑 이어져 있는  같아서 기뻤다.

바로 톡을 보낼까 하다가 그냥 전화를 걸어버렸다. 목소리 너무 듣고 싶어.

—“석현아..!”

—어⋯ 잘 지냈어? 별일 없고?




아.. 목소리 너무 좋아. 상냥해서 좋아. 저음이라서 가슴이 막 울려. 몸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아. 심장이 콩콩거려♡



—오늘 시간 돼? 저녁에 사줄까?




앗..!

—“응!! 무조건 돼! 아무 때나 돼! 지금이라도 당장 만날 수 있어..!”


—어.. 야, 지금 말고 좀 있다 저녁에 만나자. 5시쯤 어때?


좋아좋아좋아좋아좋아 5시 완전 좋아..! 네가 불러주면 아무 때나 다 좋아..!!

갑자기 밥을 사준다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얼굴 마주 볼  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기쁘잖아.


오랜만에 목소리 듣는 것도 좋고, 조금 있다가 얼굴을 본다는 것도 너무 좋았다.


너도  있었니, 지금 통화해도 되는 거니⋯ 이런 걸 물어보면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조금 나눴다.




그리고 조금 이따가 만나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약속도 했고.



—응, 지금 잠깐  일이 있어서. 조금 이따 보자-

그래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학교 근처에서 약속한 시간에 만나기로 하고 짧은 통화가 끝났다.


목소리 더 듣고 싶은데⋯.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기분 좋은 메시지를 두고두고 계속 보는 것처럼,  전의 통화가 녹음된 걸 찾아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통화 녹음 재생하기 ]



아, 목소리 굵어서 좋아.. 꼭 그르릉 그르릉 하는 것처럼 몸속 깊은 곳까지 울려 퍼져서 중독되는 느낌이 든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감각이 예민해진다.


듣고, 또 듣고 듣고 또 듣고⋯⋯ 남자 목소리에 몸이 마음대로 반응해버린다. 꼭 온몸이 이 목소리를 기억하는 것만 같았다.


“앗, 아앙..♡”




여자의 몸은 자기 짝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리는 걸까. 석현이 목소리를 들으니까 몸이 달아올라서 나도 모르게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다 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손으로 풀릴 리가 없잖아. 석현이 목소리를 들으면서 자위하는 건 결국 준비운동을 하는 것밖에 안 됐다.


빨리 만나고 싶어. 만나서 확 안겨버리고 싶어. 석현이한테 안겨서 밤새 가버리고 싶어—




단지 밥을 사주겠다고 연락한 것뿐인데 어느새  혼자 그 후의 일까지 상상하며 몸을 달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읏, 안 돼..  혼자서 너무 힘을 빼버리면 안 되잖아. 지난번처럼 좋은 분위기까지 가려면 정신 차려야 해.


석현이가 무슨 생각으로 밥을 사준다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보다 좋은 기회는 또 없을  같았다.
오늘도 술 마시자고 해서 끝까지 가버릴 거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다시 씻고 나온 후 아끼는 바디 미스트까지 뿌리고, 몇 없는 기초화장품을 꼼꼼하게 발라줬다.


오늘도 예쁘다고 해줄까?


조금이라도 더 예뻐 보이고 싶어서, 더 사랑스러워 보이고 싶어서 열심히 코디했다.

얼마 전에 새로 산 미니 드레스, 그 위에는 퍼프 슬리브가 달린 블라우스—

미니 드레스에는 꽃무늬가 가득 그려져 있어서 꽤나 마음에 들었다. 나 정말로 꽃을 좋아하나 봐.


살짝은 안이 비치는 블라우스까지 위 에 걸쳐 입으니 내가 보기에도 잘 어울려서 기분이 좋아졌다.


거기에 조그마한 숄더백까지 메니까 완벽해 보였다. 얼마 전에 급하게 주문한 건데 반달 모양으로 생긴 게 너무 귀여웠다.



흐흥—

이 정도면 오케이. 거울 앞에서 몸을  돌려가며 코디를 확인한 후 셀카를  장 찍었다.

이런 거 원래는 안했는데, 요즘 좀.. 찍고 싶어져서 그런 거다. 진짜로.


그리고 좁은 신발장 안에는 어느새 여성용 신발로 들어차 있었다.


처음 샀던 운동화는 한쪽 구석에  있고, 최근에 주문했던 로퍼들이 눈에 띄었다. 블랙, 아이보리, 로즈버드⋯.

아무래도 로즈버드는  오버하는 거겠지? 색이 예쁘다고 아무거나  신기는 좀 그렇잖아.

그래서 결국 아이보리  로퍼를 신은 채로 집 밖으로 나섰다.



우와, 날씨 좋다아—


햇빛이 잘 드는 곳에서 셀카 한 번 더 찍고.

셀카를 찍은 지가 얼마 안 돼서 그런 걸까. 묘하게 마음에  들어서, 어떻게든 더 잘 나오려고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가며 사진을 더 찍었다.

나 진짜 변하긴 했나 봐.

예전 같았으면 무슨 셀카냐고 질색을 했을 텐데, 이젠  잘 찍고 싶어서 여러 장을 찍게 된다.


그치만 싫지는 않아. 잘 찍은 거를 따로 골라뒀다가 나중에 석현이한테 보여주고 싶고⋯.





기분 좋은 상상을 하니까 왠지 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았다. 날이 화창한 건 좋지만 빨리 석현이를 만나고 싶어서 도저히 천천히 구경하면서 걸을 수가 없었다.



“석현아—!”



“어, 왔어?”

오랜만에 본 석현이는 역시나 너무 멋있었다.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들어서 쳐다봐야 했지만,  눈높이 차이가 정말로 좋았다.


멋져⋯

“석현아, 보고 싶었어..!”


“아.. 그래, 잘 지냈지? 별일 없었고?”

“너무너무 보고 싶었던 거 빼면 다 괜찮았어!”

“어..? 응, 하하⋯.”

으앗, 너무 대놓고 말했나? 말해놓고 나니까 부끄러워서 똑바로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치만, 내 마음에 솔직해지기로 했는걸. 자꾸 생각나고 보기만 해도 좋은 걸 어떻게 해.


그래서 용기를 내서 다시 고개를 들어 얼굴을 쳐다보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저기..  오늘  입은거⋯”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일까? 혼자 코디를  때는 제법 괜찮았던 것 같은데 혹시라도 별로라고 할까 봐 걱정이 됐다.




“으⋯ 나 옷 입은 거 어때..?”




그렇게 물어보니까 석현이는 잠시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히더니 조심스럽게 위아래를 쳐다보며 대답해줬다.

“엄청.. 예뻐..”

아..! 칭찬받았어!
바라고 있던 대답을 그대로 해주니까 너무 기뻤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게 정말 좋았다.

크흠, 흠— 민망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는데 그것마저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야아..”

콕- 콕-

  바라봐 줘.. 내 몸도 다 봐도 되는데.




바보.


부끄럽기라도  건지 왠지 시선을 못 맞추길래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찌르면서 석현이를 불러댔다.


“오늘 밥 뭐 먹을 거야?”


“새우동 먹을래?”


새우동? 동? 아.. 덮밥 말하는 건가 봐.


“덮밥 먹자고?”

“어, 학교 근처에 일본식 덮밥집 있거든. 거기 가자.”

음, 나야 뭐 딱히 가려서 먹지는 않으니까. 그저 같이 밥 먹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그러자고 했다.

근데 얘는 이런 거 어디서 알아 오는 건지 궁금해졌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전부 광고뿐이라서 어디가 맛있는 곳인지 알기 어렵던데.



이런저런 궁금한 걸 물어보면서 길을 걷는데 아쉽게도 손은 잡지 못했다. 여자친구 때문에 이건  그렇다나 뭐라나⋯. 밉다.



“다 왔다—”

“너 근데 여기는 어떻게 알았어?”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냐고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석현이 순간 멈칫하더니 말하는 걸 머뭇거렸다.


“아.. 혹시 그, 홍다희랑 같이 왔던 거야?”


“어, 음.. 미안.”

내가 왜 두 번째야..?
홍다희한테 밀렸다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속상해진다. 나만의 석현이가 다른 여자 색깔로 칠해져 버린 것만 같아서.

속상하지만, 너무 밉지만 애써 꾸욱 참으며 괜찮다고 웃어 보였다. 석현이한테는 절대  안 내.

분위기가 이상해지려고 했지만 내가 재빠르게 괜찮다고 해서 다행히도 수습이 됐다. 정말 기분 좋아야 할 날인데 고작 이런 걸로 침울해하면  되는 거니까 이 정도는 참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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