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44화. 순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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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화 〉44화. 순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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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화 〉44화. 순애 (1)
왜.. 뺏는 거야..?
까득—.
손톱을 물어뜯으며 방안을 서성였다.
내 마음을 전하려 했다. 날 다시 받아줄 수 있냐고 물어보려 했다. 다시 이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곁에는 웬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둘은 팔짱을 낀 채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데이트..?”
둘이 사귀는 거라고? 지금, 데이트하러 가는 거야?
용납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게, 나 혼자 방 안에 있어야 하는 건 말도 안 되잖아? 내가 먼저 좋아했단 말이야. 내가 먼저 이어졌단 말이야.
그래서,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그 둘이 어디론가 데이트를 떠난 게 아니라 잠시 일이 있어서 같이 동행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연인이라는 석현의 말을 애써 무시한 채로 자취방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허억- 허억—”
잘 보이려고 고르고 또 고른 옷을 입은 채로, 석현의 자취방에 곧장 달려갔다.
숨이 찬다. 그치만, 마음이 너무 급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빨리-, 빨리⋯.
쾅- 쾅- 쾅—
“문 열어, 석현아-, 문 열어—”
자취방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두들기며, 있으면 나와보라고 계속 불러냈다.
혹시라도, 그저 잠깐 외출한 거라면 지금쯤 자취방에 있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하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질 않았다.
귀를 가까이 대고 소리를 들어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적막하기만 했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소심해져 버린다. 너무 시끄럽게 하면 안 되겠지. 조용히 문을 몇 번 두들겨 본다.
“아직 안 왔나 봐⋯.”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까.
응, 일이 있어서 나간 거면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지⋯.
너무 흥분했던 것 같다. 좀,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옆에 여자가 있어서, 잠시 조바심을 냈던 것 같다.
하하, 여자친구라고 그런 거는 장난을 친 거겠지.
“...”
애써, 장난일 거라며 친구가 보냈던 톡을 부인했다. 혹시 내가 잘못 읽은 게 아닐까 싶어서 핸드폰을 켜서 톡을 다시 확인하려다가⋯ 글자 몇 마디를 읽고 다시 꺼버렸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다시 손톱을 물어뜯었다. 오른손을 꼼지락- 꼼지락- 쥐었다 피기를 반복한다.
좀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앞에서 있어 보기로 했다. 만나게 되면, 누구냐고 다시 물어봐야지. 왜 그런 장난을 쳤냐고 화도 내야지. 아하하, 화 좀 내고, 미안하다 그러면 다시 내 마음을 털어놓을 거야.
⋯
⋯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았다.
“음..”
두 시간이 지나도,
“하하⋯”
세 시간, 네 시간, 아니, 그 후로 몇 시간이 더 지나도.
“아니야⋯”
밤이 다 되도록 석현이는 자취방에 돌아오질 않았다.
“저기, 좀 지나갑시다—”
“..죄송합니다..”
간혹 누군가가 지나갈 때를 빼면, 계속 앞에 서 있었는데도 누구도 돌아오질 않았다.
“이제, 12시 넘었는데⋯.”
자정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았다.
“아니지..?”
여자랑 단둘이 나가서, 아직도 안 돌아온다니..?
아닐 거야, 그런 거 아닐 거야.
애써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새벽이 되어도 결국 돌아오질 않았다.
“아..?”
나, 정말 버려진 거야?
왜 이렇게 된 거지?
왜 내가 아니라 다른 여자랑 사귀고 있는 거지..?
⋯
나 때문이다. 다 내 잘못이다. 분명 날 다 이해한다고, 괜찮다고 안아주려는 걸 내가 뿌리쳐버렸다.
며칠 동안이나 연락을 받지 않고, 그 후로도 계속 피해 다녔다.
몇 주가 지나서야 갑자기 만나자고 나타난거니까⋯. 나도 모르는 그사이에 석현이는 다른 인연을 얻게 된 거겠지.
“아⋯”
혹시나 싶어 핸드폰을 봤는데, 아무 연락도 와 있질 않았다.
연락이 와 있을 리가 없지. 둘은 연인 관계인 것 같고, 이제 난 그냥 친구일 뿐이니까.
..
그리고 톡을 본 순간 내 마음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석현의 프로필 사진은, 낮에 보았던 그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몸이 덜덜 떨리면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흑..”
아무도 없는 빈 자취방 앞에서 혼자 서있는 내가 너무 처량하다. 새벽이 다 되도록 기다린 후에 깨달은 현실이 너무 비참했다.
내 마음을 너무 늦게 인정한 탓일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빼앗기고 말았다.
“흐윽, 흑—”
눈물이 계속 흐르고, 석현이 원망스러워졌다.
왜, 날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않은 거야—?
내 잘못인 게 분명하지만, 너무 밉고 속상해서 괜히 탓을 하게 된다.
아냐- 이건 내 잘못이야— 그를 원망하면 안 된다. 아무 잘못이 없잖아. 다 내 탓이다. 내가 진짜 마음으로부터 도망치다가 기회를 놓친 거잖아.
나한테 너무나도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잠시라도 그를 원망했던 게 너무 미안해진다.
난 이럴 자격이 없어⋯⋯.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다가, 이번엔 나한테서 뺏어간 그 여자가 원망스러워졌다.
다정하게 붙어있는 프로필 사진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누군데, 왜 이렇게 달라붙어 있는 걸까—.
조별과제에서 친해졌다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그와 인연을 쌓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 건 아닐까? 혹시나해서 핸드폰 연락처를 뒤져보지만 친한 사람 중에는 당연히 없었다.
이 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도 아니고⋯.
한참을 그렇게 찾아보다가, 연락처만 등록되어 있는 사람 중 얼굴이 닮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17학번 홍다희.
홍다희⋯?
서로 말을 나눠본 적 없이, 그냥 선배이길래 친구 추가를 한 사람이었다.
처음 학과 단톡에 초대받으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추가를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이 여자, 왠지 비슷하게 생겼는데⋯⋯.
프로필 사진을 눌러보니 확실히 내가 찾는 그 여자가 맞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개강할 때 이 사람이 단톡에서 메시지를 보내던 게 생각난다.
초반에는 출석체크를 안 하니 적당히 출튀하라고 한심한 소리를 했었다.
분명, 고학번이나 되어서 팁이랍시고 쓸데없이 농땡이 피우는 거나 알려준다고 속으로 욕을 했었는데⋯.
그러니까 이 여자가 석현이의 여자친구라는 거야?
첫인상도 나쁜데, 이렇게 또 엮이게 되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
그런 태도가 불량한 사람이, 감히 내 남자를 뺏어갔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불쾌했다.
우린 21학번이고, 저 여자는 17학번인데— 나이에 맞는 상대를 찾을 것이지, 고학번 주제에 내 친구를 건드린 게 너무 싫어진다.
“나쁜년⋯ 남의 남자한테 꼬리나 치고⋯⋯.”
손톱을 까득- 까득- 물어뜯으면서 또다시 중얼거리게 된다.
어느새 여자의 프로필 사진도 석현과 함께 찍은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상태 메시지도, 같잖게 하트를 띄워놓고 있었다.
“...씨발년, 네가 뭔데—”
너무 원망스럽다. 시발년이다. 분명, 날 계속 기다려주려고 했던 석현을 음탕한 말과 행동으로 음흉하게 꼬신 게 틀림없다.
낮에도 야한 옷을 입고 있었지. 천박하게 몸을 써서 유혹한 게 틀림없다. 몸을 들이대면서 대주겠다고 꼬신 거겠지. 걸레 같은 년, 그런 식으로 남의 남자를 채간 게 틀림없잖아—!
“걸레년, 걸레년, 걸레년, 걸레년⋯!”
아무리 사진을 둘러봐도, 낮에 봤던 기억을 떠올려봐도 도저히 그 천박한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몸매가 조금 좋다고 그걸 드러내서 남자를 꼬시려 하다니⋯ 야한 옷을 입어서, 너무 다정한 우리 석현이를 비겁하게 유혹해버린 거잖아.
남의 남자를 채가는 걸레년인게 분명하다. 석현이 오늘 자취방에 돌아오지 못한 것도, 그 걸레년이 보지를 벌려대면서 유혹했기 때문이겠지⋯!
따지고 보면 몸매도 내가 훨씬 더 좋고 얼굴도 내가 더 예쁜데, 내가 아니라 그 여자랑 사귀게 된 것도 저년이 걸레년이라면 다 설명이 돼버린다.
가슴이나 엉덩이도 내가 더 크고, 허리도 더 얇고, 지난번이 첫 경험이라 몸도 더 좋은데, 저 걸레년이 창녀처럼 몸을 대줘서 유혹한 게 틀림없다.
나이도 내가 어린데, 아직까지 졸업도 안 하고 있으면서 남의 남자나 훔치고 다니는 걸레년—.
“걸레년... 흑, 흑흑⋯⋯”
또다시 눈물이 새어 나온다. 그도 내가 첫 경험이라고 했는데. 내 첫 키스도, 첫 경험도 다 줘버렸는데 걸레년이 중간이 끼어들어선 모든 걸 망쳐버렸다.
진작부터 예전의 마음을 잃어온 마당에, 이젠 그만을 위한 여자가 되어버렸는데 앞으로 내게 희망이 되어줄 사람을 빼앗기고 말았다.
내 마음을 콩닥콩닥 뛰게 만들었던 석현의 몸을, 날 여자로 만들어줬던 그의 물건을 빼앗겨버렸다.
“흑, 흐윽⋯ 돌려줘, 돌려줘—”
밉다. 난 이 남자밖에 없는데, 여자가 되어버린 나한테 남은 건 이젠 이 남자 뿐인데 도둑질을 당해버렸다.
“돌려줘, 제발⋯”
그날의 기쁨을 다시는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슬퍼진다. 사랑을 나눴던 그 순간을, 황홀했던 그 시간을 영영 떠올리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진다.
잊고 싶지 않아서,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보지만 충족되질 않는다.
“읏, 흐읏⋯⋯.”
그의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를 떠올리자마자 비부가 젖어들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행복감이 찾아오질 않는다.
몸을 겹쳤던 그 날을 떠올리며 손을 움직여봐도, 그의 온기를 도저히 느낄 수가 없다.
“흐흑⋯ 흣, 흑⋯ 으흑—”
혹시나 다시 돌아와 주지 않을까 하는 마지막 기대를 갖고 계단을 주욱 쳐다봐도, 아무도 오질 않는다.
그에 대한 사랑 때문일까, 아니면 연애를 하라는 미션을 해내지 못한 탓일까— 이러는 와중에도 몸이 계속 달아올랐지만, 혼자서는 쏟아지는 눈물이 도저히 진정되질 않았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새벽 내내 벽에 몸을 기댄 채로 스스로를 다독여봤지만, 소중한 사람을 빼앗겨버린 내 마음은 채워지질 않았다.
난 쓸쓸하게 홀로 주저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