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42화. 마음
“...그러니까 그날 일은 그냥 잊어줘.. 응⋯?”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연락하자는 친구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며칠만의 통화는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잊어달라고, 그냥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 “난 정말 괜찮다니까⋯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이는 거야? 난 다 괜찮아. 지금은 여자잖아. 네 몸도, 마음도 앞으로 더 사랑해줄게. 응—?”
왜 날 계속 붙잡으려는 걸까.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해도 끈질지게 다가온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해도, 조금만 더 얘기하자며 자꾸만 말을 걸어온다.
원래 다정한 성격 때문일까. 왜 자꾸 나를 붙잡으려 하는 거야? 우리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잖아. 그냥 나 같은 거 모르는 척해도 되는 거잖아—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왜 날 보듬어주려 하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꾸욱 참는다.
무슨 대답을 할지 걱정돼서. 아니, 어떤 이유를 듣더라도 그냥 곧장 달려가서 안겨버리고 싶은 이 마음이 무서워서⋯.
내 몸이 기분 좋았던 거야? 아니면, 내가 불쌍해서 그러는 거야? 온갖 이유를 생각해보지만 마땅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아⋯.
서로 몸을 섞었던 일을 잊어보려고 며칠 동안이나 노력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마음까지 섞여버린 걸까? 몸이 이렇게 되고 나서, 가족 말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야⋯ 내 마음이 그렇게 연약할 리가 없잖아.
어쩌면 아직 다른 미션이 남아있어서 여전히 패널티가 있는 거일지도 몰라. 패널티라니, 웃기지도 않지만 몸이 계속 달아오르게 된다잖아.
그도 그럴 게, 화장이나 머리를 꾸미는 거, 남자랑 연애하는 거- 그런 미션이 여전히 남아있으니까.
그래서 도망치기로 했다. 괜찮다며 자꾸만 날 붙잡으려 하는 친구를 차라리 밀어내기로 했다. 미션이라는, 이딴 현실적이지 않은 거에 몸과 마음이 끌려다니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그냥⋯ 이 얘기는 그만하자. 내가 미쳤었나 봐. 없었던 일로 하자. 정말로 잊어줘⋯.”
우리 둘이 몸을 섞었던 건 그냥 순간의 실수였다고, 그저 없었던 일로 해버리자며 또다시 전화를 끊어버렸다.
너무 매정하게 통화를 끝내버린 탓일까. 너무 확고하게 말해버린 탓일까. 그전까지는 얼굴 보고 얘기 좀 하자며 붙잡던 친구도 내 말에 어쩔 도리가 없었는지 더는 찾아오질 않았다.
차라리 잘 됐어⋯.
그 통화를 마지막으로 석현이와 더 이상 만나지도 않았다. 시험이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비대면으로 강의가 진행됐기 때문에 학교에 갈 일조차 없었다.
혹시나 밖을 돌아다니다가 얼굴을 마주치면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너무 민망할 것 같아서 잠깐 외출할 때 조차 모자를 푸욱 눌러쓰고 다녔다.
동선이 겹칠까봐 일부러 먼 곳으로 돌아가고, 자주 가던 편의점도 발길을 끊고, 하다못해 잠깐 문밖으로 나설 때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녔다.
꼭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석현이와 마주칠만한 곳들은 전부 피해 다녔다.
아⋯ 나, 죄인 맞지.
먼저 유혹해놓고, 몸을 허락해줘 놓고 아무 감정도 없었다는 듯이 도망쳐버렸다.
끝까지 괜찮다고, 옆에 있어 주고 싶다는 걸 별다른 설명도 없이 거절해버렸다.
혼자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을 친구에게 배설하는 쓰레기 같은 짓을 했다.
대학에 와서 사귄 유일한 친구인데,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는 소중한 관계를 그런 식으로 한 방에 날려버리고 말았다.
이런 죄를 저질러놓고도, 불현듯 몸이 다시 달아오르는 나는 정말로 죄인이 맞았다.
“읏⋯⋯.”
방바닥에는 조각으로 잘려 나간 속옷들이 치워지지 않은 채 아직까지도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날 모텔에서 돌아온 이후로, 발광하듯 소리를 지르며 속옷들을 잘라버린 거였다.
내가 정욕을 이기지 못한 게 마치 이것들 때문이라는 듯이 여자 속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었지⋯.
괜한 화풀이를 해버리고, 멘탈이 나간 상태로 며칠을 지내고. 그러면서도 목소리를 듣고 싶고,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확 안겨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 상태에서 전화를 하니까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아서, 차라리 빨리 전화를 끊어버리기 위해 관계를 정리하려고 한 게 내 진심이었다.
너무 복잡하다. 정리가 안됐다. 뭐가 진짜 내 마음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혼자 주절거리면서도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지난 밤의 일이 마치 방금 전의 일 같고, 석현이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고⋯.
그의 다정한 목소리,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체취, 몸을 꾸욱 짓눌러오던 그 무게감이 떠오른다.
마음이 몸에 끌려다니는 걸까? 내 몸으로 남자를 받아냈다는 사실이 싫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걸 그리워하면서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미션을 하지 않으면 발정하게 된다는 패널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로 남자를 원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이제 그런 거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바닥에 드러누워서는 손가락으로 보지를 쑤셔댔다.
석현이를 차버리고도, 얼마 되지도 않아 또다시 암컷이 되어 몸에 굴복해버렸다.
시간 감각같은건 다 잊어버리고, 제대로 된 논리도 없이 마음 속에서 석현이를 밀어냈다가, 다시 안겨들었다가⋯.
어쩌면 스트레스를 너무 심하게 받아서, 그걸 해소하고 싶은 걸지도 몰라. 좀 괜찮아진다 싶을 때마다 힘든 시련들이 찾아오니까. 그걸 잊기 위해서라도 몸으로 달랠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러니까 조금 기분이 좋아져도 되는거 아닐까.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오로지 쾌락만을 위해 몸을 만져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책감 따위를 잊고서는 조금이라도 더 기분 좋아지기 위해서 자세를 바꿔가며 몸을 위로하고 있었으니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좀 더 잘 느껴지는 부분을 찾고 리듬을 조절하기도 하면서 즐기고 있었으니까.
아. 난 이렇게나 쾌락을 원하고 있었구나.
그런데도 석현이를 피해버린 거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해버리게 되고 말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구나.
※
그렇게 하루, 이틀, 또다시 몇 주가 지나고—.
나는 미친년이 되어있었다.
남자를 유혹한 뒤 손바닥을 뒤집듯 하루아침에 남자를 차버리고 매몰차게 밀어내버린 여자.
그리고 그 남자를 그리워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위를 해대는 여자.
난 그렇게 스스로 미쳐가고 있었다.
학교 수업같은거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 혼자 중얼거리며 비극을 연기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마음을 다잡으려 한 거였지만 앞뒤 맥락도 없는 말들 뿐이었다.
괜히 차버린 걸까.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통화를 끊어버린 그 날 이후로도 몇 번인가 연락이 다시 오기는 했다.
그런데 그 순간조차 전화를 받지도 않은 채로 보지를 쑤시고 있었다.
나 스스로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비운의 역할을 연기하면서도, 매일같이 암컷의 쾌락을 탐했다.
그가 해줬던 애무를 떠올리면서 젖꼭지를 괴롭히고 가슴을 주물러댔다.
이미 처녀를 줬는데 이제와서 무슨 상관이야— 그런 생각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스스로를 달랬다.
“아.. 아아... ”
도저히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리고 그를 잊을 수가 없어서 심지어는 핸드폰으로 톡을 열고 프로필 사진을 보며 몸을 달래기도 했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바보 같은 짓을 하는 동안, 다정하게 잡아주었던 따뜻한 손이 생각나고, 그와 나눴던 첫 키스가 떠올랐다.
내 몸을 어루만졌던 손길이 떠오르고, 훌륭했던 그의 물건이 그리워지면서 몸이 달아올랐다.
이미 다 사라져버린 그의 체향을 그리워하면서 몸을 옴짝달싹 못하고, 그의 움직임을 흉내 내며 손가락으로나마 다리 사이를 위로하고—.
그런 식으로 며칠을 보내고, 또 몇 주가 지나고⋯
결국 석현이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에 못된 고집이 꺾여나가기 시작했다.
※
삐빅- 삐빅—.
항상 그렇듯이 오늘 역시도 똑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며칠을 고민했지만 내 마음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
아무래도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미 진작부터 여자가 되어버렸던 걸지도 모른다. 애써 아니라고 도망쳐왔을 뿐이지.
생각해보면 둘이서 몸을 섞기 전부터, 이미 그를 보면 가슴이 콩닥콩닥하면서 애달픈 마음이 들었으니까.
같이 만나서 밥 먹고, 게임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아플 때 간호받고,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며 함께 웃고⋯.
몸도 마음도 진작부터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그동안 바보처럼 쌓아왔던 마음의 벽을 풀기로 했다.
내가 왜 그렇게 당황했을까, 왜 차버렸을까, 이미 마음을 줘놓고도 왜 아닌척 했을까 후회가 됐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마음도 전하고 싶었다.
다 괜찮다고 했으니까, 기다려주겠다고 했으니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다시 날 품어달라고 부탁하면 되겠지⋯⋯.
다시 찾아가면 날 받아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에야말로 그에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침 수업이 있는 날이라고 했었다. 내가 들어야 할 강의는 녹화로 진행되어서 아무 때나 들어도 됐지만, 석현이가 듣는건 분명 실시간으로 진행하는 거라고 했었으니까.
언제가 좋을까, 왠지 좋은 시간대에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날 다시 받아달라고, 사실은 쭉 원하고 있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면 나를 다시 품어주겠지만⋯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용기를 내기 위해 분위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점심 이후가 좋을까—.
아침엔 바쁠 테니까, 괜히 민폐 주지 말고 한숨을 돌리고 난 뒤에 연락하는 게 좋겠지.
다행히 날씨는 참 좋아서, 밖에서 만나서 고백하기엔 딱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결정했어.
점심 먹고 나서, 잠깐 만날 수 있냐고 물어보면 괜한 부담이 되지 않을 거야.
옷도 괜찮아 보이도록 잘 골라 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정리 좀 해주고.
화장은 여전히 안 하지만, 솔직히 단정하게 하고 나가기만 해도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나을거라는 자신이 들었다.
솔직히 나 정도 되면 다른 여자들보다 외모가 나으니까. 그냥 내 마음을 솔직하게 전하기만 하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후에 입을 옷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흐흠—”
잠깐 학교 광장에서 만나자고 연락해놓고, 미리 나가 있으면 시간이 딱 맞겠지?
사실은 널 계속 생각했다고, 이젠 결심했다고, 날 다시 받아줄 수 있겠냐고 고백해야겠다.
그러면 석현이도 환한 미소를 보여주며, 그동안 그 말을 기다려왔다고, 언제까지나 내 옆에 있어 주겠다며 다정하게 응해줄 게 틀림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