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37화. 맺어짐⋯ (1)
‘좀 이따 만날래?’
오늘 시간 되냐고, 만날 수 있냐고 그렇게 톡을 보내놓고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살펴본다.
분홍색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는 흰색 블라우스에, 발목 위로 커팅이 되어 있는 연청색의 부츠컷 데님 팬츠.
주변에서 얻어왔다며 집에서 보내준 옷 중에서 고른 거였지만 내 몸이나 얼굴과 매치가 잘 되어 꽤 괜찮은 코디였다.
“흐응⋯”
바지의 라인이 잘 살아나고, 블라우스도 화사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게임 캐릭터의 이미지를 보고 골랐던 탓일까,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눈길을 끄는 몸매가 드러나고 있었다.
가슴이 좀, 많이 커서, 블라우스의 단추가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게 조금 부끄럽지만⋯⋯.
좀 이따 만날 생각에, 얼굴을 상상하고 그 체취를 떠올리니 그런 부끄러움조차도 다 좋아진다.
날 어떻게 봐줄까⋯,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말해줄까⋯⋯.
여자가 아니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커다란 가슴이 옷 위로 볼륨감을 어필하는 모습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러니까, 단추가 풀려버릴 듯한 이런 가슴조차도 오히려 기쁘기만 하다.
밖에 나가도 나 같은 몸매는 거의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다른 여자들보다도 위에 서 있다는 생각, 우월한 입장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며 기뻐진다.
상대가 나만 바라볼 수 있도록, 다른 여자들이 내 짝을 채갈 수 없도록 압도해버리는 거니까⋯.
꿈속에서는 남자의 앞에 굴종하는 한 마리의 암컷일 뿐이었지만, 적어도 현실에서만큼은 다른 여자들보다 위에 있다— 그런 본능적인 감정에 기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다른 옷을 입어 봐도 더 나아 보이는 건 없었다. 조만간 옷을 새로 사야할까— 고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친구에게서 답장이 왔다.
[석현] 오늘?
[나] 응ㅋㅋ 밥 먹자.
같이 식사나 하자. 사실은 이거 말고도 다른 이유때문에 불러내는 거였지만, 우선은 아주 평범한 일인 것처럼, 어떤 다른 마음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톡을 보냈다.
또톡-
[석현] 좋지 ㅋㅋ 내가 사줄까?
앗⋯. 거기까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자기가 밥을 대신 사주겠다고 한다.
“음⋯⋯.”
잠시 생각을 해본다. 예전 같았으면 분명 먹은 만큼 나눠서 내자고 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생각이 달라졌다.
날 위해 밥을 사준다는 생각을 하니 기쁘다. 상대방이 날 배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날 챙겨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둘 사이에 무언가 유대가 존재하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슴이 몽실몽실해진다.
“좋아-”
[나] 그럼 나야 좋지
[나] 고마워ㅎㅎ
평소 같았으면 쓰지 않았을 초성까지 써가며 답장을 보낸다.
저런 식으로 낯간지러운 초성을 남자에게 보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들뜬 기분을 표현하기에 저보다 더 좋은 거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과감하게 보내버렸다.
평소와는 다른 말투에 조금 놀라기라도 한 걸까, 톡을 확인했다는 표시가 줄어들고 조금이 지나서야 답장이 왔다.
[석현] 먹고싶은거 있어?
음..? 그건 잘 모르겠다. 사실 지금도 뭘 먹고 싶다던가, 배가 고프다던가 그런 거 때문에 톡을 보낸 게 아니었으니까.
그저, 얼굴 한 번 보고, 밤에 그걸⋯ 해보려고⋯⋯.
하여튼 그런 걸 대놓고 말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뭘 먹을거냐고 물어봤기 때문에 생각나는 대로 아무거나 말해버렸다.
[나] 초밥..ㅎㅎ
한참 속상해하다가 약속을 잡고 만났던 그 날이 생각난다. 그때도 초밥을 먹었지. 내가 겪었던 일들을 다 털어놓고, 부끄럽게도 엉엉 울어버리고⋯.
그치만 그때의 기억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그도 그럴 게, 따스한 위로를 받고는 그 이후로 오히려 관계가 더 좋아졌으니까⋯⋯.
초밥을 먹고 싶다는 내 말에 오래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석현] 그럼 지난번에 먹었던데 갈까?
[나] 응
[나] 거기 좋았어ㅎㅎ
[석현] 학교에서 만나서 같이 갈까?
[석현] 몇시에 만날래?
앗, 만나서 같이 가자고 해주는구나. 역시 배려심이 넓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또 좋아졌다.
나한테 맞춰주고 있구나. 날 생각해주고 있구나. 톡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기뻐진다.
[석현] 5시 어때?
5시.. 나쁘지 않다. 학교에서 만나서 걸어가면 그리 멀지 않으니 여유 있게 도착할 시간이니까.
좋아— 알았다며 답장을 보내고는 잠시 핸드폰을 내려두었다.
5시까지는 아직 여유가 좀 있으니까, 필요한 걸 더 챙겨야겠다 싶었다.
나갈 채비를 하는 건 얼추 다 해놨지—?
비록 화장을 한다던가, 머리를 스타일링 한다던가 그러지는 않았지만 옷을 잘 꾸며 입은 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달라진다.
얼마 전까지는 빼어난 외모를 갖고 있음에도 편하게 다니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여자의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이다.
“뭘 챙겨야 할까⋯.”
하지만 아직 미숙하기만 하다. 여자가 외출할 때 뭐가 필요한지, 뭘 챙겨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긴, 원래는 책가방이나 들고 다니던가 그도 아니면 핸드폰과 지갑 정도만 챙겨 다녔으니까.
“아.. 아무래도 하나 사야 할까 봐—”
핸드백도 없고, 자잘한 물건을 담을 파우치도 없다니. 아마 다른 여자들이 보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음.. 일단 지금 당장 뭘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음에 사두기로 하고 일단은 핸드폰 정도만 챙겼다.
아무래도 약속을 하고 만나러 가는데 블라우스에 백팩은 좀 깨는 조합이니까.
안 어울리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 적절한 건 아닌 거 같아서 뭘 담아가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그럼 다른 거 또 있을까..?”
좀 이따 만날 때 갖고 있어야 할 만한 걸 떠올려본다. 음.. 화장도 안 하는데 뭘 챙겨가야 하지-
비록 겉으로는 밥이나 먹자면서 약속한 거였지만, 그 이후에 뭘 더 원하고 있는지는 들뜬 내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아⋯”
여자와 남자가 만나면, 그리고 밤까지 함께 있는다면—
남녀가 함께 있을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 경험이 없는 나라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그걸 바라고 있기도 하고⋯
그런 생각 끝에 떠올린 거는, 아무래도 좀 부끄러운 그것이었다.
“부끄러..”
오늘 마지막에 가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날 주게 된다면⋯ 아무래도 고무가 필요할 것 같았다.
써 본 적도 없고, 사 본 적도 없었다. 어느 숙소에 가면 그게 비치되어 있는지 아닌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무래도 그 녀석은 생각도 못 하고 있을 일일테고, 아쉬운 사람은 나인 듯 싶어서 내가 준비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고무⋯ 편의점에서 사 가야겠지..?
부끄러운 생각을 하니 몸이 또 달아오르고 얼굴이 후끈거려졌다.
“아으—”
어떡해- 어떡해— 창피한 마음에 괜시리 양손으로 허벅지를 팡- 팡- 내리쳐본다.
그렇게 혼자 호들갑을 떨고 있다 보니 어느새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가와서 집 밖으로 나섰다.
대학교 근처 자취방들은 편의점이 아주 가깝기 때문에, 길을 나서면서 한 번에 들릴 수 있었다.
“어서오세요—”
아, 알바가 바뀌었네. 예전 알바는 뭔가 인사도 안 하고 혼자 핸드폰만 보고 있던데 새 알바는 인사는 해준다.
“안녕하세요..”
그래서 나도 마스크를 낀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보통 손님들은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 자연스럽게 매장 안으로 들어가 필요한 물건들을 고르지만⋯⋯.
“어.. 음⋯”
난 그럴 수 없었다. 콘돔, 그거 안쪽에는 없었으니까..
‘부끄러워..!’
너무 부끄럽다. 여자가 아니었을 때도 쳐다보기도 민망해서 애써 시선을 피해왔던 것들인데, 여자가 되어서 콘돔을 고르고 있다니—!
계산대 앞에 혼자 뻘쭘하게 우두커니 서 있으려니, 이내 알바가 찾는 거라도 있냐며 말을 걸어왔다.
“혹시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
앗, 아니, 아뇻..!!
너무 부끄러워서 아니라고, 됐다고 황급하게 대답을 해버렸다. 으⋯ 콘돔 고르고 있다고 어떻게 말하냐구⋯!
이상하게 쳐다보던 점원은, 이내 내 눈길이 닿아있는 곳을 확인하더니, 앗- 소리와 함께 그제서야 모른 척을 해주었다.
으으⋯
너무 부끄럽지만, 그러니까 더 빨리 고르고 어서 빠져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뭘 사야 하는 거야?⋯’
잘 모르겠다. 종류가 너무 많았다. 어디에 제대로 눈을 두고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연예인이 그려져 있는 거, 리본을 매단 토끼가 그려져 있는 거, 과일이 그려져 있는 거, 그리고 일본어가 쓰여 있는 게 진열되어 있었다.
아, 정말—! 뭘 사야 하는 건지, 또 뭐가 다른 건지도 모르겠단 말이야⋯!
예전에 인터넷에서 얼핏 본 기억으로는 무슨 성기의 크기나, 고무의 두께 같은 게 다르다고 하던데, 지금은 그런 걸 살필 정신이 없었다.
‘내가, 걔 크기를 어떻게 알아⋯!?’
이런 생각을 하려니까 부끄러워져서, 정말 빨리 골라야겠다는 생각에 본능에 맡겨 손이 움직이는 대로 물건을 골랐다.
‘이거, 하나만 사면 되는 거 맞지—?!’
여러 개를 사 가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을 하다가도, 겉포장이 상자니까 분명 낱개로 여럿 들어있을 거라는 생각에 하나만 집어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그걸 계산대에 내려놓고 소심하게 말을 꺼냈다.
“계..계산해주세요오⋯⋯”
왠지 날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만 같아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상태로. 계산대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계산을 서둘러 마치고는 도망치듯 후다닥 빠져나왔다.
“으아아—”
부끄럽다. 부끄럽다, 부끄럽다.
편의점에서 나온 내 손에는 지금 콘돔 한 상자가 들려있었다.
내가 뭘 산 건가 살펴보니 일본어가 써져있고⋯ 초박형이라는 한글 설명이 붙어 있었다.
“아..”
초박형⋯ 실제로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얇아서 느낌이 잘 온다는 말을 들어본 거 같은데⋯.
일을 저질러버렸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해지기를 한 번, 그리고 콘돔을 길거리에서 대놓고 들고 있다는 생각에 또다시 한 번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으⋯!”
미쳤어, 진짜—! 가방을 들고 나오지 않아서 어디 넣어둘 데가 없잖아..!!
어떡하면 좋을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이내 편의점에 다시 들어가서는 상자를 뜯어버렸다.
앗, 이렇게 생겼구나⋯
비타민 C 처럼 은박으로 포장되어 있었고, 겉면에는 사용기한이나 두께 따위가 쓰여 있었다. 여러 개가 주르륵 붙어있었는데, 아- 절취선이 있구나.
그 절취선을 따라서 여러 개로 붙어 있는 콘돔의 비닐들을 낱개로 분리해주고, 그걸 한 층으로 쌓듯이 모아서 바지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아우으⋯”
아까보다도 주머니가 볼록 튀어나오게 되었지만, 다른 방법이 딱히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미쳤어- 미쳤어—
몸이 달아오르긴 했어도 내 손으로 직접 이런 걸 샀다는 생각을 하니 부끄러워져서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렇게 고무 3개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로, 친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