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31화. 인내
“하아⋯ 또 나왔네.”
매일같이 찾아오는 생리에도 지쳐갈 즈음, 그동안 무시해왔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
“지긋지긋해-”
‘..냐고-’
“..?”
무슨 소리지?
“이래도 할 생각이 없는 거냐고—”
뭐..?
킥킥킥, 대면서 말을 걸어오는데 왠지 익숙한 목소리이다.
“너 누구야⋯!?”
다른 사람이 보면 허공에 소리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오는 때마다 좋지 않은 일들만 생겼으니까. 발작이라도 하지 않는게 다행일 정도이다.
“킥킥, 이런 고통을 받아도, 아직도 미션을 안 하려는 거야?”
“미션이라니—”
아, 설마⋯. 왠지 정체를 알 것 같다. 처음에 만났던 여신과는 다른, 지난번에 도서관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이다.
“너— 정체가 뭐야-!”
“으응? 킥킥, 나도 신인데- 으음— 네가 미션을 너무 무시하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이야-?”
마음에 안든다니— 지난 번도 그렇고, 지금까지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분명 새로 생겼던 미션 중에 옷과 관련된 것만 깼었고, 화장이나 머리를 하는 미션은 건들지도 않았다.
그거 때문에 도서관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미션을 하지 않으면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가 들렸었고.
“네가 그런 거지⋯? 분명 여신이, 미안하다고 그랬는데- 이제 와서 또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틀림없다. 분명 여신은 일부러 이런 게 아니라며 사과했었다. 계속해야 한다고 말하긴 했었어도, 이렇게 갑자기 고통을 주려는 낌새는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교활한 목소리는 킥킥대며 날 놀려댔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 기껏 재밌어질 수 있는데 여기서 왜 그만둬야 해—?”
윽— 말을 하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고통이 찾아온다.
“또 몸이⋯ 읏—”
“그러니까, 외면하지 말고 다 하란 말이야. 자꾸 재미없는 짓 하지 말라고..! 뭐든지 다 한다고 그랬잖아—!”
꺄하하하하— 광기에 찬 웃음소리가 들려오면서 자꾸만 미션을 하라고, 하지 않으면 더 큰 고통을 주면서 날 엉망으로 만들 거라고 협박해온다.
“꺼..져.. 난 이딴거에, 더이상 굴복 안 해-”
절대 굴복 안해. 몸이 아파올 때마다, 멘탈이 흔들릴 때마다 자꾸만 나약해지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저 협박에 당할 수 없다.
자꾸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변해가는걸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
“하아—? 건방지네⋯. 좀 좋게좋게 해주려 했더니, 자꾸 재미없이 굴 거야?”
악마 같은 목소리가, 더이상 웃질 않고 화났다는 어조로 바뀌었다. 그리고는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다 방법이 있다며 무언가를 외우기 시작한다.
“—⋯”
뭐 하는 거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토록 듣기 싫어했던 띠링- 소리가 나면서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미션] 현재 진행 중인 미션의 보상이 취소됩니다.
뭐, 보상⋯?
분명 미션을 하면, 자존감을 높여주겠다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보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미션을 할 때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무언가 긍정적인 효과가 나한테 나타나는 식이었는데, 앞으로는 보상을 주지 않겠다는 말이다.
하, 이런 거로 협박을 하겠다니-
“이딴거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거든? 미션 같은 거 절대 안 할 거니까, 꺼져버려—!”
솔직히 그동안의 일을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허점투성이였고, 거기에 당해준 나도 바보 같았다.
그땐 그렇게나 아프고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더 버티지 못했나 싶다.
“그딴 말 같지도 않은 걸로 날 교묘하게 조종할 수 있을 거 같아?”
처음 내 몸에 변화가 생겼을 때, 그러니까 다리 사이에 달려있는 남자의 것이 사라졌을때— 그때 정신 차리고 병원에 갔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든다.
그저 볼일을 봐야 한다는 원초적인 두려움에, 그리고 여자의 것을 대신 달아주겠다며 뱀의 혀로 지껄이는 속임수에 넘어가 버린 내 잘못이지.
그 후로도 내 얼굴을 바꿔준다던가, 몸을 바꿔주고 목소리도 변하게 해주겠다는 식의 엉망진창의 유혹을 해왔던 게 떠오른다.
흔들리는 멘탈을 다잡지 못하고 거기에 넘어가 버려서 결국 지금처럼 내 몸이 여자가 되어버린 거였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여자 옷을 입게 만들고, 여자처럼 머리를 꾸민다던가 화장을 하는 둥 날 몰아세우고 있다.
이제 절대 속지 않아.
“그러니까, 꺼져버려—!”
그래, 악마 같은 년의 술수에 더이상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그딴 보상 같은 거 없어도 되니까 내 머릿속에서 맴돌지 말고 꺼져버려.
그렇게 비장하게 저항의 뜻을 내비쳤지만, 이상하게도 혐오스러운 그 목소리는 굴하지 않고 또다시 들려왔다.
“아하하하—!! 이걸로 끝일 것 같아? 앞으로 더, 더, 더 힘든 일들이 벌어질 테니까 각오하라고—!!”
절대 봐주지 않겠다는 듯이, 광기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또다시 머리 속에 미션이 주어졌다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띠링-
[미션] 남자친구를 사귀세요
띠링-
[미션] 남자와 입을 맞추세요
띠링-
[미션]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세요
“뭐, 뭣..!?”
그리고 그 미션들의 내용은 여태껏 주어졌던 것들보다도 더 충격적이고 훨씬 수위가 높은 것들이었다.
손발이 오그라들고, 내용도 말이 안되는 것들 뿐이잖아⋯.
이전까지의 미션들은 분명 내 몸과 관련되어 나 혼자만 바뀌어가는 내용들이었는데, 새로 생긴 미션의 내용은 완전히 다른 것들이었다.
“이런걸, 하라고⋯?”
절대 못 한다. 나 혼자 지지고 볶으면서 할 수 있는 미션도 아니고, 다른 남자와 엮이라니..?
남자와 키스하고, 몸을 섞고, 연애를 하란 말이야?
말도 안 된다.
그도 그럴 게, 난 여자가 아닌데, 어떻게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주라는 거야?
윽⋯
머리가 아파져 온다. 배가 격통이 올라오고, 정신이 어질어질해진다.
“이 무슨⋯”
몸속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배의 통증이 변해버린 내 몸을 또다시 깨닫게 만든다.
누가 봐도 내 겉모습은 여자다.
하지만, 마음만은 계속 지켜오고 있는걸. 힘들 때마다 흔들리지만, 나도 모르게 흔들릴 때도 있지만.. 아직 마음만은 바뀌지 않았단 말이야.
“아파⋯⋯”
하지만 저 정체 모를 신이란 것들은, 나보고 완전히 여자가 되어버리라며 자꾸만 부추기고 있었다.
남자친구를 사귀라니⋯⋯
어떻게 나보고 남자와 연애를 하라고 할 수 있는 거야? 난 여자를 좋아한단 말이야.
내가 원래부터 그런 성향이었던 것도 아닌데, 아무리 몸이 바뀌었다지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지?
이건 설마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어김없이 흔들려버리는 내 약한 모습을 눈치채버렸기 때문일까?
그래서 나한테 자꾸 힘든 시련을 줘서, 완전히 여자로 떨어뜨리려고?
키스를 하라니, 읏⋯ 키스는 마음을 준 사람과 해야 하는 건데, 나보고 그런 걸 하라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입을 열고, 혀를 내줘서 얼굴은 발그스레 달아오른 채 애정을 갈구하라는 거야?
안된다. 절대 안 된다. 그런 거 못 해.
몸을 섞는 것도, 절대로 싫다.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그런 생각 하고 싶지도 않아. 남자한테 깔려서, 교성을 내지르면서 정을 받아내는거⋯ 싫다. 정말 싫다.
읏—
하지만 고통이 너무나 심하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몸을 찔러대는 아픔이, 또 처음 자취를 시작했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아픔과 함께 또 몸을 이상하게 만드는 느낌이 올라와 버린다.
“아으⋯ 안돼—”
악마 같은 년이 나에게 찾아오면서, 미션의 보상을 없애고 새로운 미션을 더 주고 간 것뿐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더하고 갔기 때문이었다.
“흐읏⋯”
‘미션을 진행 중에는 완료 시까지 계속 발정 상태가 유지됩니다.’
무슨, 발정 상태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여놓고 가버렸다. 발정이라니, 안 그래도 말도 안 되는 나날이었지만 이젠 완전히 정상의 범주를 넘어서 버렸다.
나를 여자의 몸으로 만들어놓고, 발정이라니⋯ 남자의 성욕은 이미 알고 있지만 여자의 몸이 그렇게 되어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건지 모르겠다.
알 수 없어서 실감이 되지 않고, 한편으로는 또 두렵기도 하다.
“하으읏..”
미션을 달성할 때까지 계속해서 정도가 심해진다고, 그리고 달성하더라도 쌓여있는 게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미쳤다. 그리고 나도 정말 미쳐버리겠다. 이딴 식으로 내가 강제적으로 미션을 하게 만들어버리려는 거다.
몸이 달아오른 여자가 어떻게 되는 건지는.... 현실에서는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야한 만화나 동영상에서는 본 적이 있는 게 더 문제이다.
성욕에 미쳐버린 여자는, 남자를 갈구하며 짐승처럼 교미를 원하게 된다. 자기 몸도, 인생도 포기해버린 채 타락하는 게 그들의 결말이다.
그건 창작물에서의 일이니까, 현실에서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나한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완전히 안심할 수도 없다.
“읏, 흐읏⋯”
고통과 함께 또 다른 부위에서는 간질간질한 느낌이 올라온다.
그래도, 참아야 해⋯⋯.
이런 거에 무너지면, 또 어디까지 떨어지게 될지 알 수 없다.
난 동물이 아니다. 본능에 맡겨서 마구잡이로 행동하는 동물이 아니다. 난 사람이다. 난 사람이다.
이런 교활한 술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절대 안 돼. 참아내야 해.
이미 힘들 때마다 져버린 대가로 내 몸이 완전히 변해버렸잖아. 절대 잊어서는 안 돼.
“난, 이런거⋯ 참아내고 말거야⋯⋯.”
아무리 미션을 하지 않는다고 큰 고통을 주더라도, 주변에 힘든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꿋꿋하게 버텨내야만 한다.
언제쯤에야 끝이 될 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런 식으로 굴복해서는 안 돼⋯⋯.
—그렇게, 참아내야 한다며 진통제를 먹고, 생리대를 갈고, 억지로 책상에 앉은 나는 전혀 집중하지 못한 채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여자의 몸이라는 걸 증명하는 생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잦아들었지만, 몸에 찾아오는 고통과 달아오르는 성욕은 전혀 나아지질 않고 있었다.
미션⋯ 내 인생을 망쳐놓으려는 악마 같은 년들이 날 막다른 길로 몰아넣고 있다.
“중간, 시험.. 준비해야 하는데⋯”
육체와 정신이 괴로워하지만, 절대 몸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일상에 집중해야 한다. 대면시험을 본다고 하던데, 공부에 더 집중해야만 한다. 이런 일에 져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이리저리 흔들려 걸레짝이 되어가는 정신을 조금이나마 부여잡은 채 의자에 앉아선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