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2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1)
어떡하지? 어떡하지—!?
벌써 만나기로 약속한 주말이 되었다. 점심 시간에 맞춰서 만나기로 했는데 너무 긴장되서 떨린단 말이야⋯
새로 산 옷, 진짜 입을까 말까 엄청 고민했는데 엄마는 ‘어이구, 누구 아들인데 이렇게 예뻐—’라면서 날 놀려댔다.
아 진짜- 놀리지 말라니까—?
나도 애초에 여자 옷을 입고 싶었던건 아니었다. 근데 미션을 하나 깨고 나니까 이상하게 잘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묘하게 입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게 되더라.
아빠는 좀 충격을 받았던 것 같기는 한데 뭐 별 수 있나, 내가 여자 몸이 되어버려서 남자 옷은 맞는게 없는걸⋯.
“아빠도 진짜, 왜 그래— 어쩔수 없잖아.”
엄마는 오히려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겨내야 한다면서, 안타까운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일부러 기분을 업시키고 있는거 같았다.
“그래도 예쁘니까 됐지. 안어울리고 그랬어봐라. 으응? 그랬음 엄마는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엄- 누구 자식인데—!”
하여튼 크롭 티에 데님 스커트를 받쳐입고, 위에 후드 집업을 하나 걸치니까 꽤나 그럴싸하긴 했다.
⋯솔직히 예쁜 것 같기는 하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고, 어디가 얼마나, 누구보다 나은지 이런 비교같은건 잘 모르겠지만.. 꽤나 예쁘다는건 어렴풋이라도 알 수 있다.
그래도 민망하고 부끄러운건 어쩔 수 없잖아. 으.. 입학한다고 새로 샀던 내 옷들 너무 아까워. 언제 되돌아갈 지는 모르겠지만 그 옷들, 일단 잘 갖고는 있어야겠다.
근데 지금 제일 민망한거는 내가 여자 속옷을 입었다는 건데⋯ 여자 언더웨어, 그러니까 팬티가 내 생각보다 더 부드럽고 면적이 좁더라.
처음 포장을 열고 속옷을 꺼내는데 너무 작아서 깜짝 놀랐다. 잘못 산 줄 알았단 말이야.
이거, 내가 입으면 늘어나는거 아니야⋯? 한 번 입어버리면 못 바꿀텐데, 어떡해.
부끄럽지만 엉덩이가 커서 팬티가 안맞을 것 같았다. 엉덩이 살이 다 안 가려지는건, 원래 이런 디자인인건가? 분명히 직원이 치수를 재주고 골라준건데⋯
조심, 조심 혹여나 늘어나지 않게—
읏, 살을 쓸고 올라오는 보드라운 면의 감촉이 낯설다. 오로지 여자아이들만을 위한 포근한 재질인가 봐.
다행히 몸에는 잘 맞았고, 입고 있는 느낌도 좋았다. 사실 입은지 안 입은지도 잘 모를 정도로 부드럽고 상냥하게 음부를 잡아주고 있어서, 마치 발가벗고 있는 기분까지 들었다.
이게 여자들이 느끼는 감촉이구나⋯
브레지어도 엄마가 알려준대로 거울을 보면서 차니까 생각보다는 빨리 입을 수 있었다. 이렇게, 여기를 돌려서, 채우고—
가녀린 목에서, 쇄골을 타고 내려와 동그랗게 이어지는 곡선이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가슴.. 너무, 커⋯.
소중한걸 지키려는 듯이, 물방울 모양의 브레지어가 가슴을 잡아준다. 따스한 포대에 귀여운 아가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상냥하게 가슴을 덮어주고 있다.
앗⋯,
여자의 몸은 너무나도 연약한건지, 금새 물이 차올라선 화장실에 가고 싶어진다.
“아.. 벌써⋯?”
너무 자주 마려운 것 같아. 화장실에 가는건 여전히 두렵다. 트라우마가 사라지질 않는다. 뚜겅을 내리고 자리에 앉으면 마치 공황장애처럼 몸이 고장나기 시작하니까.
그래도, 내 방에서 페트병을 가지고 시름했던걸 다시 반복하지는 않는다. 뒤처리도 어렵고, 해서는 안될 장소에서 해서는 안될 짓을 하는거라 죄인이 된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조용히 화장실에 들어가선 쪼그려 앉을 뿐이다. 조용히 옷을 벗을 뿐이다. 조용히 부끄러움을 참을 뿐이다. 그리고는, 세찬 물소리로 그 부끄러움을 흘러내려보낼 뿐이다.
여전히 변기 뚜껑은 닫혀있다.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동안 시계 초침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절반을 내려가고, 다시 절반을 올라간다.
아냐, 아냐-
얼굴을 양 손으로 탁- 쳐주고 정신을 일깨운다.
“아냐. 다 괜찮아!
늦겠다, 빨리 나가야지!—”
※
서울 지하철은, 언제나 복잡하다. 정말, 정말이지 사람이 너무 많아—
오르고 내리는 계단, 플랫폼 내부, 열차 안 모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이래서 자취하려고 했던거지. 대학교 오기 전에 몇 번 타봤는데 진짜 장난 아니더라.
..자취 다시 하겠다는건 아직 말도 못 꺼내봤다. 신종 바이러스가 계속 유행중이라 방역 지침도 강화됐다가 완화되기를 반복중이고.
부모님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냥 집에 있기를 바라시지 않을까. 그래도,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가야 내 마음이 원—
—상념에 잠시라도 젖어있지 말라는 듯,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치여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빨려들어간다.
“앗, 죄송합니다⋯!”
죄송- 사과를 다 듣지도 않고, 슬쩍 쳐다보고는 바쁘게 지나간다. 서울은 이만큼 마음이 메마른 도시인걸까.
예전같았으면 속으로 욕부터 했을텐데, 깜짝 놀란 마음은 그럴 새도 주지 않고 사과부터 하게 된다. 뭔가, 마음이 공격적이지 않게 되는데⋯?
으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겨우 승강장에 도착했더니만 줄이 꽤나 길다.
⋯얍! 얍!
한참을 기다리다 지친건지, 꼬맹이가 엄마랑 장난을 치고 있다. 하하, 귀엽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파이오펑치-! 파이오펑치!⋯
얼마나 서 있었을까. 어후, 너무 오래 서 있으면 다리아픈데⋯ 열차, 아! 다행히 지금 오는구나-
지루해지던 차에 드디어 지하철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뚜르르르르르—
덜컹- 덜컹-
[ 지금 서울종대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The train for ⋯ ]
으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가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아 좀 나오고 탑시다, 예?—”
“에헤이- 밀지 마요!”
어어.. 문 닫힐거 같은데? 좀 있으면 문이 닫히고 출발해버릴 것 같아서 꽉 들어찬 사람들을 애써 밀쳐내며 겨우 안쪽으로 들어왔다. 휴우- 너무 번잡해서 열차에 타지도 못할뻔 했잖아.
이렇게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면 온몸에 땀이 난다. 봄이 완연해질수록 날은 더워지고, 사람들은 많아지고, 또 좁은 객실 안은 갑갑해진다.
적당히 빗어내린 머리칼이 헝클어져있다. 아, 입술에 머리카락 붙었네. 보드라운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내고 축축한 땀을 옷자락에 닦는다.
‘하아—’
한 번 열기를 느끼기 시작하면, 쉽사리 식지 않는 것 같다.
이마를 타고 내려온 땀방울이 가는 턱선을 타고 내려와, 가느다란 목으로 흘러내렸다.
‘더워⋯’
모처럼 새로 산 옷인데 땀이 흐르면 더러워지지 않을까. 앗, 혹시 나 땀 냄새 나는거 아니야?
갑자기 얼굴까지 후끈해진다. 읏, 나 진짜 냄새나? 차마 대놓고 고개를 돌리지는 못한채, 마스크를 살짝 들추고는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쉰다.
스으—
부끄러워. 창피해. 냄새가 나지는 않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에 양 팔을 가슴에 붙였다. 그렇게 여자의 체취를 숨겼다.
‘읏, 숨막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서로의 향이 뒤섞이고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 탓일까? 가끔씩 손을 집어넣어 공간을 만들고 공기가 통하게 해보지만 역부족인가봐.
주변에는 온통 나보다 큰 사람들 뿐이야— 덩치에 둘러싸여 편히 움직일 수도 없는 자세로 서 있으려니까 정신이 몽롱해진다.
‘어지러..’
저, 저기⋯ 숨막혀요.. 조금만—
“밀지마세요-”
너무 숨이 막혀서 앞에 서 있는 아저씨의 등을 손으로 꾸욱- 눌러봤는데 돌아오는건 냉담한 반응 뿐이었다.
더워-
답답한 마음에 꼼지락, 꼼지락 팔을 움직여 후드 집업을 벗으니 한결 낫다. 휴- 좀 살 것 같아.
그런데 옷을 벗고 나니 갇혀 있던 몸에서 뜨거운 공기가 후욱 올라오고 얼마나 땀을 흘렸던건지 다 느껴졌다.
‘우으⋯ 쪽팔려’
허벅지 사이로 땀이 흘러내리잖아. 창피해 진짜. 젖가슴을 수줍게 감싸고 있는 속옷도 축축할 정도로 젖어버려서 가슴골에 물이 고여있는 것만 같다.
막상 겉옷을 벗고나니 소매로 가려지긴 했어도 왠지 겨드랑이가 신경쓰인다. 안보겠지?.. 으응,⋯? 보지말아줘, 보면 안된다구—
옷도 젖은거 같은데. 어떡해. 땀난거 티나잖아. 부끄러워⋯.
아직 도착도 안했는데, 어디론가 도망쳐버리고 싶다. 시원한 겨울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옷을 꽁꽁 둘러입고 다니면 이렇게 부끄럽지도 않을텐데, 라며 얼굴을 붉혔다.
괜히 다리를 꼼지락거리고 하아— 하아— 헐떡거리며 부족한 숨을 들이쉬어 본다.
아냐, 아무도 안 보니까 괜찮아⋯ 몸에서 나는 땀도 부끄럽고, 옷 위로 볼록하게 솟아오른 가슴도 부끄럽다. 그치만, 이런거 신경쓰는거 정상 아니라구⋯
봐봐, 아무도 안보잖아, 다들, 그냥 자기 도착할 때만 기다리면서 서 있는거야⋯ 봐, 저사람도—
—!!
나 보는거야? 뭐야, 아니지? ⋯응? 아니지? 어어⋯? 어디 보는거야, 아니야, 앗, 부끄러, 그런데 보지마—
“아으⋯”
안돼요, 보지 말아요. 이거 아니에요, 보면 안대, 읏⋯
“안대요⋯ 읏,”
앗- , 안대, 보지마— 보면 안돼, 히익, 보지 말아요- 흣.. 내 배꼽, 보지마아.. 배꼽 보지마—
“엇, 저기⋯ 크흠—, 미안합니다.”
흣⋯
눈망울이 촉촉하게 글썽이는 여자애를 보면서, 남자는 급히 사과를 하고는 다른 객실로 가버렸다.
하아⋯ 하아⋯⋯
※
“후아아—!”
드디어 도착했어! 헥- 헥- 숨을 내쉬며 겨우 버티니까 어느샌가 학교에 와있더라.
온통 땀 범벅에, 얼굴은 홍조 가득 달아올라있고 갑자기 내 몸을 드러내고 다닌다는 사실이 떠올라 부끄러워 죽을 뻔 했다.
으- 진짜 자취방으로 다시 들어가야겠어. 이런거 타고 통학하는건 도저히 못 해—
그런데, 한참 지하철을 타고 왔더니 또 또 또 오줌이 마려워졌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네.
나, 화장실 가면 어지러워지는데. 솔직히 밖에 나와있을때는 어떻게 해야할 지 대책이 안선다. 집 화장실만 못 가는건가? 모르겠다 정말.
다행히 학교 후문이랑 내 자취방이랑 가까우니까, 잠깐 들려서 해결하면 될 듯 싶은데.
...가서 어떻게 해결할건지는, 읏.. 그런거 말하고 싶지 않아.
※
—페트병, 가방에 들고다녀야겠네.
자취방에 잠깐 들리고나서 깨달았다. 밖에 있을땐 이거 말고 방법이 없을 거야.
아예 집에만 있는거는 말도 안되고, 아무래도 가방은 꼭 들고 다녀야겠지 싶다. 페트병 좀 미리 챙겨놓고. 으음⋯ 몇개를 갖고 다녀야 하는걸까.
시발, 또 한동안 안나오던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내 인생 참 기구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