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0화 〉19화. 외면 (삽화有) (20/80)



〈 20화 〉19화. 외면 (삽화有)




이거, 뭐야⋯?

한참을 헐떡거리면서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의문이 풀리질 않는다.


말도 안되는 추태를 부렸지만, 이건 지금 상황에서 나오면 안되는 거였다. 이럴 이유가 없는 거였다고.

젖었어⋯?


아냐. 절대 아니다. 그냥, 힘이 다 빠져서, 아니⋯ 땀이 나서 그런거야. 응, 땀이야 이건.

그냥,  힘들어서, 더워서 땀을 흘린거 뿐이야. 하하⋯ 방도 후끈하잖아. 더워서 그런거야.


아하하, 나도 참.. 바보같이 침까지 흘려버렸잖아. 아하핫...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방은,   없었던 척을 하며 문을 닫고선 혼자 닦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조금 실수를 했다고 말하고, 절대 들어오면 안된다며 문을 잠궈버렸다.

으응⋯? 아냐-! 그냥, 살짝 실수해서 그래. 내가 닦을테니까! 그래도 좀 창피하니까, 들어오지마. 절대—!


후우⋯.


내가 미쳤지 정말. 좀 힘들고 어지러워도  참고 화장실에서 해결할 거 그랬나봐. 그런데 그건 너무 무서워⋯.



내 다리 사이에 흐른 하아얀 물은 애써 무시한 채, 바닥과 주변을 정리했다.
방을 정리하는 사이, 부모님은   모두 출근하셨고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하고 떠나셨다.

읏, 부끄러워⋯.


집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너무 부끄러워서  손으로 가슴과 사타구니를 가린채 화장실로 급하게 뛰어갔다.




솨아-


솨아아-

샤워기를 벽에 고정시켜둔 채, 밸브를 활짝 열고 세차게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심란함을 흘려내려보낸다.

수도관을 타고 뜨겁게 쏟아지는 물은 때로는 따갑지만 언제나처럼 익숙하기만 하다.


하지만, 물줄기가 몸에 떨어지고 또다시 주르륵 곡선을 따라 흘러내리는게 너무 낯설다.

커져버린 엉덩이나, 한 손으로는 다 잡지도 못하는 가슴이, 그 사이 사이에 꼬옥 꼬옥 감춰져있는 틈새들이 너무 낯설었다.




읏, 살짝 올라오기 시작한 보드라운 털들이지만 음부를 미처 다 가려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래, 거울을 보지 않아도 이젠 알 수 있다. 더이상 내 몸이 예전에 알던 내가 아니라는걸⋯.





화장실을 다녀오기만 하면 울적해진다.


화장실은, 마치 기자들이 모든 비밀을 캐내려는 것처럼, 연약한 나의 신체를 발가벗기고 스포트라이트를 쏟아내듯 따가운 물세례를 내게 들이붓는다⋯.


잔인해. 두려워. 무서워. 피하고싶어.



몸을 옥죄는 듯한 기분에, 옷은 하나도 걸치지 않은채 나신으로 걸어나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어— 무겁게 출렁이는 가슴을 부여잡지도 않은채 방으로 뚜벅, 뚜벅 걸어가는게 너무나도 홀가분하고 또 너무나도 견딜수 없이 무겁다.



방에 돌아와 거울을 보니, 가라앉은 표정의 죄인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연두빛으로 영롱하게 빛나야 할 눈동자는, 빛을 잃고선 죽은 눈을 하고 있다.


도피처가 없는 이 현실이, 무방비하게 해체된  몸과 마음이 너무 괴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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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쳐다보지 말아줘⋯ 내 몸, 내 얼굴 전부 다 괴물이야⋯,어디론가..숨어버리고 싶어⋯.





관성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휩쌓여 있다가도, 정해진 시간이 되면 습관이 몸을 깨워버린다.


아무리 도망쳐도, 끝까지 나를 따라온다. 시간은 도망다니는 사람을 위해 기다려주지 않았다. 9시. 그래, 9시다.


9시는 언제나 1교시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아무리 날씨가 궃어도, 신종 바이러스가 활개를 쳐도, 사회적으로 안좋은 일이 있어도 언제나 그대로  시간이다.


그리고  규칙은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죽은 사람처럼 축 처져있어도 수업은 항상 시작된다.


그래⋯⋯, 인생을 포기한건 아니니까, 수업은 계속 들을 요량이었다. 잘 집중은 안됐지만, 하다못해 출석이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그동안 자리를 지켜온거다.



뭐였더라⋯? 오늘 수업이 뭔지 순간 생각이 나질 않아 핸드폰을 켜고 시간표 앱을 보았다. 아. 오늘 들어야하는 강의는 전공 강의였지.

경제수학 과목은, 모든 교수님들이  해두라고 강조를 했을 정도로 전공과 밀접한 과목이었다.


아무리 수학이 싫은 사람이라도 경제학 전공이라면 필수로 들어야만 하는 전공이란다.

수학은, 싫지 않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과목이다. 사회학들은 서로 자기들이 맞다고 싸우고, 도저히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들이 가득해있다.

하지만 수학은 언제나 정해진 방식으로 정해진 답을 낼 뿐이다. 주관같은건 내려놓은채 시키는대로, 주어진대로 풀면 될 뿐이다.

그래서, 수학은 좋다.



또톡.

출석확인을 하는 여유시간동안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아⋯ 그러고보니 톡을 안본지가 너무 오래됐다.

그동안 내 인생에서 메시지를 주고받는게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안좋은 일 뿐이었던 요 근래에도 톡을 무시하고 있었다.

[강석현] 야, 보면 대답좀 해
[강석현] 너 살아있는거 맞지?



⋯.


답장을 하고싶다. 해도 될까..?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워서, 반응이 무서워서 인간관계를 끊고 도망치려고 했었다.

그치만, 너무 외로워. 나 혼자 쓸쓸하게 지내는건 너무 힘들단 말이야⋯.


도저히 어떻게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하는 수 없이, 어쩌면 비겁하게 도망쳐왔지만 하나뿐인 대학 친구는 포기하지 않고 나를 찾아주고 있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 9건]



아아⋯. 날 잊지 않았구나. 날 계속 걱정해주고 있었구나—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서, 그렇지만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답장을 보낸다.


▷ 미안ㅋ 좀 아팠어

보내도 될까? 고민을 하다가 너무 호들갑떨고 싶지 않아서 정말 쿨하게 톡을 보내버렸다.

오랫만에 보내는 메시지가 너무 어색하다. 말투가 너무 이상한가..? 너무 짧게 보냈나..?

‘왜 아팠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강석현] 아팠다고?
[강석현] 지금은 괜찮아?  혹시 바이러스 걸렸어?


역시 물어보는구나. 근데 바이러스라니, 아냐. 그런건 아냐.

차마 내가 여자가 됐다고 말은 못하겠어서 그냥 몸이 아팠다고 둘러댔다.

▷ 바이러스는 무슨ㅋㅋ
▷ 걍 몸이 좀 안좋았다. 지금은 괜찮아


또톡.


[강석현] 시발 다행ㅋㅋ
[강석현] 니 바이러스면 나도 격리잖아 개쫄았네ㅋㅋ

야이- 내 걱정이 아니라 너 걸릴까봐 그런거였어? 아하핫⋯, 친구랑 정말 오랫만에 톡을 주고받는데 웃음이 살며시 나온다.


 의리없는새끼 ㅋㅋ


[강석현] ㅋㅋㅋㅋㅋ농담임; 알쥐?
[강석현] 너근데 자취방에 없더라? 지금 어디임?

미안해. 걱정해주는 친구에게 말도 없이 도망치듯 본가로 내려와버린게 괜히 그랬나 싶어서 후회되네..

▷  우리집 와있어.
[강석현] 그럼 이제 자취 안하는거임?
▷ 그건 아닌데, 아직  모르겠네. 일단 우리 부모님한테 다시 물어보려고.

그래— 자취는 어떻게 하지. 아직 계약기간이 한참이나 남아있잖아. 학교 다니면서 통학 거리가 멀기도하고 나 혼자만의 공간이 갖고 싶어서 졸업할때까지 살 자취방을 구한거였다.

 시간씩 버스나 지하철에서 시간을 날리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공부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대학생활을 즐길 시간도 줄어드는거니까.

그리고 지금 상태로는 말도 안되지만, 언젠가는 꼭 연애해서 애인도 데려와보고 싶고⋯.

역시, 이건 부모님께 다시 말씀드려봐야 할  같다.


그래도 학교를 다닐거면, 자취를 계속 하는게 낫지 않을까?⋯ 솔직히 학교를 다닐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석현쓰는 너무 오래 못보는거 아니냐며 다음에 한 번 만나서 밥이나 먹자고 그랬다.


[강석현] 내가 사줄테니까 밥먹으러 나오셈ㅋㅋ 빼지말고 ㅅㅂ
▷ ㅇㅋㅇㅋ 시간될 때 톡보낼게.


담담하게 톡을 보냈는데, 가슴이 지릿지릿 아파온다. 변해버린 내 모습을 보고도 계속 친구로 있어줄까. 날 피하는건 아닐까—






 ⋯그래서 지난번에 배운 행렬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복습하도록 할게요? 우리 경제학과 학생들이라면 선형대수를 쓸 일이 생기니까 알파 치X 책을 잘 풀어두시구요. 아셨죠? 하하, 혼자 말하는게 아직도 적응이 잘 안되네요. 마이크 되는 사람 아무나, 누가 대답  해 보세요⋯⋯ ’

역시나 그렇게 카메라와 마이크를 켜라고 공지를 했는데도, 대부분 눈치보면서 껐다 켰다를 반복하더라.

나도 거기에 편승해서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변해버린 내 모습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어떻게든 피해가려고, 캠 설정만 만지작대며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딴 생각으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던 차에, 갑자기 허공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띠링?



시발—!, 잊고있었는데.  시작됐다. 씨발, 또 시작됐다.  시작됐다. 띠링, 까먹고 있었는데, 시작됐다. 띠링, 잊었는데, 시작됐다. 띠링, 띠링 소리가 또 시작됐다. 잊고있었는데, 잊고있었는데—!!



아악, 악-, 아아악—!!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서 가려보고, 아무 소리도 못듣게 막아보고, 귀를 거칠게 쥐어뜯고, 머리를 부여잡아봐도 말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 [미션] 여자답게 화장하기 (1/3)

듣고싶지 않아, 싫어, 싫어어—!!

>> [미션] 여자답게 화장하기 (1/3)
>> 축하해요! 정말 아름다워요. 하지만 그렇게나 아름다운데도 꾸미지 않는건 너무 아쉬운 일입니다.
>> 다른 여자들처럼 얼굴을 정성스럽게 메이크업해보세요.
>> 보상 : 당신의 자존감이 약간 상승합니다.
>> 제한시간 : 없음
>> 주의사항 :  미션은 연계 미션입니다. 다른 미션도 함께 완료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아아아⋯!
듣기 싫은데, 미션의 내용이 자꾸만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온다.

꿈에 나왔던 그 여신과 비슷한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내가 여자가 되어버린걸 축하해주고 있었다.

축하한다고, 정말 아름답다고— 아니야. 이건 내가 정말로 원한게 아니라고. 마치 순간의 잘못된 판단을 해버린 날 비꼬는 것만 같잖아.

남자가 무슨 화장이냐고⋯! 기초화장품을 바르고, 피부관리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무려 여자처럼 메이크업을 하라는 거잖아.


여자애처럼 거울 앞에 앉아서 볼터치를 하고, 섀도우를 칠하고, 아이라인을 채우고⋯ 그런걸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미쳐버릴 것만 같다.

띠링-

또,  미션이 생겨버렸어. 하나로도 모자라는 거야? 대체 뭘 더 시키려는 건지, 거부하고싶고 미워서 참을 수가 없다.


>> [미션] 여자답게 옷입기 (2/3)
>> 아름다운 몸을 방치하지 마세요. 자신감을 갖고 예쁘게 치장해도 좋아요.
>> 다른 여자들처럼 옷을 꾸며입으세요.
>> 보상 : 당신의 자존감이 약간 상승합니다.
>> 제한시간 : 없음
>> 주의사항 : 이 미션은 연계 미션입니다. 다른 미션도 함께 완료해야 다음으로 넘어갈  있습니다.


아- 시발, 진짜- 이건 진짜 아니잖아. 대체 왜 이러는거야. 내 몸 숨기고 싶은데, 남자다운 구석은 하나도 없이 볼록하게 살이 오른 이 몸이 너무 싫다고.


그런데 내 몸에 맞는 옷을 꾸며 입으라니. 너무 잔인하다. 여자옷을 입혀서, 남자였다는 증거를 남김없이 지워버릴 생각인거야?—

띠링-


이제 그만해⋯ 또, 또 미션이야. 하나만으로도 감당할  없을 만큼 벅차단 말이야.


머리를,  여자처럼 가꾸라는거야. 순식간에 길어진  머리카락도, 다 잘라내버리고 싶다고—

>> [미션] 여자답게 머리하기 (3/3)
>> 헤어를 관리해주지 않으면 예전처럼 또다시 부스스해질거에요.
>> 다른 여자들처럼 시간을 투자해서 헤어스타일을 가꾸세요.
>> 보상 : 당신의 자존감이 약간 상승합니다.
>> 제한시간 : 없음
>> 주의사항 :  미션은 연계 미션입니다. 다른 미션도 함께 완료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또, 또 이런 미션들 뿐이야—
날 자꾸 괴물로 만들려고 하지마⋯ 치랑치랑한 머리 너무 싫단 말이야. 나한테 이런거 시키지 말아줘⋯.



아아아, 아아⋯ 아아악——⋯!!!


 이런거 못해. 남자는 이런거 안 한다고. 못해, 이런거 절대로 못해. 인정 못해—




절대로 안할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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