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노예 신입사원 (1)
노예 신입사원 (1)
"왜 그러지, 왜 가만히 있는거야!?"
대기업 무역상사인 "헤르메스상사"의 신입사원 인터뷰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질이 낮은 질문에, 은비는 거의 패닉에 빠졌다. 청초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공포에 질려 창백하게 굳어져 있었지만, 그 애처로운 표정조차도 남자들의 눈에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갸름한 얼굴에 하얗고 매끄러운 살갗이 돋보였다. 조금 진한 눈썹이 가늘게 곡선을 그리고, 길게 찢어진 아몬드형의 눈에는 한점의 오탁도 없는 맑은 눈동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들 것 같은 커다란 눈동자였다. 높고 또렷한 콧마루에서는 기품이 느껴졌다.
"이것 참! 좋아, 그럼 질문을 바꾸도록 할까? 지금까지 경험한 사람이 몇명이지?"
은비는 당황한 듯 입술을 반쯤 벌렸다. 베이지 핑크의 립스틱이 칠해진 얇은 입술이 애처로운 느낌을 주었다.
"저, 경험이라면..."
면접관인 찬호가 짜증섞인 표정으로 노려보자, 은비는 움찍 무심코 몸을 뒤로 뺐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얌전 떠는거야? 체, 그렇게 내 입에서 노골적인 말이 튀어나오 길 원한다면 말해 주지. 그러니까, 지금까지 몇명의 자지를 보지에 담겄냐고. 이제 무슨 말인지 똑똑히 알겠지?"
"아..어떻게 그런 말을.."
은비는 얼굴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은비는 명문여대인 "청심여자대학"의 4학년으로, 지금껏 줄곧 품위 있는 환경에 둘러싸여 지내왔다. 당연히 성기를 뜻하는 노골적인 말은 지금까지 한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물론 그녀 주위의 사람들도 그런 말을 쓰지 않았다. 단지 그런 속칭이 있었다는 걸 지식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찬호의 옆에 앉아 있는 상무인 대철은 올백으로 빗어넘긴 머리를 한 손으로 매만지며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찬호의 성희롱에 가까운 폭언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어서, 대답해 봐. 싫으면 여기서 당장 나가던지."
"싫어요. 그런 사적인 경험은 면접과는 상관 없는 일이에요."
어깨 밑으로 내려와 있는 은비의 긴 생머리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매혹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은비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찬호는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은비는 공포를 느끼며 몸을 웅크렸다. 희망과 자신감에 차 있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대신 가학적인 욕정을 부추기는 피학에 젖은 애처로운 표정을 띠고 있었다. 찬호가 손을 뻗어 은비의 턱에 손을 갖다대었다.
"아...!"
그리고 억지로 고개를 들자, 은비의 얼굴에 두려움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녀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특히 가슴의 볼륨이 흔들리는 모습은 애처로웠다.
모델 같은 날씬한 체형이지만, 가슴과 엉덩이는 육감적이고 살이 올라 있었다.
"왜 관계가 없어? 이 질문은 면접과 관계가 있거든. 회사는 일을 하는 신성한 곳이야. 우리 회사에 남자를 홀리는 음란한 여자가 들어오면 곤란하거든. 네가 얼마나 순결한지 알아 둘 필요가 있는거야."
'날 음란한 여자 취급하지 마!'
굴욕과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은비는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왜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그래. 불만이 있는 모양인데, 할 말 있으면 말해 봐."
차가운 말투로 내뱉은 찬호가, 이번에는 은비의 뺨을 손바닥으로 다독거리 듯이 쓰다듬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볼이 미묘하게 떨리고 날씬한 얼굴 라인이 파르르 떨렸다.
"으으..."
은비는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개나 고양이를 다루는 듯한 찬호의 태도가 은비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대로 나가 버릴까?'
은비의 머리 속에 한순간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금 자신이 왜 이런 모욕적인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찬호에게 은비는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상무와 인사부장 앞에서 찬호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는 없었다.
* * *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정말,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교수님에게 확답을 받을거야. 오늘은 그냥 물러서지는 않을거야.'
은비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학과 교수인 한민의 교수실로 찾아왔다. 은비는 한민 교수를 존경하고 따랐다. 하지만 근래 들어 한민 교수에 대한 신뢰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가을로 접어들었지만, 은비는 채용내정을 받은 기업이 한 군데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몇 군데 채용내정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한민 교수의 권유로 그것들을 모두 거절해 버린 것이다.
은행과 상사, 보험사 등 몇 군데의 일류기업으로 부터 채용내정이 들어온 은비에게 한민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헤르메스상사에 교수 추천장을 써줄테니, 다른 회사의 내정을 물리치라고 말한 것이다. 그 제안은 은비에게도 결코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헤르메스는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하는 환상의 직장이었다. 교수추천으로 입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 채용내정을 받아, 얼마남지 않은 대학생활을 즐기고 있었지만, 은비는 아직 한민 교수의 교수 추천장을 받지 못할 상태였다.
"무슨 일이야? 심각한 얼굴을 하고. 맑은 미소가 어울리는 은비는 어디로 가 버린 거야?"
한민은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며, 은비에게 의자를 권했다. 명문여대 교수답게 한민은 50대 후반의 점잖고 지적인 신사 같은 인상을 풍겼다. 희끗희끗한 머리는 가운데에서 약간 왼쪽으로 갈라져, 귀가 절반 정도 머리카락에 숨어 있었다. 안경을 쓴 모습이 잘 어울리는 지적인 얼굴이었다.
강의의 수준은 꽤 높았지만, 풍부한 유머를 섞어 알기 쉽게 강의를 풀어나가는 스타일이라 학생들 사이에서도 한민은 인기가 많았다.
"사실은..교수님, 교수님이 약속한 헤르메스 상사에 대한 추천장 때문에...아직 더 기다려야 하나요. 부모님도 슬슬 걱정하시는 눈치여서 더 이상 기다리기는 힘들 것 같아요..."
은비는 절박한 모습으로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한민은 미소를 짓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웃으면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평소에는 딱딱해 보이는 인상이 상냥하게 바뀌었다.
"은비야..그렇게 나를 원망하지 마.. 그러면 내가 일부러 은비 너를 속인 것 같잖아..하하하"
"아, 아니에요..저는 그런 뜻으로 말씀 드린 게 아니에요, 교수님. 그치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너무 불안해요."
은비는 물론 한민 교수를 존경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영문학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데도, 학생들에게 거만한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늘 상냥하게 학생들의 상담에 응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생활하고 있는 은비에게는 부모 같은 존재라고 해도 좋았다.
"그래, 알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근데 이제 안심해도 괜찮아. 헤르메스에 은비 너를 정식으로 추천했어. 그리고 채용내정도 결정됐어."
"정말이세요? 고맙습니다, 교수님. 뭐라고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면접 일정도 결정됐어. 물론 면접은 형식에 지나지 않아. 면접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한, 입사는 거의 확정적이야."
내정이라는 말에 은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때 은비의 눈에 소파 안쪽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아, 소개가 늦었군. 이쪽은 헤르메스상사의 박찬호씨."
찬호는 일어서서, 은비에게 가볍게 목을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은비라고 합니다."
은비는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찬호는 척 보기에도 일류 상사맨의 눈빛과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머리는 깔끔하게 매만져 뒤로 빗어 넘기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과 근육질인 체형은 스포츠 선수를 떠올리게 했다.
"사실...이렇게 시간이 걸린 건, 이번 추천이 꽤 어려웠기 때문이야. 아니, 솔직히 말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어."
"네!? 그치만..교수 추천장이 있으면 채용내정을 받을 수 있다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은비는 놀란 얼굴로 한민를 쳐다보았다.
"그게 말이야, 올해부터 추천 조건이 까다로워졌거든. 은비처럼 혼자 사는 여대생은 추천에서 빼달라는 요구가 있었어. 나도 나중에 알았어. 은비 네가 이미 다른 채용 내정을 모두 거절한 뒤에 말이야. 나도 나름대로 애를 썼거든. 헤르메스의 사장과 직접 대화를 했으니까."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은비는 한민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이 자신을 위해 그렇게까지 노력한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좀처럼 해결이 안 됐거든. 그 때 나를 위해 힘써 준 사람이 여기 있는 찬호씨야. 찬호씨가 노력한 덕분에 은비 너의 내정이 결정될 수 있었어."
"정말 고맙습니다."
은비는 살짝 찬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전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한민 교수님에게는 옛날부터 이것저것 신세진게 많아서요. 교수님이 곤란해 하시는 것 같아, 옆에서 조금 도왔을 뿐입니다."
"내가 듣기로는 이번 건으로 인사부장과 각을 세웠다고 하던데. 이번 일로 인사부장의 눈 밖에 나서 자네만 힘들어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한민 교수님이랑 찬호씨가 나 때문에 무척 애를 쓰셨구나...'
"은비야 너에게 한가지 해 둘 말이 있구나. 내 이름을 걸고 너를 추천했으니, 부디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해 주렴. 은비 네가 회사에 피해를 끼치게 되면 나도 연대책임을 지고 교수직을 사임한다고 인사부장에게 말해 놓았거든. 부디 내 목이 날아갈 짓은 삼가해 주렴. 하하하."
"물론이에요, 교수님. 절대 교수님에게 폐가 되는 일은 없을거에요."
한민은 반 농담처럼 말했지만, 은비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몇 개월 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헤르메스의 직원인 찬호가 채용내정을 약속했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보장은 없었다.
'모두가 들어가고 싶어 하는 꿈의 직장, 헤르메스에 입사하게 된거야! 교수님과 찬호씨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지..'
은비는 부푼 가슴을 안고, 상쾌한 기분으로 교수실을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