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3 후일담 (1)
오빠는 안녕 이라는 말과 함께 내 방에서 나갔다.
멍하게 닫혀버린 방문을 쳐다보며 오빠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빠가 우리 사이를 알고 있었다는 말.
내가 졸업할 때까지 연락도 만나지도 할 수 없다는 것.
괜찮지 않다는 오빠의 말.
... 그리고 날 사랑하는지 모르겠다는 오빠의 말.
오빠가 눈물을 닦아줬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지막 내게 남아있던 오빠의 온기는 덧없이 사라졌다.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조그맣게 몸을 웅크린 채로 눈물을 흘리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 나는 깨어났다.
불편한 자세로 있었더니 온 몸이 삐걱거렸다.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일 바로 떠난다는 오빠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대로 방을 박차고 나가 오빠의 방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오빠는 이미 집에서 나가고 없었다.
짐을 챙기고 몇 가지의 남아있는 물건이 이 방에 오빠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지만 엘리베이터는 다른 층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기다릴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계단을 박차고 1층으로 내려갔다.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뛰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져 넘어져 발목이 삐고 부딪힌 무릎에선 피가 났다.
나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지만 역시 오빠는 없었다.
"이대로 가버리는 게 어딨어..."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대로 휴대폰을 꺼내 오빠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다.
이대로 가버리는 게 어디있냐고.
적어도 제대로 인사는 하고 가야하는거 아니냐고
오빠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불현 듯 떠오른 오빠의 말에 손가락이 멈추었다.
널 사랑하는지 모르겠다는 오빠의 말.
... 지금 연락을 했다가 번호도 바꾸고 더 꽁꽁 숨어버리면 어떡해?
역시 잠깐도 못 기다린다며 역시 우린 안 된다고 멀어지면 어떡해?
차마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그대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또 이렇게 나는 오빠를 기다려야 하는 거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야 삐어버린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벌써부터 발목은 빨갛게 부어오르고
무릎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상처에 약을 발랐다.
소독약을 바르고 있다 보니 눈에선 또 눈물이 흘렀다.
소독약이 따가워서 그런 거야...
나는 애써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눈물을 닦고 상처위에 반창고를 붙였다.
하지만 반창고를 붙이고 나서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눈에선 고장이 난건지 수시로 눈물이 흘렀다.
소파의 빈자리를 봤을 때
오빠의 방문이 눈에 들어왔을 때
휴대폰 갤러리 속 오빠와의 사진을 봤을 때
메신저를 열었더니 제일 위에 오빠와의 대화창을 보았을 때
그것 말고도 일상의 사소한 행동을 할 때에도 계속해서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엄마는 많이 걱정을 하셨다.
"딸..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남자친구랑 헤어져서 그래.""... 혹시 저번에 엄마가 했던 말 때문이야..?"
"아냐..."
엄마 때문이 아니라고 대답을 했지만 눈에선 눈물이 또 흘렀다.
아빠는 그런 내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돌리셨다.
나는 방안에 틀어박혀 매일매일 오빠와 했던 대화내역과 오빠와 찍었던 사진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그때마다 방안에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주말에 요리를 하다가 그만 손이 베어버렸다.
꽤나 깊게 베인 건지 피가 뚝뚝 흘러 바닥을 적셨다.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핥았더니 그날이 또 떠올랐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오빠에게 벌이라며 오빠의 손가락을 깨물었던 날.
피가 뚝뚝 흐르는 손가락에선 고통이 느껴질 법도 했지만 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손가락에서 흘러내린 피가 발을 적시고 있었다.
발톱에도 피가 튀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발톱에 빨간색의 페디큐어를 칠한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보니 엄마가 방에서 나온걸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엄마는 피를 흘리는 내 모습을 보곤 깜짝 놀라 내게 달려오셨다.
내 상처를 보시고 급하게 구급상자를 열고 내 손에 거즈를 대고 감기 시작하셨다.
서서히 피가 멎고 상처의 약을 바르고 위로 붕대까지 감았다.
그러고나서 엄마는 나를 꼭 껴안고 우셨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나를 망가뜨린 건 오빠라며 자책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오빠도 없어져버렸는데 엄마까지 아프게 할 순 없어...
나는 조금 정신을 차리고 엄마를 껴안았다.
"아냐.. 그냥 손가락이 조금 베인 것뿐이야."
나는 엄마의 등을 토닥거리며 진정시켜드렸다.
그 날부터 조금 정신을 차렸다.
오빠의 사진을 보는 빈도도 조금 줄였다.
그리고 오빠를 잊고 싶어서 공부에 몰두를 했다.
매일 최대한 학교에 오래 남아 집에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괜히 집에서 비어버린 오빠의 방을 보면 마음이 더 아파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늦게 집에 돌아올 때면 오빠와 함께 했던 밤의 산책이 떠올랐다.
집에 가는 길이면 오빠와 함께 갔던 편의점을 힐끗 쳐다보게 되었다.
가끔 테이블에 앉아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착각을 하기도 했다.
오빠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라고 생각은 했지만
몸은 벌써 편의점을 향해 뛰고 있었다.
편의점에 도착해 얼굴을 보고나면 역시나 오빠가 아니었다.
그때마다 항상 나는 실망한 채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평일, 주말할 것 없이 똑같은 나날이 흘러갔다.
내겐 매일이 그저 다람쥐 쳇바퀴를 돌듯이 매일이 똑같았다.
오빠가 없는 나날은 마치 색을 잃어버린 듯 무채색의 나날이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계절은 지나 다시 또 겨울이 다가왔다.
1년이 지나도 딱히 달라진 모습은 없었다.
아,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오빠의 사진을 봐도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그저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묵직한 답답함과 따끔함이 느껴질 뿐이었다.
또 시간이 지나 새해가 다가왔다.
12월 31일 자정, TV에선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휴대폰을 붙잡고 뚫어져라 쳐다봤다.
...새해니까 1년 지난거 아닐까?
연락해도 괜찮은거 아닐까?
하지만 졸업할 때까지 연락하면 안 된다는 오빠의 말이 떠올랐다
... 졸업하고 나서라고 했지.
오빠에게 보내려던 문자를 한참이나 보다가 결국 메신저를 닫았다.
문자를 보내는 대신 오빠의 프로필을 열어보았다.
사실 매일 습관처럼 오빠의 프로필을 열어보게 되었다.
... 혹시 그새 여자 친구가 생긴 건 아니겠지?
SNS도 염탐하고 싶었지만 오빠는 SNS를 하지 않았기 떄문에 그저 프로필사진만을 매일 체크할 뿐이었다.
다행히도 오빠의 프로필사진은 1년째 변함이 없었다.
부디 오빠의 사랑도 변하지 않았으면...
나는 작게 소망을 빌고는 휴대폰을 끄고 잠에 들었다.
**
1년과도 같이 느리게 한 달이 지나고 어느덧 졸업식 날이 다가왔다.
드디어 오빠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일주일 전부터 무슨 옷을 입고 어떻게 하고 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전날엔 부담감과 불안함에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침에 화장을 하는데 화장이 잘 먹지 않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
정작 졸업식은 금세 끝나버렸다.
학사모를 쓰고서 혹시라도 오빠가 오진 않았을까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결국 오빠는 오지 않았고 대신 부모님과 사진을 찍었다.
부모님은 축하한다며 내게 꽃다발을 주셨다.
예쁜 연보랏빛 라일락과 새하얀 안개꽃으로 된 꽃다발이었다.
"오빠는 출근하느라 못 온다더라. 대신 꽃다발을 전해달라더라."
평범하게 보였던 꽃다발이 갑자기 너무나도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는 혹시라도 꽃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꽃다발을 들고서 사진을 찍었다.
친구들이 졸업식기념으로 함께 놀러가자고 했지만
다 거절하고 곧바로 오빠의 집으로 찾아갔다.
주소를 알려주진 않았지만 간간히 엄마가 오빠에게 반찬을 보낼 때 주소를 적어두던걸 몰래 기억해두었다.
휴대폰 속 잠긴 메모장을 열고 오빠의 집주소를 보고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혹시라도 꽃이 상하지 않게 신경을 썼다.
택시 안은 곧 향긋한 라일락의 향기로 가득찼다.
향기를 맡다보니 문득 꽃말이 궁금해져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았다.
라일락의 꽃말을 검색해보니 젊은날의 추억이라는 뜻이 나왔다.
... 그냥 평범한 졸업축하선물인가.
약간 실망하고서 인터넷 창을 닫으려던 그때 첫사랑이라는 꽃말도 있다는 걸 보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살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 화장 번지면 큰일인데...
나는 고개를 위로 들고서 애써 눈물을 참아냈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려 오빠의 집 앞으로 찾아갔다.
아무 생각 없이 현관문 앞까지 왔지만 지금 시간이면 오빠가 있을 리가 없었다.
현관문에 귀를 대보았지만 안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떡하지.. 근처에서 기다릴까...
아니면 오빠에게 전화나 문자라도 해봐?
하지만 1년만에 보는 오빠인데 처음은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꾹 참았다.
근처 카페에서라도 시간을 보내야지라고 몸을 돌리려던 그때
혹시 집안에 여자의 흔적이 있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또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몇 번만 눌러보자..."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도어락을 눌러보았다.
오빠의 생년월일, 휴대번호 뒷자리 등 오빠와 연관된 번호는 모두 다 쳐보았다.
하지만 도어락에선 매번 삑삑삑거리며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경고음만이 났다.
"오빠가 비밀번호 뭘로 하는지 알아둘걸..."
뒤늦게 조금 후회가 들었지만 나는 포기하고서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내려가 공동현관으로 나왔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시 뛰어서 엘리베이터로 갔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는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뛰어서 오빠의 집 앞까지 다시 찾아갔다.
계단을 뛰어올라왔더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쉬며 떨리는 손끝을 부여잡고 도어락에 내 생일을 쳐보았다.
삐리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나는 그만 눈 화장이 번져버렸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보니 오빠의 집은 뭔가 텅비어보였다.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것들만 있는 것 같았다.
화장실이나 다른 곳을 둘러보아도 다행히 다른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확인을 하고 나자 불안함이 조금은 없어졌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직 오빠가 오려면 시간이 한참 남아있었다.
"아직 오빠가 오려면 한참 멀었는데 어떡하지..."
주위를 둘러보니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젠 오빠의 체취가 사라진 본가의 침대가 아닌 어제 밤에도 오빠가 잠들었을 침대.
살며시 침대로 다가가 그 위에 조심히 앉았다.
오빠의 베개를 껴안고 냄새를 맡았다.
무언가 안심이 되는 향기가 났다.
나는 그대로 침대위로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그대로 슬금슬금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마치 오빠에게 안긴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졌다.
"아.. 안되는데... 일어나야하는데... 누워있으면 옷도 구겨지고 열심히 세팅한 머리도 흐트러지는데..."
일어나야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 5분만 있다가 일어나자."
하지만 어제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했던 나는 오빠의 베개를 껴안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한참동안 자고났더니 몸이 가벼웠다.
기지개를 펴며 창문을 보니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헉 진짜 미쳤나봐....!"
나는 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이랑 머리와 화장을 손질했다.
손질을 마치고 나는 소파에 주저 앉았다.
... 침대에는 앉아만 있을 자신이 없었다.
소파에 앉아있다보니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점심도 거르고 오는 바람에 배가 고팠다.
그래도 저녁은 오빠와 함께 먹고 싶었기 때문에 배고픔을 참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어보니 안에는 물과 엄마가 보내준 약간의 반찬이 다였다.
"대체 뭐 먹고 사는거야.. 매일 배달만 시켜먹는 건 아니겠지..?"
텅 빈 냉장고를 보니 조금 마음이 아팠다.
이번 기회에 오빠에게 요리를 해줘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나는 급히 근처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왔다.
혹시라도 미리 음식을 했다가 식으면 안 되니 밑준비만 해둔채로
다시 오빠를 기다렸다.
하지만 해가 지고 밖이 어두워져도 오빠는 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오빠의 직장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셨다.
명절에도 주말에도 본가에 바쁘다고 집에 오지 않았다.
그때는 직장의 문제가 아닐 꺼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늦게 오는걸 보면 정말 바쁜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이렇게 고생하는건가 싶어서 마음이 또 아파왔다.
"아냐 정신차리자."
찰싹하고 뺨을 치고 정신을 차렸다.
그날 그렇게 새벽에 몰래 떠나버린 오빠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소파에 앉아서 휴대폰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젠 습관처럼 오빠와 함께 찍은 사진을 또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회사일이 아니라 데이트하느라 늦는 거라면?
사내연애라도 하고 있는 거 아니야?
불안함에 한동안 뜯지 않았던 엄지가 입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최대한 자제를 하고 손톱이 부러지진 않을 정도로 약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불안함에 익숙해져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오빠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