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2 재회 (완)
새해가 되었지만 여동생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붙잡고 보며 여동생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그후에도 여동생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어느덧 1월이 지나 2월이 되었고, 여동생이 아닌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음 주 금요일이 동생 졸업식이라는데 올 수 있니?]
... 벌써 졸업식 시즌인가.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았다.
[아니 난 출근해야지. 못가는 대신 꽃다발이라도 보낼게.]
[그럴래? 많이 바쁜가보네... 그 직장 괜찮은 거 맞니?]
이제와서 여동생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연차나 휴가는 충분히 남아있었고, 못 가는게 아니라 안가는 것인데
사정을 모르는 어머니는 이상한 방향으로 걱정을 하셨다.
무슨 직장이 그렇게 바쁘냐고, 사실 밥도 못 챙겨먹고 다니는 건 아니냐고 한참동안 나에 대한 걱정을 하셨다.
어머니 마음속에서 내 직장에 대한 평가가 뚝뚝 깎여나가는 듯 했다...
나는 본의아니게 열심히 회사에 대한 변론을 하고나서야 통화를 끊을 수 있었다.
어머니와 통화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서 한탄하듯이 혼잣말을 했다.
"졸업식을 간다고해도 어떤 얼굴로 여동생을 봐야할지 모르겠는걸요..."
여동생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마치구질구질하게헤어진 전남친처럼 여동생의 프로필사진을 열어봤다.
1년 전부터 여동생의 프로필 사진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 연애중은 아닌가?
아니면 티를 안 내는 걸까.
나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으려나...
피가 안 이어졌다곤 해도 근친은 좀 그랬지..?
나는 혼자서 중얼거리며 자기변명만 잔뜩 늘어놓는 내 모습이 너무 추하게 느껴졌다.
나는 혼잣말을 그만두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엎드렸다.
그래도 여동생과 평생 마주치지 않는 건 불가능할 텐데...
만나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하는걸까...
무시해야하나? 아니면 아무 일도 없었던 척을 하는 게 나으려나.
여동생에게 들키기 전,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고 딱딱하게 말을 하던 여동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건가.
돌아갈 순 있는 걸까. 그때보다 못한 취급이 되는 건 아닐까.
그런 고민들을 하다가 나는 잠에 들었다.
엎드린 채로 잠들었더니 침이라도 흘린 건지 베개가 축축했다.
나는 메말라 붙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한번 닦아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근 전 씻기 위해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 어제 밤에 괜히 라면 먹은 건지 눈이 부어있었다.
나는 붓기를 빼기 위해 찬물로 한참동안 세수를 하고서야 출근 할 수 있었다.
**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다음 주 금요일이 되어있었다.
내 일상엔 딱히 변화가 없었다.
나는 평소대로 출근을 했다,
꽃다발은 무슨 꽃을 보낼까 고민하던 끝에 라일락과 안개꽃을 조금 섞어서 보냈다.
꽃다발을 보낸 뒤 졸업식에 대한 건 잊어버리고서 일을 했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 부모님이 여동생의 졸업식 사진을 보내주셨다.
꽃다발은 잘 도착한 건지 여동생은 손에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사진 속으로 1년만에 여동생의 모습을 봤다.
여전히 여동생은 아름다웠다.
... 그세 더 예뻐진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겠지만.
점심이 되기 전 잠깐 옥상에 올라가 바람을 쐬었다.
한동안 옥상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옥상에서 내려오면서 여동생과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지워버렸다.
... 이러는게 맞겠지.
그리고 그날은 잔업까지 하며 야근을 하고 늦게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갔더니 나를 반기는건 평소처럼의 어둠이 아닌 밝은 형광등의 불빛이었다.
고개를 들어 집 안을 바라보니 소파에 여동생이 앉아있었다.
... 솔직히 말하자면 깜짝 놀랐지만 애써 놀라지 않은 척을 했다.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가며 여동생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집 주소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뭐래.. 매번 집에서 반찬 얻어먹는 주제에 어떻게 모르겠어."
"...그럼집 안에는 어떻게 들어왔는데?"
"대충 비밀번호 몇 개 쳐보니까 맞던데?"
이번에 놀란 걸 숨기지 못하고 몸이 잠깐 굳어버렸다.
비밀번호 바꾸는거 깜빡했네...
나는 이번에도 애써 아무렇지 않는 척을 하며 냉장고를 열어봤다.
"뭐라도 마실래?"
하지만 냉장고 안에는 작년의 마지막에 사두었던 맥주 2캔만이 남아있었다.
... 이거 버리는 것도 깜빡했네.
나는 냉장고 안을 보지 못한 척 다시 닫아버렸다.
"미안, 집에 뭐가 없네. 커피라도 마실래?"
"아니 됐어."
여동생은 내게는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저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이러고 살았던 거야? 집이 휑한데?"
"... 왜 있을 건 다 있는데. 그건 그렇고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야?"
"졸업식 끝나고 바로 왔어."
"많이 기다렸겠네.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야근 안하고 빨리 왔을텐데."
"... 오빠에게 전화나 문자를 하고 싶지 않았어."
생각보다 싸늘한 여동생의 반응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집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여동생은 조용히 옆에 앉으라고 눈짓을 했다.
나는 소파의 여동생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여동생이 침묵을 깨고 질문을 했다.
"오빠는 나한테 할 말 없어?"
"..."
어떤 말을 해야할지 아직은 몰랐기에 나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여동생은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시작했다.
"그래. 그럼 나부터 이야기할게."
"그날 오빠가 떠나가고 나서 나 많이 힘들었어."
"오빠에게 상처를 남긴 것도, 작별인사도 못해준 것도 많이 후회했어."
"... 그 뒤에 나한테 상처도 많이 냈어."
"근데 그러니까 엄마가 너무 많이 힘들어하시더라고."
"엄마가 날 붙잡고 우시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어."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오빠가 너무 괘씸한거 있지?"
"멋대로 나가버리고 말이야.."
"그래서 다시 만나면 뺨정돈 때려주려고 했어."
"... 지금이라도 때릴래?"
"아니, 지금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아."
여동생은 나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뒤로 오빠를 잊으려고 공부에만 매진했지."
"덕분에 교수님 추천서도 받고 곧 취직할 것 같아."
"아 그래? 축하해."
축하인사를 했는데도 찌릿하고 여동생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오빠한테 화풀이도 할겸 다른 남자를 만나볼까 생각도 했어."
"..."
괜히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나에겐 그럴 자격조차 없는데.
여동생의 말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근데 안되겠더라."
"단 한순간도 오빠를 잊을 수가 없었어."
"밥 먹을 때도, 공부할 때도, 어딘가 다쳤을 때도"
"항상 오빠 생각이 먼저 났어."
"그리고 오빠 생각 날때마다 울었어."
"..."
여전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빠는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어."
"오빠가 무엇 때문에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끼는건지에 대해서 생각해봤어."
"날 망가뜨렸다고 생각해서 죄책감을 느낀다고 했지?"
".. 그래서 난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어."
"오빠가 이 잘못된 관계를 시작했다는 거에도 죄책감을 느꼈다고 했지?"
"솔직히 잘못된 관계라는 말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오빠가 이 관계를 시작해버린게 미안했다면 이번엔 내가 시작하면 되는거겠지?"
떨리던 여동생의 목소리가 다시 또렷해지고 의지로 가득찼다.
"오빠는 날 떠났지만 난 놔주지 않을 꺼야."
"오빠, 약속한 1년이 지났어. 이젠 오빠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머릿속엔 너무 많은 말이 떠올라 결국 입 밖으론 한마디도 나오지 못했다.
여동생은 이젠 나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여동생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나 그동안 오빠 생각을 많이 했어.."
"...응."
"오빠가 너무 많이 보고 싶었어."
"...응."
"오빠 생각에 많이도 울었어."
"...응."
여동생의 말이 멈추고 다시 침묵이 집 안에 내려 앉았다.
여동생은 이따금 입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여동생은 나를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난 여전히 오빠를 사랑해."
여동생은 다시 고개를 들고 희미하게 웃으며 날 바라봤다.
"... 오빠는 날 사랑해...?"
다시 그 날이 떠올랐다.
여동생과 헤어지던 그날, 그때의 장면.
그 날에도 여동생은 마치 손을 대기만 해도 깨지고 사라질 듯 한 살얼음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날 하지 못 했던 것을 해야 했다.
나는 여동생을 으스러질 듯 강하게 껴안았다.
깨질 것 같다면 차라리 부서지고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서내게 박혀오라.
그렇게라도 나는 너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었다.
망가진다고, 깨져버린다고 해서 널 놓진 않을 꺼다.
망가지고 형태가 바뀐다해도 소중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여동생을 껴안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에 여러 가지 말들이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이런 저런 말들이 가라앉고나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말을 꺼내었다.
"나도 사랑해. 하윤아."
... 처음으로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을 속삭였다.
여동생의 희미했던 미소는 다시 한번 부서지고 눈에선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졌다.
그 날과 같은 눈물이었지만 오늘의 눈물은 마치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제 다신 널 떠나진 않을게.그게 널 떠났던 내 마지막 속죄고,사랑이야.
나 또한 다시 한 번 여동생을 꽉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