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1 기다림
인적없는 새벽, 조용히 나는 집을 떠났다.
집에서 나오긴 했지만... 사실은 아직 이사할 집 계약도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대로 집에서 지낸다면 여동생과 마주칠때마다 나도 여동생도 너무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이르지만 집에서 나와버렸다.
...아니 도망쳤다라고 해야겠지.
새로운 집을 계약하기 전 며칠간은 근처에 사는 친구의 자취방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친구는 뒤늦은 가출이냐고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고 받아주었다.
그렇게 며칠간 집을 알아보고 계약한 뒤 이사를 하게 되었다.
12평의 원룸. 혼자 살기엔 쾌적한 넓이였다.
친구를 불러 밥을 사준다는 핑계로 청소를 함께 했다.
생각보다 집이 깔끔해 청소할 곳은 많지 않았다.
"점심은 뭐먹을래?"
"이삿날은 중국집이 국룰이지."
친구는 점심을 먹고난 뒤 다음에 저녁도 사라는 말과 함께 돌아갔다.
친구가 돌아가고 집에 혼자 남아있으니 조금 쓸쓸하게 느껴졌다.
방 안의 풍경은 황량했다.
짐이라곤 옷만 잔뜩 싸들고 나왔기 때문에 다른 물건이 없었다.
다른 내 물건들은 부모님께 나중에 택배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다.
어머니는 직접 가져가라 하셨지만 아버지께서 택배로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은 살풍경한 집안의 모습에 나는 이것저것 물건을 구매하여
집 안을 채워 넣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출근날이 다가와있었다.
출근하기 시작한 뒤로는 다른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일을 배우게 되었다.
이리저리 사람들에게 치이고 일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바빠서 다행이라 생각헀다.
적어도 이렇게 바쁜 동안엔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으니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엔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영상을 보거나 다른 걸 하는게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듯 멍하게 화면만을 바라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생각외로 여동생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아예 내게서 정이 떨어져버린걸까.
혼자서 고민한다고 해서 나올 답은 아니었기에 나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다보니 어머니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
[아들, 잘 지내니? 아들이라곤 하나 밖에 없는데도 연락이 없네.]
[죄송해요. 요즘 너무 바빠서 연락하는걸 깜빡했어요.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엄마는 별일 없어요?]
[잘 지낸다니 다행이네. 아빠나 동생이랑도 연락 안하고 지내니?]
여동생과 연락이라...
약간의 침묵 뒤 나는 가까스로 네.. 라고 대답을 했다.
그 뒤엔 조금 긴 침묵이 이어졌다.
...정말 안부인사만을 위해 연락하신 걸까?
이러한 의문이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독립하기 전까지만 해도 동생이랑 사이좋게 지냈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혹사 아버지가 나와 여동생의 사이를 밝히신 걸까?
… 그러실 리가 없지.
아니면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여동생에게 멀어졌듯이 여동생도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걸까?
일단 마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다.
[그랬죠.]
[저번에 동생 남자친구에 대해 이야기했잖니... 그 뒤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더라.]
[... 그래요?]
전화 너머로 어머니의 무거운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나서 애가 너무 힘들어하더라...]
[괜찮으면 네가 위로 좀 해주고 그럴 수 있겠니?]
[...]
이번에는 형식적인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휴대폰 너머로 살짝 노이즈 낀 침묵이 들려온다.
... 이 쪽이 본론이었나.
말이 턱 막혀서 대답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 깔았다.
시선을 내리자 내 손가락이 보였다.
엄지손가락의 상처는 다 낫고 작은 흉터만이 남아있었다.
다른 손가락으로 흉터를 쓰다듬으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했다.
그 뒤로 집은 괜찮니, 직장생활은 어떠니, 사람들은 괜찮니 등 이런저런 근황이야기를 나눈 뒤 통화를 마쳤다.
여동생에게 위로라...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원인이 나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여동생과 대화목록을 열어봤다.
대화의 마지막은 여동생의 문자로 끝이 나 있었다.
[여동생 : 오빠랑 빨리 여행가고 싶다...(부끄러워하는 토끼 이모티콘)]
무심코 채팅창에 나도. 라고 글자를 적어버렸다.
실수로라도 전송버튼을 누르지 않게 조심스럽게 한 글자씩 지워나갔다.
작은 한숨을 쉬고 여동생과의 대화창을 닫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시선을 다시 위로 올려 방 안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군데군데 비어서 어딘가 휑해 보이는 방 안의 풍경이 보인다.
혼자 지내기엔 딱 좋다고 생각했던 방의 크기가 오늘따라 왠지 조금 넓게 느껴졌다.
여동생과와 떨어져 지낸다면 여러 가지가 섞여서 엉망인 마음이 정리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일도 출근해야하는데...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보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피곤하다며 잠들고 싶다고 하는데 괜히 심란해진 마음에 잠이 오질 않았다.
결국 자리에 일어나 냉장고를 열어봤다.
예전에 사두고 마시지 않은 맥주가 보였다.
... 하필이면 여동생과 여행을 가서 함께 마셨던 것과 같은 브랜드의 맥주였다.
고작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새빨개진 얼굴로 배시시 웃던 여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 실수했다.
고작 자그마한 기억의 파편만을 떠올렸을 뿐인데 함께 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 맥주 하나 봤다고 이건 너무한거 아니냐고."
나는 작게 불평하고 다음엔 소주를 사놔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냉장고에서 맥주캔를 꺼냈다.
깊은 밤 불 꺼진 원룸 안,
창문 사이로 비치는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나는 조용히 추억 속에 잠겼다.
... 다음날 아침에 늦잠을 자는 바람에 택시를 타고 출근했다.
그러고도 지각을 하는 바람에 사수에게 아침부터 갈굼을 당했다.
그날 밤엔 오랜만에 동기들과 만났다.
나와 같이 입사한 동기는 각각 남자와 여자 한명씩이었다.
같은 시기에 고생해서 그런지 우리들은 빠르게 친해져 금세 서로 말을 놓았다.
그렇게 오늘은 동기들끼리 조촐한 회식을 하게 되었다.
회사동기들끼리 모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상사에 대한 뒷담화를 하게 되었다.
"와 진짜 박부장 때문에 미칠거같아.. 아니 다 퇴근하는데 왜 자기만 앉아있냐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지가 집에 가기 싫다고 앉아서 눈치는 왜 주냐고..."
"누구 한명이 총대매고 부장님 데리고 접대 돌아야 퇴근 할 수 있어."
"그것 때문에 여친이랑 약속 파토난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여친이 일이야 나야 라고 묻는데 와.. 실제로 들어보니까 그냥 숨이 턱 막히더라."
남자 동기는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한 푸념을 했고,
여자 동기도 자신의 남자친구에 대한 푸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동기들의 푸념을 들어주었다.
그러다보니 타겟이 이번엔 내게 돌아왔다.
"너는 여자친구 없냐?"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사귀고 있다? 헤어졌다?
아니면 ... 여동생과 견우와 직녀마냥 헤어져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하하. 내가 생각해봐도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고민하던 끝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하던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도 여자 친구가 없다고 대답을 했다.
"그럼 가끔 들여다보던 프사는 누구냐? 전여친?"
술잔을 든 손이 움찔하고 떨렸다.
씁... 그걸 봤네.진짜 가끔, 그것도 몰래 봤다고 생각했는데...
입안에 감도는 쓴맛에 나는 술을 한잔 마시고서야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아니, 여동생."
"오 여동생이야~? 이쁘던데?"
남자동기의 말에 여자동기가 뒤통수를 때렸다.
"넌 여자친구도 있는 놈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 여동생인데 못생겼다고 할순없잖아."
"꼭 이야기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냐?"
둘은 앙숙처럼 티격태격 싸워댔다.
나는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다시 또 술을 한 잔 마셨다.
"아니 난 존나 슬픈 눈으로 보길래 헤어진 전여친이라도 보는 줄."
남자동기는 꿋꿋이 자기 할 말을 끝마쳤고, 기어코 여자동기에게 뒷통수를 한 대 더 맞았다.
나는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다시 또 술 한 잔을 마셨다.
"아니 그래서 여친은 있냐고"
"없다니까."
"그럼 마지막연애는?"
무슨 질문하나하나마다 대답하기가 껄끄럽냐...
또 한 잔을 들이키곤 대답했다.
"2달전 쯤에 헤어졌어."
"그쯤이면 취직하고 나서네?"
"뭐 그렇지... 근데 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건데."
"너도 여친한테 시달렸으면 좋겠어."
"... 뭐?"
"농담이고 인사과 이 대리님이 널 좀 눈여겨보시더라고?"
"...뭐?"
"넌 어떻게 생각하냐?"
"사내연애는 좀..."
나는 그렇게 얼버무리고는 다시 또 술을 마셨다.
그 정도까지 물어본 뒤로 다행히 더 이상으로 물어보진 않았다.
그날따라 좀 더 많이 술에 취해버렸다.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아ㅡ
방 안 침대에 겨우 몸을 눕히고 한숨을 쉬니 술 냄새가 진동했다.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 대화목록을 올려본다.
[여동생 :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조심해서 들어와.]
나는 눈을 감고 휴대폰을 내려놓고서 잠에 들었다.
새벽에 목이 말라서 잠에서 깨어났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 마셨다.
창문을 열어보니 뜨거운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밖은 만연한 여름이 와있었다.
여름의 후덥지근한 바람을 맞다본니 너와 함께 갔던 여행이 떠올랐다.
그날의 습하고도 뜨거웠던 밤바람.
땀으로 가득 했지만 손을 놓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전까진 열어보지 않던 휴대폰 사진첩을 열었다.
그리고 그날 함께 찍었던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놀이공원에서 함께 찍었던 사진까지 보고나서야
나는 창문을 닫고 자리에 누워 다시 잠에 들 수 있었다.
**
시간이 갈수록 일에 여유가 생겼다.
물론 매일이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일이 익숙해지다 보니
일하는 중간 중간 딴 생각이 들어버렸다.
그럴때마다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기도 하고
여동생과 나눴던 대화를 뒤적여보기도 했다.
그렇게 가을이 지났다.
추석에도, 다른 휴일에도 급한 일이 있다는 핑계로 본가로 가진 않았다.
어머니는 불만이 많은 듯 했지만 아버지가 열심히 어머니를 달래주셨다.
여동생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어느덧 1년이 지나고 12월 31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집에서 조촐한 새해맞이를 했다.
... 집에서 티비로 제야의 종 영상이나 보면서 술이나 마셨다는 이야기다.
뎅ㅡ...
TV화면 속에서 제야의 종이 울리며 1월 1일이 되었다.
작은 목소리로 혼자서 새해를 자축했다.
혼자서 계속 술을 홀짝이다 보니 어느덧 술이 다 떨어져버렸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냉장고를 열어보니 오늘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 두 캔만이 남아있었다.
그것엔 차마 손대지 못하고 결국 집 앞 편의점에 가서 소주와 안주거리를 조금 사왔다.
또 다시 혼자서 술을 마시며 몽롱한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창 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떠올라있었다.
... 결국 1년이 지났지만 여동생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