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9 비밀의 무게
놀이공원을 다녀오고 조금은 여유로운 나날을 보냈다.
구직활동도 하고 때때로 여동생과 몰래 외출하기도 하는 평온한 나날이었다.
열심히 노력을 한 것에 대한 보답인지 서류합격 후 면접까지 잘 보게 되었다.
다행히 목표로 하던 회사에 합격을 하고 취직이 정해졌다.
그날 저녁엔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밤이 깊은 시간에 몰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여동생과 심야의 데이트와 함께 개인적인 축하를 받았다.
그런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중 어느날,
여동생이 조금 이상했다
아침부터 안절부절못하며 계속 자기 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왜 그래? 뭐 잃어버렸어?"
"아니.. 저번에 사둔 콘돔이랑 피임약이 안보여서..."
"다른데 두고 깜빡한 거 아니야?"
"아닌데... 왜 안보이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도 여동생의 방을 조금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마음 속 한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차곡차곡 쌓였다.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은 채로 시간은 저녁이 되어 부모님이 집에 돌아오셨다.
저녁식사 동안 묘한 정적 이어졌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점심때 느꼈던 불안감이 조금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아닐 거야. 아무 말도 없잖아."라며 애써 부정하고 불안함을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다.
내가 외면한다고 해서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어머니가 먼저 말을 꺼내셨다.
"가족들끼리 이야기 좀 하자."
"무슨 이야기요?"
"... 이따 말해줄게."
묻어놨던 불안감은 확실한 형태를 띠고서 내 마음 속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저녁 먹은 것을 간단히 치우고 우리 가족은 다시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는 안방에 들어가서 피임약과 콘돔을 꺼내오셨다.
... 역시 들킨건가.
"방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찾았다."
"말을 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역시 한마디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여동생은 벌써부터 불안해보였다.
까득 하는 소리와 함께 엄지손톱이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는 어머니 옆에서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다.
"혹시 남자친구 생겼니..?"
여동생은 우물쭈물하다가 작게 "네.." 라고 대답을 했다.
"콘돔에 피임약에... 피임은 확실히 하고 있는 거 맞지..?"
여동생은 몸을 움찔하고 떨더니 다시 작은 목소리로 "네에..." 하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남자친구는 피임을 안하니...? 왜 네가 다 가지고 있는거니?"
"아니.. 그.."
여동생은 당황한 듯 동공이 떨리기 시작했다.
말을 더듬거리며 이따금 무언가 말을 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단어나 문장이 나오진 않았다.
어머니는 여동생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음 질문을 했다.
"남자친구는 누구야?"
"..."
이번엔 여동생의 입에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남자친구는어디서 만난거니?"
"..."
이번에도 여동생은 그저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왜 대답이 없니? 혹시 이상한데서 만난건 아니지...?"
"..."
여동생은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여동생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점점 분위기는 무거워져만 갔다.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는 여동생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보다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알아서 잘 하겠지... 얘 성격 똑 부러진 거 엄마도 잘 알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잖니. 그리고 넌 지금 끼어들지 마."
엄마는 나를 찌릿하고 째려보셨다.
"그러는 넌 여자친구 있니?"
...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대답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가 막혔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던 입에서 결국 짧은 대답이 나왔다.
"아니."
어째서 있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아직 나와 여동생의 관계까진 눈치 채지는 못한 어머니에게 의심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내 대답을 들어서인지 아니면 아까부터 고개를 숙여서 몰랐던 건지
여동생의 푹 숙인 고개 아래로 눈물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여동생의 어깨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울기만 하는 여동생을 보고 답답하셨는지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왜 말을 못하니... 그 남자 놈이 막 피임도 안 해서 네가 다 들고 다니는 거 아니야?"
"설마 그 자식이 콘돔 쓰기 싫다고 억지로 피임약 먹이는 건 아니지..?"
"응..? 왜 말을 못해... 엄마가 못 미덥니..?"
어머니께서 여동생에게 하는 말은 모두 비수가 되어 내게 꽂혔다.
처음엔 콘돔을 챙기긴 했지만 갈수록 여동생에게 모든 피임을 도맡아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결국 사후피임약까지 먹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서글프게 울던 여동생의 모습
내게 소리치던 모습.
그렇게라도 나를 붙잡으려 했던 모습
사후피임약을 먹고 토해내던 모습.
그리고 바들바들 떨리던 그 손끝으로 다시 약을 집던 모습.
숨겨두고 묻어두었던 죄책감이 다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떠오른다.
내 자신에 대한 역겨움으로 토할 것 같았다.
여전히 여동생은 고개를 파묻고서 희미하게 어깨를 떨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무언가 말이라도 하려고 일어나려던 그때.
가만히 있던 아버지가 내 손을 붙잡았다.
갑자기 턱 하고 숨이 막혔다.
그제야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그저 나쁜 남친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하고 계신 것이었지만...
전부터 의심을 하던 아버지는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어머니는 계속해서 여동생에게 남자친구에 대해 물어봤지만 여동생은 그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렸다.
어머니는 답답함에 가슴을 치셨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니.. 응? 엄마가 다그쳐서 미안해.. 뭐라고 안할 테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보렴..."
"남자친구가 누군지 왜 말을 안 하니... 그냥 엄마는 걱정되서 그러는거야...응..?"
끝내 여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엔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셨다.
마지막엔 눈물을 흘리시며 이야기를 하셨다.
"... 엄마가 새엄마라서 못 미더워서 그런 거니...?"
... 최악이다.
정말 이보다 최악일 수 있을까.
나로부터 시작된 균열은 우리 가족의 관계를 다 갈가리 찢어버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옆에서 조용히 눈을 감으시곤 깊은 한 숨을 쉬셨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셨다.
"우선은 들어가자 여보... 나중에 내가 천천히 타일러볼게..."
어머니는 조용히 흐느끼시며 아버지와 함께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동생과 자책하는 어머니
모든 원인이면서도 그 사이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나.
부모님이 안방으로 들어가시고 부엌 테이블에는 나와 여동생만이 남아있었다.
여전히 여동생은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티슈를 뽑고서 여동생의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여동생의 얼굴은 눈은 새빨개진 채로 눈물범벅이었다.
마치 건드리면 깨질 듯 한 유리조각을 만지듯이 조심스럽게 천천히 눈물을 닦아주었다.
미안해 라는 말조차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울고 있는 여동생의 모습을 보며 죄책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 마음이 너무 아프면 오히려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다. 마치 혼이 빠져나가고 남은 인형만을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아버지가 다시 안방에서 나오셨다.
내가 여동생의 눈물을 닦아주는걸 보시곤 시선을 옆으로 돌리셨다.
"둘이서 이야기 좀 하자."
",,.네."
아버지를 따라 집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를 따라가는 동안 우리 사이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버지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조그마한 정자에 앉았다.
내게서 무슨 용기가 난건지 입에서 말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어디까지 알고 계세요?"
후우... 아버지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동생이랑은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냐."
내가 한 질문에 아버지의 질문이 돌아왔다.
대답이 아닌 질문으로 돌아왔지만 어렴풋이 아버지의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 알아차리신 걸까.
그 날 차에서 내렸을 때부터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걸까?
하지만 이제와서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먼저 아버지의 물음에 대답을 했다.
"초여름 그때쯤에요."
"그러냐..."
아버지는 한 번 더 한숨을 쉬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 너는 어쩌고 싶니?"
"저는... 책임 질 수 있어요."
"책임이라... 무슨 책임?"
"평생 함께하겠다는 책임이요."
아버지는 천천히 눈을 감으셨다.
"다들 그런 말들을 하지."
"처음엔 천생연분을 만났다고, 평생을 함께 할꺼라 하던 연인들도 헤어진단다."
"연인을 넘어서 부부가 되고 나서도 현실에 부딪혀서 이혼을 하곤 하지.""하물며 너희는 남매인데 너희에게 현실은 더 가혹할꺼다."
"주위에선 항상 쑥덕거리고 곱게 보지 않을 거다."
"평생 꼬리표가 따라다닐 거야."
"그리고 만약 뒤늦게 헤어지기라도 한다면 ... 둘 다 더 많이 상처받을 거다."
"..."
나는 섣불리 괜찮을 거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직 겪어보지 못한 현실이니까.
설령 내가 괜찮더라도 여동생이 주위의 시선을 버틸 수 있을까?
생각을 하던 중에 아버지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이번에 취직한다고 했지?"
"네.."
"돈은 지원해 줄 테니까. 이번에 독립해라."
"...네"
"그리고 서로 연락하지 말고 시간을 좀 가지도록 해라.."
"...네?"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아버지의 이야기는 납득하지 못했다.
"지금은 서로 없으면 죽을 것 같고 그럴 수도 있지만 좀 떨어져서 생활하다보면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땐 나도 굳이 말리진 않겠다.
"그 뒤엔 너희들에게 맡기마."
"그때까진 엄마에겐 비밀로 하자."
아버지는 생각 외로 극심한 반대를 하진 않으셨다.
다만 시간을 가지자고 하셨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와 아무 연락도 하지 못한다면 여동생이 괜찮을까?
여동생이 또 망가지진 않을까?
그때의 멀어지지 않겠다는 약속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힐끗 보시고는 "잘 생각해봐라." 라는 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셨다.
모르겠어...
기껏 이제야 괜찮아진 여동생과 지금 이렇게 멀어져도 될까?
여동생이 다시 망가지면 어떡해?
사실 다른 것보단 혹시라도 내가 변할까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
지금도 이 마음은 온전히 여동생에 대한 사랑인지도 알 수 없었다.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관계에 이런저런 감정이 너무 많이 섞여버렸다.
죄책감, 미안함 등이 섞여버린 흙탕물 같은 이 마음에서 다른 걸 다 들어내고 나면 거기에 남아있는 사랑은 얼마나 되는 걸까?
만약... 시간이 지나 침전물이 가라앉아 맑아진 마음에 사랑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여동생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버텼는데 그때가 되어서 내겐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면?
그땐 죄책감만이 남았을 텐데... 그걸로 현실에 부딪히고도 나와 여동생이 버틸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생각이 마치 쳇바퀴를 돌듯이 아무리 해봐도 제자리걸음이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머리를 쥐고서 앉아 있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돌아오니 모든 불이 꺼져 어두컴컴했다.
오늘은 거실에 희미한 불빛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여동생 방으로 찾아가서 노크를 해봤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들어갈게."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동생은 방구석 한편에 몸을 둥글게 말고서 쪼그려 앉아있었다.
나와 아버지가 나간 뒤에도 울었는지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보였다.
여동생에게 다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안아주었다.
여동생 또한 그저 조용히 내 품에 안겨여태까지 숨을 쉬지 못했다는 듯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