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7 - 클레아의 비밀 6
독사의 송곳니의 습격이 있던 날.
저는 제 자신의 한심함에, 그저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굳이 하고 싶지도 않던 성녀 시험에 참여해서 따라온 세마 씨와 리즈를 위험하게 만든 데다,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니.
제가 한 거라곤 그저, 깜깜하고 험악한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눈물을 흘리던 것뿐.
성녀에 관심 없다고 확실하게 제 의사를 표현했더라면.
마물 토벌엔 그저 따라다녔을 뿐이라고 말하고 시험을 포기했더라면.
하다못해 눈이라도 보여서, 세마 씨와 리즈를 확실하게 보조할 수라도 있었더라면.
그런 못된 사람들에게...
그런... 여신교를 어지럽히려는 사악한 인간들에게...
나의 주인님이 다치시는 일은 없었을 텐데.
용서 못해... 쓰레기 같은 인간들 같으니... 감히... 감히...
내게 힘이 있었더라면... 눈이 보였더라면...
최대한 고통을 주며, 자신들의 죄를 반성하게 만들었을 텐데...!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눈물 흘리며 바닥에 이마를 찍도록 만들어 주었을 텐데!
역겨운 인간들...! 쓰레기들...!
치워야 돼...! 죽여야 돼...!
다신 주인님께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인님을 지켜 드려야...!!!
“...읏!?”
...방금, 뭐였던 거죠...
“쌔액... 쌔액...”
정신을 차리니 절 감싸는 세마 씨의 체온이 느껴지고, 세마 씨의 건너편에서 리즈의 조용한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악몽이라도 꾸었던 걸까요... 어렴풋하지만, 뭔가 몸에 분노가 차오르는 것 같았는데...
어쩐지 최근, 감정이 격해지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설마... 자면서까지 이런 분노를 느끼게 될 줄은...
“푸르륵... 음...”
제 머리 위에서 세마 씨의 숨소리가 들리자, 절 감싸고 있는 뜨거운 체온과 커다랗고 단단한 근육이 느껴집니다.
“...후읍... 하아...”
최근, 이상하게도 감정이 요동치는 듯한 느낌이지만... 묘하게도, 세마 씨의 냄새... 체온... 기운... 그러한 것들을 느끼면, 요동치는 감정이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뭐랄까... 머리가 멍해지고, 황홀한 기분이 들면서... 마음속의 짐들을 모두 내던지는 듯한... 묘한 느낌.
세마 씨의 곁에 있을 때 느끼는, 세마 씨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이 기분...
...네. 이게 안정된다는 거겠죠. 처음엔 좀 이상한 것 같았지만, 이젠 이 기분을 느끼지 못하면 불안할 정도에요.
이것만... 세마 씨만 있다면, 아마...
표현하기 힘든 묘한 안정감을 느끼면서, 저는 세마 씨의 몸을 끌어안았습니다.
...지켜야 돼요. 주인님을, 이 감정을. 이 행복을.
그러려면...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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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 저는, 성녀가 되어 세마 씨를 지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성녀라는 자리는 상징성이 강한 자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권한이 약한 것은 아닙니다.
성녀와 교황은, 무게는 달라도 여신교의 커다란 기둥들.
최근엔 상징적인 자리가 되어버렸다지만, 애초에 여신교의 시초가 여신님의 부름을 받았던 첫 번째 성녀님 이시니까요.
그런 만큼, 죄가 확실한 주교나 대주교를 벌할 권한. 긴급할 때 한정이지만 각 지부에 성녀의 명령을 내릴 권한. 성녀 전용 호위 병력을 갖출 수 있는 권한 등...
그런 권한들을 쓸 수 있게 된다면, 여신교의 부패한 자들을 끌어내고 세마 씨를 지킬 수 있게 되겠죠.
그렇게 생각한 전, 이 후 진행되는 모든 시험들에서 여태까지 살아온 인생 중 가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집중하여 시험을 치렀습니다.
여신님이 절 버리시는 게 아니시라면, 분명 성녀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어머. 클레아 수녀. 성녀 자리에 관심 없다더니... 겉보기완 달리 꽤나 교활하시네요.”
중간에 클라리스가 저에게 그렇게 쏘아붙였지만, 가볍게 무시해 주었습니다.
클라리스...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저는 속이지 못해요.
당신의 감정의 출렁임에서,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단 게 느껴졌었으니까.
성녀가 되어, 당신과 당신의 남자라던 그 쓰레기가 무슨 짓을 해왔는지 모두 밝히고... 그 죗값을 치르게 해 주겠어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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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클레아는 초대 성녀의 환생, 아니 그 이상이야. 대단해 클레아.”
전체 시험이 중반을 넘었을 때쯤, 바울은 호들갑을 떨며 절 치켜세웠습니다.
뭘 그리 헤실헤실 웃고 있나요 바울. 당신 때문에 관심 없었던 성녀 선거에 억지로 참가하고, 그 때문에 세마 씨가 다치셨는데.
“...고마워요. 바울.”
목까지 차올랐던 말을 삼키고, 감정을 삭히며 바울에게 미소 지어 주었습니다.
그래요... 바울의 잘못... 은 아니죠. 아무리 바울에게 실망하고 그를 꺼리게 되었다 해도, 이번 일은 바울을 원망할 일은 아니에요.
...그렇다곤 해도, 성녀 시험이 끝난 후엔... 그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볼 예정이지만요.
“그, 클레아... 오늘 시험 과제는 여유시간이 꽤 있는데... 어때? 잠시...” “하아...”
뭔가요 저 기대감은. 또 무슨 쓸데없는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요?
식사 시간도 아니라서 그냥 거절하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별 수 없이 바울을 따라가는 동안, 바울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촉새처럼 제 옆에서 떠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때, 확 그 녀석의 멱살을 잡으면서...”
왕도에 온 뒤로 바울은, 뭔가 자기자랑이나 잘난척하는 행동이 늘어났습니다.
제 앞에서 뭔가 폼을 잡는 것 같은데... 그래 봤자 저에겐 한심해 보일 뿐입니다.
저런 자기자랑이, 결국 제게 칭찬을 바라는 어린애 같은 행동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오래 알고 지내왔으니 자신의 감정이 느껴진다는 건 잘 알고 있으면서 저렇게 행동하다니.
한 번 역겨운 행동을 받아줬더니, 날이 갈수록 바울의 저런 행동이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 지금 어디 가는 건가요? 너무 멀리는...” “괜찮아. 거의 다 왔으니까.”
한참을 바울의 허세 섞인 자기자랑을 들으며 걸었더니, 어느새 주변에서 많은 인파가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번화가로 나온 걸까요? 사람이 꽤나 많은데, 바울이 뭘 하려고...
“...여기야.” “...? 바울. 어딘가요. 여긴?” “...왕도 중심 번화가에 있는... 분수대 앞에 와있어. 우린.”
흥분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 바울의 감정.
어쩐지, 제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싹트는 것 같았습니다.
“좋은 곳이야. 번화가 라고 하지만, 왕도인 만큼 주변도 깔끔하고 사람들도 행복해 보여. 그 중심에 있는 이 분수대는, 보이진 않겠지만 마치 연인들을 축복하는 듯한 반짝임이 느껴져.”
도대체 왜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건가요. 당신과 나에겐 전혀 상관없잖아요.
“듣자 하니, 이 분수대 주변이 연인들이 함께 거닐기 딱 좋다더군. 주변 경관도 멋지고. 가게도 많아서인지 사람들도 잔뜩 모여있어.”
그렇게 말하곤 헛기침을 하는 바울이, 뭔가 마음의 준비를 하는 듯한...
안돼요. 바울. 하지 마요. 주변에 사람들도 많잖아요.
“나의 연인이자 약혼자! 네리스 클레아! 곧 우리가 약속한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바울의 외침을 듣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틈틈이 왕도에 있는 집들도 알아보았고! 다른 준비도 모두 갖춰 두었어! 당신은 이제 몸만 오면 돼!” “어머어머, 뭐야...?” “공개 고백이야?” “어머나... 성직자 분들 같은데?”
감지하지 않아도, 주변 인파의 이목이 우리 쪽에 집중되는 게 느껴집니다.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고! 나를 미소 짓게 만들어주는! 나의 성녀 클레아! 마더 바울은 널 사랑한다아!!!” “와, 뭐야?” “푸하하. 그렇게 안 생겼는데 상남자네.” “꺄아. 뭐 꺼낸다!”
바울이 무어라 외칠 때마다, 머리는 혼란스러운데 가슴은 무겁게 내려 앉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이 남자와 저의 주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감상을 내뱉고 있었습니다.
얼핏 들으면 마치 축복하는 듯한 말들을 내뱉고 있지만, 저에게 느껴지는 그들의 감정에선 그러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호기심.
마치, 재미난 흥미거리를 만난 것 같은 유쾌함.
그리고, 여자들에게서... 자신이라면 이런 상황에 놓이기 싫다는 것처럼 느껴지는, 불쾌함과 부끄러움.
뭐죠 바울. 미쳤나요.
말도 없이... 이런... 불쾌한 짓을...
이걸 이벤트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짜증나.
“후... 후우... 바, 반지도 따로 준비해 두긴 했지만... 우리는 성직자니까... 지금 건네는 건 이쪽이 더 어울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면서, 제 목에 무언가를 거는 바울.
아마, 여신교의 문양으로 만들어진 목걸이... 겠죠.
...이번만큼 여신교의 상징이 역겹게 느껴지는 것도 처음이네요.
정말... 이 남자는...
“나의 여신! 나의 성녀! 네리스 클레아! 평생 나의...! 나의 연인이 되어, 나와 함께 해 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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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하하하핫! 그래서? 그 뒤엔?” “하아... 정말 목구멍 끝까지 욕이 차올랐는데... 정말 간신히 참으면서 얼버무리듯이 벗어났어요...”
리즈와 둘이서 목욕을 하면서, 마치 한탄하듯이 바울과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습니다.
정말 유쾌하단 듯이 웃는 리즈이지만, 어째선지 그 웃음에 기분 나쁜 감정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웃음소리에, 뭔가 위로 받는 것 같은...
최근, 리즈와는 묘하게 잘 맞는 느낌이네요.
“크후훗... 아, 정말 끔찍한 고백이네. 청혼까지 해놨으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공개 고백을 하다니.” “네. 정말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고 싶었어요. 그 남자는 진짜...”
네. 정말 끔찍해요.
이미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었는데, 설마 그런 고백을 할 줄이야.
마치 내가 자신의 것이라는 확신을 얻으려는 듯하던, 그 역겨운 수컷의 감정. 정말 불쾌하기 짝이 없었어요.
“하아... 자기밖에 생각하지 않는 그런 남자. 이제 정말 꼴도 보기 싫어요.” “쿡쿡...♡ 그렇다곤 해도, 성녀 선거가 끝나기 전까진 어쩔 수가 없네.” “네. 검증 시험들보다, 그 남자가 더 견디기 힘드네요. 시험 보는 동안은 주인님도 안 계신데...”
자신의 암컷들을 지킬만한 힘이 필요하다며, 리즈와 함께 제가 시험 보는 동안 훈련하러 가시는 주인님.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그런 불쾌한 수컷과는 전혀 달라요. 정말...
“하아. 리즈가 부럽네요. 맘 같아선 성녀 시험을 때려 치고 그냥 주인님과 함께하고 싶어요.” “후후... 아직 마음을 결정한 것도 아닌데. 누가 보면 이미 주인님의 암컷이 된 줄 알겠는걸?” “...아. 그러, 네요. 아직... 주인님의 암컷이 아니었죠. 저는...”
...그렇죠. 아직, 주인님의 암컷을 체험해보는 것일 뿐이었죠.
이미 마음은 주인님께... 결심이 선 것 같은데...
나가서 바로, 주인님의 암컷이 되겠다고 말하면 될 텐데...
이상하네요. 왜 그 말을 못 꺼내고 있는 걸까요.
몸도 마음도, 분명 주인님에게 끌리고 있는데.
어째서... 제 마음 속 어딘가에서, 뭔가가 부족한 듯한...
퍼즐 한 조각이 맞춰지지 않은 듯한, 이상한 감정이 드는 걸까요.
그 부족한 한 조각 때문에, 이상하게도 주인님의 것이 되겠다는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분명 이미, 결심은 선 것 같은데...
“......후훗♡ 아~ 그나저나 공개 고백 이라... 킥. 고백을 받는 게 아니라, 공개적으로 복종 맹세를 하는 거라면 하고 싶은데~” “...복종, 맹세...?” “...아핫♡ 자세히 말해준 적 없던가? 얼핏 말했던 것 같기도 한데... 관심 있어?”
...분명, 리즈가 복종을 맹세했단 얘기를 들어봤던 것 같긴 한데...
...어째서죠. 복종을 맹세한단 얘길 들으니... 묘하게, 가슴이 술렁거리는 느낌...
어째서... 그 복종이란 단어가, 이렇게 황홀하게 느껴지는 걸까...
“...어, 어떻...게, 했는데요?” “쿡쿡쿡...♡ 어떻게 했냐면... 내가 알스와 헤어지던 날...”
서로의 커다란 가슴을 밀착시켜 문지르면서, 리즈는 제 귀에 속삭이듯이 복종을 맹세하고 연인과 헤어졌던 경험담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말이지 음탕하고 불경스럽기 짝이 없어, 성직자로서는 화를 내고 설교해야 마땅한 이야기 이였지만...
이상하게도 저의 몸은, 리즈의 이야기에 황홀함과 흥분을 느껴버려서...
설교는 커녕, 오히려 그녀의 이야기에 몸을 떨며 집중하다가...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엔 오히려...
“...리즈. 그, 그거... 체험만... 해볼 수... 있을까요...?”
그 경험을, 체험해 보고 싶다고 부탁해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