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35)화 (135/138)

겁에 질린 화가가 응접실을 나갔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가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나서는 것을 확인한 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디무스와 대화를 나눈 뒤 응접실을 나가는 화가의 뒷모습이 하나같이 똑같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니리라.

“들여보내.”

“방금 그자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마지막?”

디무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의 앞에 앉은 화가들은 조금 전과 비슷한 정도의 말을 어물거리다가 쫓겨났었다. 인상에 남지 않을 정도로 워낙 순식간에 대화가 끝나서 몇 명을 마주했는지조차 가늠되지 않은 참이다.

별로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는데 그들을 전부 만나 본 거라고?

이렇게나 인재가 없다니.

자신이 내던진 명단을 힐끗 본 디무스가 짧게 혀를 찼다. 최대한 빨리 기술을 익히고 싶지만,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자들을 선생이랍시고 앉혀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브만큼 똑똑하고 총명한 선생까지는 바라지도 못하겠다.

“목록을 다시 뽑아 와. 이번에는 좀 더 쓸 만한 자들로.”

“그… 예, 알겠습니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말문을 열었던 찰스가 이내 체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별다른 성과도 없이 하루가 다 갔다. 해가 저물 즈음 돌아온 랑제스 저택에서는 여전히 만개한 장미꽃들이 디무스를 반겨 주었다.

착각일까? 아침과 비교하자면 바닥에 떨어진 꽃잎이 더 많아진 것 같기도 했다. 저러다가 금세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전부 시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신경질적인 얼굴로 정원을 응시하던 디무스가 몸을 돌렸다.

오늘도 리브는 오지 않았다.

***

우여곡절 끝에 겨우 그림 선생을 하나 고용했다. 디무스가 바라는 게 ‘그림 실력의 전반적인 향상’이 아니라, ‘특정 형식의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단숨에 파악한 자였다.

작업실은 사유지 내에 있는 별장 중 한 곳을 개조해서 만들었다. 다른 저택들과 비교하면 작은 축에 속해서 거의 이용한 적이 없던 장소였다. 화실도, 화구도, 선생까지도 완벽하게 준비한 뒤 디무스는 본격적인 수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졌다는 게 원활한 진행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네, 훌륭한 도형을 그리셨군요.”

“생명체네만.”

“…신화 속의 존재를 형상화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인간의 형상을 빗대어….”

“신화가 아니라 실재하는 인간.”

“오….”

그림 선생은 시시때때로 말문을 잃었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디무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예술적 안목이 높은 것과 예술적인 재능을 가진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 그는 겨우 며칠 사이에 깨달을 수 있었다. 눈이 달린 한 모를 수가 없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림 선생과 그는 같은 것을 두고도 전혀 다른 결과물을 냈다.

결국 디무스의 입에서 짜증스러운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이해가 안 되는군.”

생도 시절부터 그는 무기를 다루는 데에 능통했다. 공부 머리 또한 아주 뛰어났다. 손재주가 있고 똑똑한 데 왜 결과물을 내지 못한단 말인가.

인상을 찌푸린 디무스가 캔버스를 노려보았다. 눈빛에 칼날이 달려 있다면 아마 그의 캔버스는 갈기갈기 찢겼으리라.

막막한 얼굴로 그런 디무스를 보던 미술 선생이 한숨을 삼켰다. 그는 걸음마조차 떼지 못하는 아이를 대하는 심정으로 애써 웃으며 다시 차근차근 기초부터 짚어 주었다.

도돌이표처럼 첫날의 내용으로 돌아간 수업을 듣다 보니 어느덧 마칠 시간이 되었다.

그림 선생은 마치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있다가 해방된 죄수처럼 상쾌한 얼굴로 별장을 떠났다.

그게 꼴 보기 싫어서 그냥 해고할까, 고민하던 디무스는 일단 참기로 했다. 많은 화가 중 거르고 걸러 겨우 골라낸 그림 선생이었다. 그렇게 까탈스럽게 가려낸 사람을 해고하면 새로운 선생을 찾기 위해 또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아도 매일매일 기분이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와중인데 번거로운 작업을 늘리고 싶진 않았다.

그보다 대체 왜 제 손은 이 모양일까.

그림 선생이 떠난 뒤에도 디무스는 여전히 캔버스 앞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 그가 그리려던 건 제 기억 속의 리브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손끝에서 탄생한 건 사람이라는 걸 알아볼 수도 없는 기하학적 도형이었다. 아니, 도형이라는 평가조차 고상하고 후하다. 이건 그냥 정체불명의 선들이 마구잡이로 그어진 모양새에 가까웠다.

제 기억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잘못된 건 손의 움직임일까. 멀쩡한 손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할 리가 없는데.

무슨 작업이든 정확한 자세가 중요한 법이다. 혹시 그림 선생이 붓 잡는 법을 잘못 알려 준 게 아닐까.

자못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 있는 디무스의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림 선생이 떠나고도 별장에서 나오지 않는 디무스를 누군가 데리러 온 듯했다.

“바깥에서 기다려.”

돌아보지도 않은 채 냉담하게 명령한 디무스가 들고 있던 붓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가 의도한 건 곧게 뻗은 직선이었으나, 붓 끝에서 나온 건 어딘가 묘하게 삐뚜름한 사선이었다.

…어쩌면 도구의 문제일지도.

“화구를 바꾸라고 해야겠군.”

모든 종류의 총기를 다룰 수 있어도 가장 손에 잘 맞는 총기는 따로 있는 법. 분명 화구 또한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러니 일단 붓을 바꾸고, 개선되지 않으면 캔버스를 바꾸고, 그도 안 되면….

“바꾸어도 똑같지 않을까요?”

불쑥, 목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디무스가 쥐고 있던 붓을 가볍게 빼앗아 갔다. 물기를 머금은 붓 끝이 캔버스 위로 꾹 눌리고, 선이 곧게 뻗어 나갔다.

“저는 화구에 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것 같은데.”

디무스가 웃음기 어린 음성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곱게 휜 눈매를 한 채 캔버스를 응시하던 이가 디무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녹음이 우거진 눈동자와 옅은 미소를 그리고 있는 붉은 입술.

“이런 취미를 선택하실 줄이야.”

“…리브.”

“직접 보지 않았으면 영영 믿지 못했을 거예요.”

붓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리브가 입가의 미소를 조금 더 환하게 만들었다. 그게 너무 눈부시게 빛나서, 지금 눈앞에 있는 리브가 정말 사람인지 환상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특히나 조금 전에는 그녀를 그리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했으니 착시를 보게 되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침묵하는 디무스의 모습에 환하던 리브의 미소가 점점 흐려졌다. 모호한 얼굴로 디무스의 표정을 살피던 리브가 다정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랑제스 저택의 장미가 시들지 않았어요. 그러니 늦었다고 타박하시면 안 돼요.”

“…절반이나 떨어졌어.”

“오, 그건 과장이세요. 제가 직접 보고 온 걸요?”

직접 보고 왔다는 건, 랑제스 저택을 들렀다가 이쪽으로 왔다는 소리였다. 동선을 따지자면 다소 비효율적이었다. 디무스는 어차피 곧 랑제스 저택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니까. 굳이 오갈 것 없이 편하게 기다렸으면 되었을 텐데.

디무스의 눈에 비친 의아함을 알아챈 리브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택에서 기다릴까 했는데….”

멋쩍은 표정으로 뜸을 들이던 그녀가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생각보다 일정이 길어졌더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지?”

“이곳으로 오는 게 제 예상보다 더 오래 걸렸다는 뜻이죠.”

“더 정확하게 말해 봐.”

멍청하게 얼이 빠져 있던 디무스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비스듬히 저를 외면하는 리브의 눈길을 집요하게 쫓아 기어이 눈을 맞춘 그가 그녀를 재촉했다.

“리브.”

괜히 딴청을 부리던 리브가 슬그머니 입술을 뗐다.

“당신을 빨리 보고 싶어서 왔어요.”

솔직한 마음을 듣는 건 어려웠지만, 일단 한번 물꼬를 트고 나니 다음은 수월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한 리브는 조금 전까지 민망해하던 게 전부 거짓이었던 것처럼 한결 명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디무스.”

아, 이젠 한계였다.

디무스가 리브의 허리에 팔을 휘감으며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아무리 깨끗하게 관리한다고 해도, 화실에는 물감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흰 리브의 나신이 꼭 캔버스 같았다. 군데군데 열이 올라 울긋불긋한 피부가 꼭 물감을 머금은 모양새인데, 축축한 숨결과 타액이 어우러진 게 꼭 갓 색을 입힌 듯했다.

그가 붓으로 그린 그림은 그토록 엉망진창으로 보였는데, 지금 제 아래에서 달아오른 몸은 마냥 아름다웠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까. 하얀 나신이든, 흥분으로 불긋하게 물든 나신이든 무엇 하나 안 어울리는 게 없었다. 디무스는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리브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엄지로 복사뼈를 느릿하게 문지르자 리브의 벌어진 허벅지 안쪽이 파르르 떨렸다. 곧 이어질 행위를 짐작한 여체가 질척하게 젖어 들어갔다. 축축하게 젖은 아래를 보는 것만으로도 디무스의 성기가 잔뜩 흥분해 꺼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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