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34)화 (134/138)

추기경의 방문이니 대귀족의 추문이니 시끌벅적하던 게 전부 옛일이라는 듯, 부에르노는 평화를 되찾았다.

며칠간 땅을 흠뻑 적시던 비가 그치고, 청명한 하늘과 함께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반쯤 열어 둔 창문을 통해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 앞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던 디무스가 깊이 숨을 내쉬었다. 반쯤 탄 시가를 느슨하게 쥔 그의 눈길이 창밖의 풍경에 한참이나 고정되어 있었다.

“후작님.”

언제까지고 하염없이 바깥을 보고 있을 것 같던 디무스가 그 부름에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물건이 준비됐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언제든 방문하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론 관장이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며 또 연락을 해 왔습니다만, 적당히 끊어 낼까요?”

아론은 부에르노에서 가장 큰 미술관 로이븐을 책임지고 있는 관장이자, 한때 디무스가 거래하는 모든 미술품을 담당했던 남자였다. 동시에 카밀에게 디무스에 관한 정보를 넌지시 넘긴 장본인이기도 하고.

본래 디무스의 성격이었다면 진즉 처리했겠으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는 대신 모든 거래를 끊고 새로운 곳과 거래하기로 했다. 디무스가 작정하면 변변찮은 상점 하나를 그럴듯한 미술관으로 성장시키는 것이야 어렵지도 않으니, 키울 만한 사람만 잘 고르면 될 일이었다.

애초에 부에르노의 예술 사업은 디무스의 과감하다 못해 넘치는 투자금에 크게 의지해서 성장했다. 몇 년 사이 급속도로 몸집을 부풀린 만큼, 아직도 그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컸다.

하루아침에 거래가 중단된 로이븐은 초반에는 그럭저럭 버티는 모양새였으나, 곧 한계를 느꼈는지 납작 엎드려서 기회를 달라 읍소하는 중이었다.

“그나마 있는 미술관 문도 닫고 싶다고 하나?”

나른한 음성에 묻어나는 짜증을 민감하게 알아챈 찰스가 즉각 대답했다.

“경고해 두겠습니다.”

“화가는?”

“명단을 뽑아 두었습니다.”

찰스가 디무스에게 두툼한 종이를 건넸다. 화가들의 인적 사항이 적힌 보고서였다.

들고 있던 시가를 찰스에게 주고 종이를 받아 든 디무스가 무심한 시선으로 종이를 훑었다. 다들 하나같이 훌륭한 학력과 경력을 가진 자들로, 특이한 사항이라면 전부 인물화에 능통하다고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읽는 둥 마는 둥 종이를 휙휙 넘기던 디무스가 몇 명을 골라 따로 귀퉁이를 접어 찰스에게 돌려주었다.

“미술관부터 가지.”

“바로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찰스가 나가는 걸 확인한 디무스가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보았다.

볕을 받아 유난히 반짝거리는 초록색 잎사귀 위로, 새빨갛게 만개한 장미꽃이 정원을 한가득 뒤덮고 있었다.

설마 안 돌아오진 않겠지.

“물건은 말씀하신 전시관에 모두 옮겨 두겠습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한 관장이 바짝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무심히 고개를 끄덕여 준 디무스가 습관적으로 시가 케이스를 열었다. 태연한 외관과 달리 그의 머릿속은 줄곧 복잡했다.

합격자 발표가 났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직접 애들린데로 갈걸.

하다못해 아돌프에게 합격자 발표까지 확인한 뒤 직접 데리고 오라고 할 걸 그랬지.

아돌프는 애들린데 여학교의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에 부에르노로 돌아왔다. 본래 하던 일들이 있기도 하고, 디무스가 부에르노로 귀환했으니 곁에서 보좌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필립이야 당연히 디무스의 일정에 맞춰 왔고, 로만은 애들린데와 부에르노를 오가면서 일하고 있었다.

애들린데 저택에 남은 디무스의 측근은 티에리뿐이었다.

만약 마음이 바뀌었으면 어쩌지.

이번에는 티에리를 꾀어내서 제 눈을 속이고 시간을 버는 중이라면?

“후작님?”

시가를 쥔 채 우두커니 생각에 잠겨 있는 디무스의 모습에 찰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디무스가 그제야 몸을 돌렸다. 수도에서 부에르노로 돌아온 직후엔 이렇게까지 상태가 심각하지 않았는데.

이전까지는 한 번도 티에리가 배신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코리다와 상당히 가까워진 티에리는… 솔직히 마냥 신뢰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근거 없는 의심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한번 든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코리다가 저를 탐탁지 않아 했던 것을 그는 기억했다.

코리다는 리브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리브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도 모자라 예측하지 못할 행동을 끌어내는 존재 말이다.

그에 비해 저는 어떠한가.

리브가 수도까지 저를 보러 왔을 때만 해도 디무스는 리브의 마음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예쁘게 웃고, 먼저 키스해 오고, 과거의 추억을 들려주고, 밤마다 그의 악몽을 걱정하던 리브 로이데스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떨어져 있으려니 수도에서 얻었던 자신감은 속절없이 추락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결국 제 여동생의 시험을 위해 애들린데로 돌아가는 걸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제 여동생을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아는 디무스는 차마 억지로 붙들어 둘 수가 없었다.

수도에서는 솔직히, 자신이 견딜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아주 약간은 있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자신감이 결여될 줄 알았다면, 그는 리브의 동정심을 더 열심히 부추겼을 것이다.

여동생과 비교하면 자신은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일까.

‘안이했어.’

법적 효력이 있는 서류라도 만들어 두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디무스가 이내 허탈한 숨을 뱉으며 입술을 삐뚜름하게 다물었다.

설사 그녀가 도망간다 한들, 잡아 오면 그만이다. 다만 몸만 가둬 두면 그만이라고 여겼던 과거와 달리 지금의 그는 저를 무심하게 보는 리브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애들린데 저택에서 겪었던 그녀의 무관심은 기억 속에 끈적하게 남아서 시시때때로 그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멍청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말도 안 되는 사고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랑제스 저택의 정원에 핀 장미가 하루하루 더 만개해 갈수록 특히나.

게다가 오늘 아침에는 정원 바닥에 장미 꽃잎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하고 말았다. 한동안 세찬 비가 내리는 바람에 이르게 떨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점점이 흩뿌려진 꽃잎을 눈으로 확인하니 괜스레 기분이 저조했던 참이다.

디무스는 보폭을 크게 하여 미술관을 나섰다. 떨어져 있던 장미 꽃잎을 떠올리자 다시 마음이 초조해져 불도 붙이지 않은 시가 끝을 짓씹게 되었다.

“아까 고르신 화가들을 불러 놨습니다.”

“바로 가지.”

머릿속으로 무슨 망상을 펼치든 겉으로는 여전히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디트리언 후작이었다. 디무스가 막 마차에 오르는 찰나, 따로 명령을 받고 자리를 비웠던 하인이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하인을 발견한 찰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헛기침한 그가 열린 마차 문 안쪽을 향해 질문했다.

“그리고 저… 이 물품들은 어디에 둘까요?”

디무스의 시선이 하인에게로 향했다.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굴러다니는 저택 하나 열어서 놔둬.”

“전에 폐쇄하셨던 그 저택에 화실이 남아 있습니다. 그쪽을 다시 보수할까요?”

찰스가 말하는 곳은 일전에 브레드의 누드화 작업을 위해 개방했던 곳이었다. 디무스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다른 곳으로.”

루지아의 수하에게 들킨 적이 있는 장소였다. 당연히 그곳을 다시 개방할 생각은 없었다.

“규모는 더 작아도 되니까 보안이 확실한 장소를 찾아.”

“알겠습니다.”

사유지 내에서도 쉬이 눈에 띄지 않을만한 곳으로 찾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자 찰스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하인이 들고 있는 물건을 힐끔거리는 게,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디무스는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찰스가 믿든 말든 하인이 사 온 저 화구들은 디무스가 직접 사용할 용도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에게 그림을 가르칠 선생을 고르러 갈 예정이고.

***

사실 그가 이렇게 어울리지 않게 극단적인 발상을 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일단 디무스는 리브의 그림을 더 늘리겠노라고 결심한 참이었다. 하지만 누드화를 외간 화가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평범한 초상화라면 모를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제 손으로 직접 그리는 수밖에.

그녀가 오지 않을까 봐 불안한 와중에도, 그는 그런 기상천외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하들에게 명령한 것이다. 화구와 작업실을 준비하고, 자신을 가르칠 미술 선생도 찾아오라고.

눈앞의 이 화가는 수하들이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결과물이었다.

“그, 그게…. 처음부터 이런 수준의 그림을 그리는 건….”

디무스가 예시로 내놓은 작품을 확인한 화가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가르치라는 게 아닌가.”

“…혹시 그림을 배우신 적이 있으십니까?”

“당연히 없지.”

하지만 자신은 뭐든 배움이 뛰어나니 제대로 된 선생을 들이면 금방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디무스가 하는 말을 알아들은 화가가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긴장으로 인해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가 점점 더 움츠러들고 있었다.

“저, 그, 그러면 일단 기본적인 실력을 먼저 확인해 본 뒤 진도에 관해 이야기를….”

“테스트하겠다?”

감히?

뱉지 않아도 뻔히 생략된 뒷말을 알아들었는지, 화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거의 졸도할 기세로 어쩔 줄 몰라 하며 괜히 시선을 피했다.

이래서야 디무스를 가르치기는커녕, 대화를 이어 가는 것조차 더는 불가능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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