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그라티아가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암암리에 모두가 예상한 대로, 칼리오페 추기경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디트리언 후작과 말테 공작 영애의 재판도 드디어 끝이 보였다. 오기로 재판에 참여하던 공작 영애는 어느 순간부터 대리인을 내세웠고, 그들의 기세 또한 한풀 꺾였다. 마지막 재판이 있던 날은 양측 모두 대리인이 참석했고, 그 어느 때보다 빠른 판결에 도달했다.
말테 공작가가 디트리언 후작가에 적당한 합의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요란하던 재판이 마무리되었다. 액수를 따지자면 사실상 형식적인 수준이었으며, 알만한 사람들은 두 가문의 실질적인 합의는 재판장 밖에서 이루어졌음을 눈치챘다.
얼마 뒤, 사사로운 추문으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말테 공작 영애가 잘못을 씻기 위해 스스로 수도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
재판이 끝났지만 곧장 수도를 떠날 수는 없었다. 디무스를 찾아오는 방문객이 통 끊이지 않는 까닭이었다.
본래 디무스는 손님이 방문한다고 친절하게 맞이해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을 적당히 선별해서 만나는 중이었다. 사석에서는 귀찮고 성가시다며 짜증을 냈지만 어쨌든 전처럼 안하무인으로 모두를 무시하지 않았다.
디무스를 찾는 손님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리브의 자유 시간이 늘어났다. 수도를 돌아다니자니, 디무스 때문에 그녀도 제법 유명 인사가 된 까닭에 섣부른 외출이 꺼려졌다. 그런 와중, 애들린데에 있을 코리다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수도로 올라올 때 코리다의 곁에는 티에리가 남아 주었다. 혹시라도 코리다의 상태가 나빠지면 곧바로 호전시켜 줄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함께한다니 리브도 안심하고 올라왔다. 수도에 온 뒤로도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고 말이다.
편지 내용에 따르면 코리다는 아주 무탈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입학 준비를 도와주던 아돌프가 없어서 혼자 공부 습관을 들이는 게 힘들긴 해도 씩씩하게 적응하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동네 친구들까지 사귀게 되어서 생각보다 바쁘게 하루하루가 흘러간다며 즐거워하기도 했고.
하지만 글자로 이루어진 내용이라서 선뜻 마음을 놓기도 어려웠다. 행여 리브가 걱정할까 싶어서 적당히 둘러댄 것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디무스와 함께 지내는 나날은 분명 즐겁고 편안했지만, 슬슬 돌아가 봐야 하지 않을까?
“애들린데에 말입니까?”
리브가 이러한 의사를 넌지시 내비치자 찰스와 아돌프는 난색을 보였다. 일부러 디무스에게 말하기 전 보좌관들의 반응을 먼저 확인한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무척 난처한 얼굴들이었다.
“후작님께서 일을 정리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디무스가 애들린데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그의 뒤처리를 하느라 동분서주했던 찰스는 특히나 울상이었다.
“여동생분께 가시는 걸 막는 이는 없을 겁니다. 다만 지금 가 버리시면 틀림없이 후작님도 모든 일정을 취소하실 게 뻔해서….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지 않습니까.”
그 말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잠시 고민하던 리브가 차분하게 질문했다.
“수도의 일이 끝나면 애들린데에 계속 머물러도 되는 건가요?”
“네?”
“말씀대로라면 제가 어딜 가든 홀로 움직이진 못할 것 같은데, 제가 머무르는 곳이 곧 그분이 머무르는 곳이 된다는 의미 아닌가요?”
“그건….”
찰스는 차마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구태여 듣지 않아도 그가 애들린데 저택에서의 생활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찰스를 보며 무언가 더 말을 하려던 리브는 이내 침묵했다. 디무스와 암묵적인 연인 사이가 된 뒤, 그들은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서 딱히 이야기 나눈 바가 없었다.
일단 디트리언 후작의 본가는 부에르노에 있다. 디무스는 제대 후 쭉 그곳에 자리 잡고 지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리브가 생각하기에도 디무스가 돌아갈 곳이라고 한다면 부에르노를 꼽는 게 적절해 보였다.
그렇다면 리브는 어떠한가. 사실 리브는 워낙 떠도는 생활이 익숙해서 어딜 가든 금방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 다만 지금은 애들린데 여학교에 입학하는 걸 목표로 삼은 코리다 때문에 애들린데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었다.
부에르노와 애들린데의 거리는 제법 멀었다. 장담컨대 디무스는 리브와 절대 따로 지내려 하지 않을 테고, 그녀가 애들린데 저택에 머무른다면 그 역시 애들린데에 눌러앉을 것이다.
“그,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입니다.”
곁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아돌프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어차피 코리다 양이 애들린데 여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그쪽 기숙사를 이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로이데스 양이 꼭 애들린데에 상주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리브가 수도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하반기 입학시험 날짜도 훌쩍 가까워졌다. 아돌프의 말대로 코리다가 무사히 시험을 보고 입학하게 된다면 기숙사 생활을 할 터였다. 애들린데 여학교의 기숙사 규칙을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대체로 기숙 학교들의 외출은 엄격히 통제되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코리다가 계획대로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다는 전제 하의 일이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돌프가 다소 밝아진 얼굴로 곧장 대답했다.
“재판이 끝났으니 저는 조만간 애들린데에 가서 남은 공부를 봐줄 예정입니다. 그러기로 약속하기도 했고요.”
“그건 너무 번거로우시지 않겠어요?”
“하하, 괜찮습니다. 기왕 책임지기로 했으니 끝까지 봐주는 게 맞죠.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앞으로도 제가 코리다 양을 후원하고 싶습니다만.”
뜻밖의 말에 리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돌프는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간 이래저래 친해진 터라, 좀 더 확실하게 지원을 해 주고 싶군요. 게다가 코리다 양이 아무래도 부모님의 재능을 확실하게 물려받은 것 같기도 하고요.”
일방적인 봉사 활동이 아니라 투자에 가깝다고 첨언하는 아돌프를 보며, 리브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코리다에게 후원자가 생긴다면 유일한 보호자인 리브의 부담감도 상당 부분 덜어질 것이다. 이전이라면 그것을 경계하고 의심했을 테지만, 지금은 고맙고 후련한 마음이 컸다.
마음 한쪽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 리브가 어색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아돌프의 제안을 거절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은, 디무스의 곁에 있고 싶은 모양이다.
그녀가 어디에 머무르든 따라올 그처럼, 그녀 역시.
***
리브는 코리다의 입학시험 때까지만 애들린데에 있기로 했다. 별로 긴 기간도 아니라서 리브는 동행하겠다는 디무스를 만류했다.
“굳이 혼자 가야겠나?”
“네.”
“…굳이?”
“당신 일정을 방해하면서까지 제 일정을 고집하고 싶지 않아요.”
디무스의 수도 일이 마무리될 즈음과 입학시험 날짜가 얼추 비슷해서 어쩔 수 없었다.
“전 아돌프 씨도 함께 갈 거예요. 애들린데 저택에는 거트루드 박사님도 계시고요.”
“그래, 그리고 나도 동행하겠다고.”
“그간 수도에서 방문객을 만난 이유가 있으실 거예요. 이제 와 저 때문에 생각하셨던 일을 취소하지 마세요.”
단호한 리브의 말에 디무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전 당신을 휘두르려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그런 관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못마땅한 얼굴로 침묵하던 디무스는 신경질적으로 시가를 물었다.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뿌연 연기 너머로 보이는 사내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시가 한 대를 다 피울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치미는 감정을 꾹꾹 억누르는 동안, 리브는 차분하게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재떨이에 시가를 짓누른 디무스가 느릿느릿 입술을 뗐다.
“내 불면증이 아직 치료되지 않았네.”
“알아요.”
“그대가 없으면 다시 심해질 거야.”
어찌 들으면 잠을 자지 않겠다는 협박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떨어지기 싫어서 억지로 투정을 부리는 모양새라, 리브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코리다의 입학만 확인하면 돼요.”
진심이었다. 마지막으로 코리다의 건강을 확인하고, 그녀가 기숙 학교에 잘 입학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면 이제 정말 코리다를 온전히 독립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디무스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코리다를 놓지 못해서 디무스와 함께 있는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런 뒤에 랑제스 저택으로 돌아갈게요. 그러니까 저를 기다려 주실래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디무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간 리브가 그의 뺨을 감싸 눈을 맞추었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파란 눈동자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섭진 않았다.
“나는 기다림이 익숙하지 않아. 그러니….”
디무스가 팔을 뻗어 리브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그대는 랑제스 저택의 정원에 장미가 시들기 전에는 와야 해.”
맞물린 입술 사이로 시가 향이 파고들었다. 뜨거운 혀와 함께 휘감긴 냄새는 반드시 기억하라는 듯 집요하게 입 안을 휘저었다. 리브는 기꺼이 그 흔적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