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밀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리브의 옆자리에 앉는 디무스를 보았다.
리브와 디무스가 재회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까지 억울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었다. 저 인간이 진정 자신을 겁박하던 그 사나운 사내와 동일 인물인가?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카밀의 얼굴을 보고도 디무스는 뻔뻔하게 그를 마주했다.
리브와 카밀이 무슨 대화를 나누든 곁에서 듣겠다는 태도였다. 참으로 예의 없는 짓이었으나 지적해도 물러서진 않을 성싶었다. 카밀이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부에르노의 모든 사람에게 이 모습을 보여 주고 싶군요. 아주 놀랄 겁니다.”
“그들이 놀라든 말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군.”
“애초에 이럴 것이었으면 대체 왜….”
그 난리를 친 거냐는 물음이 카밀의 혀끝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물어서 무엇하겠나. 답을 듣든 듣지 않든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텐데.
다만 지치고 생기 없는 얼굴로 도와 달라고 말하던 리브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카밀의 입장에서는 기어코 원하는 바를 움켜쥔 저 디무스의 작태가 퍽 꼴 보기 싫었다. 괜히 시비를 걸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카밀의 떨떠름한 감정을 알아챈 듯, 리브가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아무튼, 정말 죄송하고 감사했어요. 나중에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힘닿는 데까지 노력할 테니 말해 주세요.”
“인사는 괜찮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안심입니다. 애초에 수도에 온 이유가 그것이기도 했으니까요.”
카밀의 대답에 디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만남을 정리하려는 리브의 노력 때문인지 카밀의 말꼬리를 잡으며 트집을 잡진 않았다. 디무스와 조금이라도 말을 섞어 본 사람이 보면 누구라도 기가 찰 모습이었다.
적당히 하고 꺼지라는 눈빛으로 저를 노려보는 디무스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카밀이 리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로이데스 선생님이야말로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연락 주십시오.”
카밀이 품에서 제 연락처가 인쇄된 종이를 꺼내 리브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두 번째는 더 완벽하게 잘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아니, 저는….”
“더 있다간 수도 한복판에서 살해당하겠군요. 일어나야겠습니다.”
끝까지 디무스의 사나운 눈초리를 무시하며 모자를 집어 들며 일어선 카밀이 특유의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리브에게 인사했다. 그대로 몸을 돌릴 줄 알았던 그가 문득 멈칫하며 리브를 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그 모습에 리브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카밀이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챈 듯, 디무스가 얼굴을 구기며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보다 카밀의 말이 더 빨랐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로이데스 선생님.”
“네?”
“꼭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고백에 얼이 빠진 리브를 대신해, 디무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례하고 경우 없군, 엘레오노르 공자.”
“저도 당한 게 있는데 이 정도 무례쯤이야.”
“연인이 있는 사람에게 집적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한 자들의 사연을 들어 보지 못했나 보지?”
“기껏해야 연인에 불과한데 앞날이 어찌 될지 압니까. 희망을 품는 건 자유죠.”
얄미울 정도로 해맑게 웃어 보인 카밀이 이번에야말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또 뵙길 기대합니다, 로이데스 선생님.”
이번에야말로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지, 카밀이 재빨리 자리를 떴다.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리브가 멍하게 보았다. 그러다가 본능적으로 제 옆에 선 사내의 팔을 덥석 잡았다.
“안 돼요.”
“…뭐가?”
“납치든, 폭행이든, 감금이든, 뭐든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고 나니 너무 극단적인 예시를 언급한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디무스가 침묵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리브는 제 당부가 현실적임을 확인하고 말았다. 불쾌하다는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문 디무스를 가만히 살펴보던 리브가 설마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범죄를 저지르려고 하셨어요?”
“불쾌한 장소이니 이만 나가지.”
대답을 회피한 디무스가 문득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카밀이 두고 간 연락처 종이를 집어 든 그가 내용물이 반쯤 남은 찻잔 안에 그것을 구겨 넣었다. 잉크가 번지며 글자가 순식간에 뭉개졌다.
하나 겨우 연락처 종이를 훼손한 것만으로 기분이 풀릴 리 없었다. 디무스는 지금이라도 카밀을 잡아다가 총을 갈기고 싶다는 얼굴로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그의 분노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입장을 바꾸어서, 디무스가 제 눈앞에서 다른 여자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는다면 당연히 화가 날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정말 카밀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아서 당부의 말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디무스는 카밀을 해칠 능력이 있고, 세간의 규칙을 아무렇지 않게 어기는 성질머리까지 갖춘 남자이니까.
리브는 탄식을 삼켰다. 그냥 카밀에게 사과만 하려던 것인데, 어쩌다 보니 디무스의 화를 부추기고 말았다. 카밀에게 미안한 것과 별개로 리브는 그와 더 인연을 이어 갈 의향이 없었다.
“마르셀 선생님과는 다시 마주칠 일이 없을 거예요.”
리브가 즉각 해명하자 디무스가 코웃음을 쳤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카밀이 나간 곳을 노려보던 디무스가 불현듯 리브를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네.”
“무엇이요?”
“첫눈에 반했다는 것.”
녹색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디무스는 그런 리브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냉담하고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저놈보다 먼저야.”
***
카밀을 만나고 난 뒤, 디무스의 태도가 조금 이상해졌다.
갑자기 사나워졌다든가, 애정이 넘친다든가 하는 변화는 아니었다. 그는 종종 리브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고, 무언가 고민을 하는 눈치였다. 처음에는 카밀의 처리를 고민하는 건가 싶었는데, 분위기가 흉포하지 않은 걸 보니 다른 생각인 듯했다. 리브가 몇 번 넌지시 물어도 통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근래에 진행되고 있는 재판 내용에 관한 고민일까?
어스름한 새벽, 리브는 잠든 디무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그가 자신에게 말하지 않을 만한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디무스는 본인의 출신이며 과거를 너무도 쉬이 알려 주었다. 그건 리브에게 더는 무언가를 숨기지 않겠다는 의미이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그가 무언가 새로운 비밀을 만들진 않을 것 같았다.
역시 가장 유력한 건 재판 내용인데.
시작할 때만 해도 신문 1면을 장식하던 디트리언 후작과 말테 공작 영애의 사연은 이제 시들시들해졌고, 수도는 또 다른 궁중 로맨스로 한창 뜨거웠다. 신문을 통해 재판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던 리브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재판에 관한 세간의 관심이 사그라든 시점에서 뭔가 변수가 생긴 건 아닐까?
이리저리 궁리하는 리브의 귓가로 나지막한 신음성이 들렸다.
“윽….”
평온하게 잠들어 있던 디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숨소리가 급격하게 낮고 거칠어지더니 악다문 턱에 힘이 들어가고, 이마에 반짝이는 식은땀이 맺혔다. 리브가 얼른 손으로 그의 가슴을 토닥였다. 힘이 불끈 들어간 가슴팍 너머로 빠르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전해졌다.
자신의 이러한 행동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디무스는 발작하듯 잠에서 깨어났고,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그래서 리브는 될 수 있으면 그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달래는 쪽을 선택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노력이 아주 헛된 건 아니었다. 리브가 작정하고 그의 악몽을 살피기 시작한 뒤로, 증세가 미미하게 완화되기 시작했으니까.
남들처럼 긴 시간은 아니지만, 단 몇 시간이나마 디무스는 약 없이 리브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며칠간 리브는 그의 악몽을 달래준 뒤에 잠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제 행동이 무용하다면 모를까, 효과가 눈에 보이는데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실은 이렇게 디무스의 가슴을 토닥거리고 있노라면 그녀 자신도 어쩐지 위로받는 느낌이고.
“그대가 지금처럼 곁에 있으면 곧 괜찮아질 거야.”
이건 디무스에게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물론 이렇게 은밀하게 확인하지 않아도 그는 이제 어디서든 애정 표현을 꺼리지 않는다지만….
조금 음침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리브는 남몰래 자신의 의미를 확인하는 것도 꽤 기꺼웠다. 오직 제 손 아래에서만 진정되는 디무스를 보고 있노라면 만족감이 차올랐다.
“그거면 돼.”
부족한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이 남자에게 자신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음이 기뻤다.
디무스의 침상은 언제나 그녀의 것이고, 그가 몇 시간이라도 잠든 모습을 보여 주는 상대 또한 그녀뿐이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디무스의 악몽을 달래는 건 오직 리브만 할 수 있으리라. 유일하게도.
규칙적인 토닥거림을 이어가자, 헐떡이던 디무스의 숨소리가 점차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파르르 떨리던 사내의 속눈썹이 가지런하게 정돈되고, 일그러졌던 얼굴의 주름이 펴졌다.
조심스럽게 손을 뗀 리브가 디무스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준 뒤, 뺨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여전히 디무스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리브가 작게 미소 지으며 디무스의 품에 자리를 잡고 편히 누웠다. 사내는 잠결에도 제 품을 파고든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문득 그가 심술궂은 목소리로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네. 첫눈에 반했다는 것.”
뒤늦게 밀려드는 잠기운에 취해 눈을 감으며, 리브가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저도요.”
펜던스 남작가의 응접실, 그곳에서 만난 순간부터 아름다운 이 사내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음을. 첫 만남에 자신을 직시하던 서늘한 벽안을 마주한 뒤 속수무책으로 무릎 꿇었음을.
이제 그녀는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