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 완전히 안도하지는 못했다.
눈을 떼면 당장 도망갈 거라는 생각은 사라졌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리브가 혼자 돌아다니도록 두고 싶지도 않았다. 로만을 비롯한 호위를 붙여 둔 것과 별개로 말이다.
그러한 마음은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수도를 돌아다니는 날이 늘어날수록 덩달아 커졌다. 최근 그와의 관계가 호전된 리브는 웃음이 늘어났고, 디무스로서는 조금이라도 더 함께해야 그 밝은 모습을 놓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마음과 달리 그에게는 일정이라는 게 있었다. 수도에서 버젓이 놀러 다니는 디무스와 리브를 보며 잔뜩 약 오른 루지아가 그를 성가시게 하고 있었다. 그녀가 모르게 말테 가문과 따로 합의하는 중인데,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루지아는 그저 제 가문이 뒷배가 되어 줄 거라고 믿고 어떻게든 디무스와 리브를 깎아내리려 애썼다.
죽기 전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구는 그녀를 상대하느라, 요 며칠 그쪽을 신경 쓰고 있던 건 사실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엘레오노르?”
그 애송이 놈이 수도에 왔다는 보고를 이제야 해?
디무스의 사나운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찰스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지금 재판장에 있었고, 아직 일정이 끝나지 않았다. 본래 이런 사적인 잡담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아니었다. 다만 이 소식을 받자마자 전하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직감한 찰스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어렵게 보고를 한 것이다.
그로서는 최선의 노력이었으나, 디무스는 그런 찰스에게 여지없이 질책의 시선을 보냈다.
카밀이 수도에 왔다니, 지금 그놈이 누굴 만나러 갔을지는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뻔했다.
디무스가 이를 악다물었다.
회중시계를 매만지는 손길에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
디무스의 예상대로 카밀은 리브와 만난 상태였다.
오늘은 바깥을 돌아다니기보다는 호텔에서 편히 쉴 작정이었던 리브는 호텔 로비에서 마주친 카밀을 보고 무척 놀랐다. 나중에 마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와는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는 터라, 리브는 카밀에게 선뜻 인사를 건네며 아는 척했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을 본 로만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을 만한 가게를 찾아왔다. 그런 뒤 본인이 두 사람을 지켜보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리브는 로만의 청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브가 괜찮다고 하니 카밀이라고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는 썩 못마땅한 얼굴이었으나, 별수 없이 수긍했다.
그리하여 지금, 리브는 카밀을 마주 보고 앉아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찻잔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리브가 먼저 운을 뗐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괜히 저를 도와주셨다가 곤혹스러운 구설수에 시달리셨다고요. 그렇게까지… 일이 커질 거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어요.”
미안함이 가득한 리브의 말에 카밀이 고개를 내저었다.
“곤혹스럽긴 했으나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었으니 억울할 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로이데스 선생님께 구애한 건 사실이잖습니까.”
“마르셀 선생님….”
“저는 더 빨리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수도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제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신 카밀이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르번은 아예 가지 않으셨군요.”
“애써 주셨는데 사정이 이렇게 되어서 부끄럽네요.”
리브는 생각보다 부드러운 반응을 보이는 카밀의 모습에 더욱 큰 죄책감을 느꼈다.
솔직히 카밀이 보기에는 황당한 상황이지 않겠는가. 디무스에게서 벗어나겠다며 비장하게 떠난 주제에 이렇게 수도에서 버젓이 디무스와 염문설을 뿌려 대고 있으니, 카밀의 도움은 그야말로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카밀은 그녀를 도운 뒤로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까지 달게 됐다.
그가 저를 가지고 논 것이냐며 화를 내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아르번에 제 소유의 작은 별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가시기를 바란 거였는데…. 괜히 음흉한 속내를 더했다가 된통 혼이 난 셈이죠.”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 카밀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덩달아 리브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많이 난처해지셨나요?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아,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살짝 미간을 찡그린 카밀이 짐짓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제 손을 잡고 도망쳐 주신다면 그간의 노고를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 들 것 같습니다.”
리브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카밀은 그런 반응을 짐작했다는 듯, 서운한 내색도 없이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는 리브가 도망간 뒤, 부에르노에서 디무스가 표출하던 분노를 직접 본 처지였다. 게다가 같은 종류의 마음을 품고 있어 더욱 그 속내를 훤히 알아볼 수 있었다. 리브가 다시 한번 더 도망치기라도 하면, 이번에는 정말 리브의 다리를 부러뜨려서 저택에 가둬 둘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브가 다시 도망치겠다고 하면, 이번에는 부에르노에서처럼 안이하게 준비하진 않을 텐데.
“궁금한 게 있는데, 답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답이라면요.”
카밀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지금 그와 함께하는 건 로이데스 선생님의 뜻입니까?”
가문 어른들의 호된 질책을 듣고도 굳이 이 수도까지 온 건, 도망갔던 리브가 디무스와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인다는 소식에 행여 그녀가 억지로 연기를 강요받은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디무스가 리브에게 얼마나 진심으로 집착하고 있는지 알게 된 지금이라면, 제 가문의 힘을 이용해 훨씬 더 치밀하게 대응할 수 있으리라. 부에르노에서야 방심하기도 했고, 디무스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렸다.
그러나 두 번이나 치욕을 당할 정도로 엘레오노르가 만만한 가문은 아니었다. 만약 리브가 디무스의 어떠한 계획에 이용당하고 있는 거라면, 그녀의 도주를 다시 한번 돕는 게 디무스에게 보복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었다.
카밀의 물음에 리브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우는 듯 웃는 듯 미묘하게 올라간 입매에 민망한 마음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나오는 대답만큼은 단호했다.
“네. 제 뜻이에요.”
찻잔을 감싼 채 시선을 내린 리브가 조금 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원해서 곁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잠깐이나마 희망으로 반짝였던 카밀의 눈동자에 옅은 실망감이 깃들었다. 치미는 탄식을 억누른 카밀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로이데스 선생님께는 좋은 사람이군요.”
“마르셀 선생님께는 아니겠지만요.”
“네. 제겐 아주 고약합니다.”
엄살을 부리는 듯한 어투가 마치 무거워진 분위기를 가볍게 환기하기 위한 노력처럼 들렸다. 리브가 작게 웃으며 그 노력에 부응하려는 찰나였다.
“리브.”
무뚝뚝한 부름에 리브의 안색이 반사적으로 환해졌다. 의식적으로 돌변한 게 아니라, 본능적인 환대였다. 눈앞에서 리브의 그러한 변화를 본 카밀이 미소를 흐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코트를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내의 눈빛이 카밀에게 닿자 사납게 일렁였다. 부에르노에서 질리도록 보았던, 경계와 질투가 가득한 사내의 눈이었다. 디트리언 후작에게서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던 눈빛.
“아, 재판장에서 바로 오셨나 봐요.”
잠깐이나마 흉악하게 빛나던 시선이 리브에게 옮겨 가는 순간 급변했다.
“뭐 하는 거지?”
“보시다시피, 우연히 마르셀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잠시 대화를 하던 중이에요.”
리브는 디무스의 날카로운 분위기 같은 건 모른다는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황하지도, 눈치를 보지도 않는 그녀의 모습에 카밀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브가 디무스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한들, 디무스를 무서워하는 건 다른 문제일 텐데 말이다.
디무스는 두렵기는커녕 편안하기만 한 얼굴로 앉아 있는 리브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놈과 얽힌 소문에 관해 이야기해 줬을 텐데.”
“네. 저 때문에 괜한 소문에 얽혔다는 이야기는 들었죠. 그러니 그것에 관해 사과해야 하고요.”
리브의 말에 디무스가 보란 듯 코웃음을 치며 카밀을 힐끗 보았다.
“이해득실이 맞으니 나선 것이지. 구설수 또한 자처한 것이고.”
디무스는 카밀을 향한 경계심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내비치니 카밀 또한 곱게 응대하기를 포기하고 빙긋 웃었다.
“로이데스 선생님께 사과를 받을 마음은 없습니다. 굳이 사과를 받자면 디트리언 후작님께 받아야죠. 감정에 휩싸여 제 평판을 짓밟은 건 후작님이시니.”
“애초에 분별없이 남의 일에 참견한 네놈의 판단력을 탓해야지.”
“저는 그저, 마음에 둔 이의 요청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이 애송이 놈이 정신을 못 차리고….”
날 선 대화 사이로 나지막한 한숨이 끼어들었다. 뒤이어 조심스러운 부름이 이어졌다.
“디무스, 일단 앉으세요. 차를 내오라고 할게요.”
저도 모르게 조금씩 반감을 내비치던 카밀이 놀란 눈으로 리브를 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름으로 불린 디무스의 반응이었다.
“차는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마실 수 있어.”
“그럼 그냥 잠시 앉아 주세요. 대화는 마무리해야죠. 얼른 끝내고 다른 곳에서 마셔요.”
“쯧.”
저 오만하고 냉담하고 예민한 남자가, 길든 맹수가 된 꼴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