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30)화 (130/138)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디트리언 후작의 소식 옆에 리브의 이야기가 추가되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이름이 실리는 것까진 막았지만, 그마저도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었다. 리브에 관한 신상 정보는 당장 부에르노의 거리에서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손쉽게 알아낼 수 있으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코리다가 애들린데에 가 있는 게 어찌나 다행인지 몰랐다. 괜히 코리다에게 접근하는 기자가 생길 위험성은 없어졌으니.

‘아니, 사실은 아무 구설수가 없는 게 제일 좋긴 하지.’

리브는 한숨을 삼키며 잠깐 집어 들었던 신문을 가판대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그런 뒤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디무스는 오늘 재판장에 갔다. 그는 그녀가 호텔에서 자신을 기다려 주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이미 호텔 방에서 충분히 뒹굴 만큼 뒹군 리브는 단호하게 외출을 선택했다.

호텔을 나설 때만 해도 특별히 가려는 장소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거리로 나오니 홀린 듯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상점이나 건물 외관이 조금씩 달라지긴 했으나 도시의 구조나 거리 형태는 그대로라, 리브는 헤매지 않고 원하는 곳에 도달했다. 한때 부모님의 작업 공방이 있던 건물이었다.

기억 속의 공방은 지금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작은 꽃 가게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꽃 가게 외관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리브가 쓸쓸하게 몸을 돌렸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녀의 유년 시절이 깃든 아담한 저택이 있었다.

머지않아 그녀는 저택에 도달했다. 공방과 달리 저택은 거의 그대로였다. 담쟁이 넝쿨에 휘감긴 낮은 담장과 마당이라고 하기 무색할 정도로 좁은 앞뜰, 다소 낮은 2층에 색이 바랜 지붕까지.

리브가 낮게 탄성을 뱉으며 저택 가까이 다가갔다.

마음 같아서는 안쪽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창문을 통해 얼핏 보이는 내부를 보니 사람이 거주 중인 듯했다.

남의 집 앞을 알짱거리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만큼 얼른 정신을 차리고 물러섰지만, 마음속에 이는 파문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간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저를 보던 부모님과 근심 걱정 없이 자라나던 자신. 앞으로도 그렇게 행복하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날들.

코리다와 함께하는 지금 역시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저택 근처를 빙글빙글 돌면서 배회하던 리브가 마침내 자신이 자주 뛰어놀았던 작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옛 기억을 되짚느라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리브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장신의 사내를 보고서야,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음을 알게 되었다.

“벌써 재판이 끝나셨나요?”

“오늘 치는.”

무심하게 대꾸한 디무스가 주변을 힐끗 둘러보았다. 리브가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알아내려는 듯한 눈짓이었다.

“예전에 살던 동네예요.”

“예전에 살던 동네?”

“부모님이 살아 계시던 때요.”

그 대답 속에 묻어나는 그리움을 느낀 디무스가 조용히 리브를 응시했다. 리브는 묘한 얼굴로 공원을 둘러보다가 문득 웃으며 디무스를 돌아보았다.

“소개해 드릴까요?”

디무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리브는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런 뒤 옛날에 살던 집, 뛰어놀던 골목, 자주 다니던 거리와 한때 공방이 있던 자리까지. 온갖 장소를 돌아다니며 소개했다. 디무스가 딱히 적극적인 말대답을 해 주는 건 아니었지만 리브는 그저 자신이 살던 옛날을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활기를 띠었다.

“꽤 옛날인데도 다 기억하는군.”

“그럼요, 다 기억해요.”

웃으며 멀리 보이는 꽃 가게를 바라보는 리브의 옆얼굴을 가만히 보던 디무스가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계속 그렇게 곱게 자랐으면 어땠을 것 같나?”

“곱게요?”

“양친이 살아 있고, 여전히 이 동네에서 근심 없이 지냈다면.”

뜻밖의 물음에 리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무스의 물음에 관한 대답을 고민하느라 잠시 침묵하던 리브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곱게 자랐다면.

졸업하고 돌아와도 집안의 가세가 기울지 않고, 부모님과 행복한 수도 생활을 이어 갔다면. 코리다를 돌보기 위해 홀로 전전긍긍하지 않았더라면.

“행복했겠죠.”

디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대답하는 리브의 얼굴에 스친 아련한 감정을 그 역시 알아챈 까닭이었다. 그는 제 과거의 어느 지점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과거를 회상하며 저토록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리브는 당장이라도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과거를 선택할 것 같았다.

그것이 못마땅해 디무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리브가 먼저 입술을 뗐다.

“하지만 그럼 지금을 얻지 못할 거예요.”

“…지금?”

“네. 언젠가 말씀드렸잖아요. 곱게 자라지 않은 덕분에 당신과 연을 맺은 거라고.”

리브가 어색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멋쩍고 쑥스러운 감정이 담긴 미소였다.

못마땅한 마음을 내비치려던 것도 잊고 미소 짓는 리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무스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대는 지금이 행복한가?”

딱딱한 어조로 튀어나온 질문 속에 긴장감이 묻어났다. 쉬이 그러한 내색을 알아챈 리브가 의외라는 눈으로 디무스를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조금 더 입매를 허물어뜨려 웃었다.

“너무 섣부른 결론일까요?”

“아니.”

빠르게 대꾸한 디무스가 리브의 팔을 잡았다. 행복한 기억이 가득한 곳으로 가 버릴 것만 같은 그녀를 어떻게든 제 곁에 두고 싶다는 듯.

“아주 총명한 결론이야.”

***

리브는 디무스보다 수도에 관해 잘 알았다.

물론 기억하는 정보가 언제나 들어맞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몇 유서 깊은 식당이나 가 볼 만한 장소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래서 그녀는 수도의 안내를 자처했다.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을 디무스에게 소개하거나, 그때와 비슷한 시간을 새롭게 보내는 게 퍽 즐겁기도 했다.

군말 없이 리브와 함께하는 디무스 덕분에 리브는 모처럼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했다. 신문에서 디트리언 후작의 곁에 선 여자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정보를 흘리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었음에도 말이다.

디무스와 수도 이곳저곳을 방문하는 일이 늘어날수록, 주변에서 떠드는 구설수는 도리어 관심 밖이 되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아무래도 좋았다.

“저 사탕 가게 앞을 지나갈 때는 늘 멈춰 섰었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매번 혼이 났죠.”

“사탕을 좋아했나?”

“달고 맛있으니까요.”

어린 여자애의 눈에 사탕 가게는 크고 화려한 장소였다. 어른이 된 지금은 그저 작고 오래된 가게 불과하지만 그때만 해도 사탕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향기가 얼마나 환상적이었던지.

“연습용으로 사탕을 주길 잘했군.”

사탕 가게의 낡은 나무 간판을 그립다는 눈으로 보던 리브가 의아한 눈으로 디무스를 보았다. 눈을 깜빡이며 그가 조금 전 한 말을 곱씹어 보던 리브가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연습용 사탕. 시가를 피우는 법을 알려 준답시고 했던 첫 키스가 뇌리를 스쳤다.

“…그건 안 먹었어요.”

“안 먹어?”

“아마 부에르노의 집에 그대로 있을 거예요.”

리브의 말에 디무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어서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리브가 태연한 척 말을 돌렸다.

“사탕은 드시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런 걸 서랍에 두고 계셨어요?”

그 당시에야 정신이 없어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돌이켜 보면 퍽 신기하다. 가까이에서 본 디무스는 딱히 군것질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사탕이니 과자니 하는 어린애들 간식 같은 것을 가까이하지도 않으니까.

리브의 물음에 디무스는 일자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답이 선뜻 나오지 않자, 리브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디무스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 다른 사람의 간식이었나요?”

당연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쑥, 곱지 않은 물음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디무스가 눈에 띄게 인상을 찌푸렸다.

“내 책상에 다른 인간의 간식이 있을 리가.”

질색하는 얼굴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의 서랍에 알사탕 같은 게 들어가 있었을까?

“단것이 꾀어내기도 좋다기에.”

“…네?”

“그대가 애어른처럼 여간 뻣뻣한 게 아니라서 말이지.”

잠시나마 대답을 주저했던 게 전부 꿈인 양, 디무스가 태연한 어조로 답했다.

“단것이라도 물리면 긴장을 풀까 싶어서.”

그러니까, 그녀를 꾀어내고자 일부러 준비했다는 소리였다. 디무스가 그간 여러 가지 수작을 벌였다는 걸 짐작하긴 했지만 이런 사소한 것까지 의도적으로 준비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헛웃음을 터뜨린 리브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사탕을 준다고 따라가는 애가 아니에요.”

“내 기억에 그 사탕은 꽤 효과가 좋았던 것 같은데.”

“…효과가 좋았던 건 사탕이 아니라.”

사탕을 받기 전 했던, 그 예기치 못한 키스였다. 시가 향이 가득 묻어났던 그와의 첫 키스.

차마 잇지 못한 뒷말을 짐작한 디무스가 슬쩍 입매를 비틀었다.

“시가 냄새가 더 취향일 줄은 몰랐군.”

“전 애가 아니니까요.”

“그리 강조하지 않아도 알아.”

리브의 턱을 가볍게 잡은 디무스가 스스럼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들을 몰래 주시하고 있는 기자나 사진가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애가 아니라 다행이지. 이런 짓도 할 수 있고.”

리브의 맞물린 입술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으나, 그것은 곧 디무스에 의해 흔적도 없이 집어 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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