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잔을 들고 침대로 돌아오는 디무스는 나신이었다.
체액으로 전신이 번들거리고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멋있어서, 리브는 홀린 듯 그것을 감상했다. 순간적으로나마 그가 제 나신을 감상한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녀의 몸은 저 남자처럼 완벽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감사해요.”
물 잔을 받아 든 리브가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그녀 옆에 걸터앉은 디무스의 긴 다리가 보였다. 시선을 사로잡는 탄탄한 허벅지, 그리고 아래로 이어진 무릎.
섹스할 때마다 그다지 눈길을 둔 적이 없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 아주 큰 흉터가 있었다.
상체의 흉터들도 저마다 무시무시했지만, 유독 무릎의 길게 찢어진 흉터가 더욱 섬뜩해 보였다. 다친 지 오래되었을 텐데도 저렇게나 선명하고 커다란 흉터라니, 얼마나 큰 부상이었을지 안 봐도 뻔했다.
리브의 시선이 닿은 곳을 확인한 디무스가 낮게 탄성을 뱉었다.
“아.”
그녀가 묻지 않아도 넙죽넙죽 튀어나왔던 다른 흉터의 사연과 달리, 무릎 흉터에 관해서는 선뜻 답이 이어지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제 흉터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유독 부정적인 감정이 묻어났다.
리브가 얼른 입을 열었다.
“설명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억지로 캐묻고 싶진 않았다. 지금만으로도 디무스는 그녀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려 노력하고 있으니까. 이제야 겨우 서로를 온전하게 마주 섰는데, 괜히 욕심을 내다가 도리어 마음이 틀어질 수는 없지 않은가.
리브의 말에 디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고민하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느리게 입술을 뗐다.
“마지막 전투.”
그간의 전투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와는 달랐다.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말하던 무미건조한 음성이 아니라, 마치 어제 겪은 일을 이야기하듯 억눌린 어조였다.
“…많이 다치셨었나 봐요.”
“처치가 조금만 늦었으면 걷지 못했을 거라고 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회복했네.”
지팡이를 끼고 살긴 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대체로 무리가 없으니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디무스의 말에 리브가 무릎의 흉터를 물끄러미 보았다. 단지 크게 다친 흔적이라고만 치부하기에 무언가 얽힌 게 많아 보였다. 그러나 섣불리 사연을 묻기도 어려웠다.
주저하는 리브를 알아챈 디무스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이것에 대해 알려 주면 네 동정을 살 수 있나.”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적진을 기습하는 작전이었는데.”
디무스가 대수롭지 않게 말문을 열었다.
“마을이 불타고, 폭탄이 쏟아지고 난 자리에 남은 건 피난민들의 시체였지.”
놀란 리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비록 전선과 평생 멀리 살아왔지만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함부로 해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왜…?”
“거짓 정보를 믿은 지휘관이 공을 세우기 위해 독단적으로 일을 저질렀거든. 함정이었고, 도리어 기습을 당했어. 지휘관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로 보좌관이 옷을 벗으며 마무리됐네.”
디무스의 설명은 간결했다. 그러나 저만한 일이 어떻게 저렇게 간결하게 마무리될 수 있겠는가. 생략된 사연이 퍽 복잡하리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 전투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저 이야기 속에 옷을 벗었다는 보좌관이….
“그 머저리 같은 새끼의 보좌관을 때려치우기 바로 직전이었는데, 전부 물거품이 되어 버렸지.”
혀를 차며 중얼거린 디무스가 리브의 손에 들린 물 잔을 힐끗 보았다. 그 눈길에 떠밀려 잔을 비우자, 그가 빈 잔을 빼앗아 옆에 있는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리브의 허리를 매끄럽게 휘감는 손길이 의도하는 바는 명백했다. 잠시 멈추었던 행위를 이어 가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디무스의 모습에도 리브는 선뜻 가벼운 마음으로 휩쓸리기 어려웠다.
“괜히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 드린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된다면 불쌍하게 여겨. 곁에 두고 돌보면 더 좋고.”
태연하게 중얼거린 디무스가 리브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살갗을 진득하게 핥아 올리고, 빨아들이는 사이 서늘하게 식었던 체온은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열락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
스테판은 자신의 공을 디무스가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다.
늘 디무스만 험난한 전쟁터로 떠밀던 그가 느닷없이 군사를 이끌고 나선 건, 어떻게든 공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계속해서 공적을 쌓아 올리는 디무스를 바로 곁에서 보았으니, 자신도 전장에 나가기만 하면 똑같이 할 수 있으리라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스테판이 적진을 기습하기 위해 군인들을 이끌고 출정했다는 걸 디무스가 알게 되었을 때는 모든 게 늦은 뒤였다.
스테판은 마치 적들에게 공포를 선사하겠다는 듯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게 마을을 짓밟았다. 후발대로 도착한 디무스가 그곳에서 본 건 대지를 물들이는 피 웅덩이와 역겨운 악취, 불타는 건물들이었다.
현장 경험이 거의 전무한 스테판은 일방적인 살육을 자행한 뒤 잔뜩 흥분한 상태였고, 병사들은 자신이 죽인 게 위장한 적군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들이 저항하지 못한 건 단지 자신들의 기습이 완벽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문제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진짜 적군들이 승리감에 도취된 이들을 덮쳤기 때문이다. 그제야 스테판은 자신이 헛발질해도 아주 단단히 했다는 걸 깨달았다.
“디, 디무스! 당장 나를 호위해라! 지원군을 끌고 와야 한다!”
스테판은 디무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겨우 살아남은 스테판은 지원군을 보내기는커녕, 도리어 진지의 경계를 방비하며 몇 날 며칠 안전한 후방에 틀어박혔다. 그도 모자라 지원을 가겠다는 디무스를 막기까지 했다. 본인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끝내 고립된 군인들은 전멸했고, 스테판의 실수와 패전의 책임은 전부 디무스에게 넘어왔다.
마지막 전투는 디무스가 참전했던 모든 전투 중 가장 수치스럽고 끔찍한 전투였다. 차라리 전투에 휩쓸린 것처럼 위장해서 스테판을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그따위 쓸모없는 지휘관보다 군인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게 나았으리라.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돌아온 대가가 너무 컸다. 온몸을 기어 다니는 감각에 본격적으로 시달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밤마다 비명과 피가 난무하는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도.
“…스.”
이따금 아무런 까닭 없이 무릎이 쑤시기라도 하면 그날은 더욱 심한 악몽을 꾸었다. 그런 날엔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무스.”
무의미한 삶이었다. 하루아침에 목표를 잃어버린 것도 모자라, 디무스는 생에 대한 가치도 상실했다. 전장을 떠돌다가 갑자기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에 강제로 처박히게 된 생활도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무미건조한 평화에 짓눌려 살아왔다.
아니, 무미건조했었는데 조금 달라졌다.
“디무스!”
번쩍, 눈을 뜨자 어둑한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바깥으로 희미하게 빗소리가 들려왔다.
잠에서 깨어나는 느낌이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간 잠이라고 해 봐야 얼핏 선잠이 들었다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는 수준이었는데.
디무스가 힐끗, 옆을 보았다. 무의식적으로 꽉 끌어안은 품 안에서 따뜻한 사람의 체온이 느껴졌다.
“괜찮으세요?”
리브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방이 어둡기는 해도 거리가 지척이라 표정을 잘못 볼 리 없었다.
그녀가 저를 걱정하고 있었다.
걱정이라니?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싶어 리브의 흘러내린 앞머리를 살짝 쓸어 올렸다. 손에 닿는 촉감은 지금 이 순간이 현실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뜬금없이 제 얼굴을 더듬는 디무스의 행동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리브가 어색하게 목을 움츠렸다.
“악몽을 꾸시는 것 같아서 멋대로 깨웠어요.”
“…그렇군.”
디무스에게는 그리 놀라울 게 없는 일이었으나, 리브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부에르노에서야 리브를 곁에 두며 한동안 평온하게 지냈고, 애들린데에서는 악몽을 꿀 정도로 긴 잠을 잔 적이 없으니 사실상 그녀가 디무스의 밤 사정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제 나약한 모습을 누군가에게 내보인 적이 없었다. 도망쳤던 리브와 재회한 뒤에도 그녀에게 구태여 이런 모습까지 보여 줄 의향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불안정한 자신의 상태가 꽤 유용하게 작용할 수 있으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래서 늘 약을 먹었지.”
“후유증인가요?”
“제대 후부터 쭉 그랬으니까 아마도.”
리브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디무스는 저도 모르게 웃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이토록 순해 빠졌으니, 어디에든 편히 내놓으면 안 되겠다. 괜히 이곳저곳에 아까운 동정을 뿌리고 다니지 않도록 제 옆에 끼고 지내는 수밖에.
“하지만 부에르노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그대를 곁에 둔 뒤로 마음이 편했거든.”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기에 대답 또한 수월하게 흘러나왔다.
“그럼 지금은요?”
“오랜만에 과거를 떠올려서 꿈을 꿨나 보지. 하지만 그대가 지금처럼 곁에 있으면 곧 괜찮아질 거야.”
리브가 곁에 없으면 언제고 이런 편치 않은 밤을 보낼 거라는 뜻을 내포한 대답이었다. 평소라면 디무스가 답지 않게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했을 텐데,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을 본 직후라서 그런지 리브는 퍽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될까요?”
디무스는 결국 치미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단단한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게 된 리브가 불편하다는 듯 꿈틀거렸으나 디무스는 팔에 힘을 빼지 않았다. 정수리에 가볍게 입술을 묻은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거면 돼.”
디무스는 예감했다. 다시 잠들면, 이번에는 단 몇 시간이라도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을 뜨면 여전히 그의 옆에는 리브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