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27)화 (127/138)

“사실 제가 다시 수도로 오게 될 줄도 몰랐어요.”

“어째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떠났거든요.”

유년 시절의 추억이 깃든 도시라서일까. 어딜 가든 떠오르는 옛 기억이 마음을 물렁물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코리다를 책임져야 했던 리브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나약한 마음으로는 아픈 여동생을 돌보며 생계를 이어 갈 수 없을뿐더러 추억들에 젖다 보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자꾸 원망하게 되었으니까.

주저하던 손끝이 물병 하단의 서명 부근에 살짝 닿았다. 옛날에는 질리도록 보았던 부모님의 서명.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참 유려하고 멋지게 보였다. 제 부모님의 서명이 이런 고급 호텔 방을 장식할 정도로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감회에 젖어 있으려는데, 디무스가 리브를 돌려세워 눈을 맞추었다.

“고백인가?”

“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떠났음에도 이렇게 온 건, 그만큼 내가 보고 싶었다는 의미이지 않나?”

그야….

얼떨떨한 눈으로 디무스를 올려다보던 리브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디무스가 채근하듯 재차 물었다.

“여전히 내가 욕심나는 게 맞지?”

푸른 눈동자에는 반드시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얼핏 엿보였다. 뭐 얼마나 대단한 말이라고 이렇게 듣고 싶어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절절한 사랑 고백도 아니고.

“그걸 꼭 직접 말씀드려야 해요?”

“응.”

어쩐지 어린애 같을 정도로 고집스러운 어조여서, 무심코 리브는 그런 디무스가 귀엽다고 생각해 버렸다. 동시에 이런 제 감상이 참 답 없다 싶기도 했다.

아까 재판소 앞에서는 그리도 거리감을 느꼈으면서, 단둘이 있으니 통 디무스가 예전의 그 ‘대단하신 후작님’으로 느껴지질 않았다.

전에는 그가 마치 결코 손대면 안 되는 값비싼 무언가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그냥 쉬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존재처럼 여겨진달까? 전처럼 그를 원하는 게 마치 큰 죄를 짓는 일인 양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가벼운 마음이다. 제 감정을 곰곰이 곱씹던 리브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에게 선택권이 생겼다는 것을.

디무스를 쫓아 수도로 올라온 것 또한, 제 선택으로 인한 것임을.

그를 원해서 남을 수도 있고, 싫으면 떠나도 된다. 디무스의 바람과 상관없이, 그녀는 이제 스스로 그런 선택을 실천할 자신이 있었다. 그저 제 마음 하나만 기준 삼아서 말이다.

“욕심은 나는데, 순수한 감정인지는 모르겠어요.”

“순수한 감정?”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순애가 아닌 것 같아서….”

혼잣말 같은 리브의 중얼거림에 디무스가 낮게 코웃음 쳤다.

“미안하지만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이니 뭐니, 나는 그런 환상은 채워 주지 못해.”

냉소적으로 대꾸한 그가 리브의 턱을 잡아 살짝 들어 올렸다.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고 있던 리브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친 디무스가 한층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대의 감정도 그럴 필요가 없어.”

사람 하나 바라보며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는 그런 낭만적인 사랑 따위 필요 없다고 중얼거리는 디무스의 목소리가 리브의 귓가에 닿았다. 어딘가 습기가 가득한 어조의 저변에는 억누르고 억눌러도 다 감추지 못한 욕정이 묻어났다.

“그냥 만족하지 말고 뭐든 욕심이나 내. 그거면 충분하니까.”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조급하게 입술을 가르며 침범하는 혀가 그녀의 숨까지 온통 집어삼켰으므로.

창밖이 흐리긴 하였으나, 아직 해도 저물지 않은 시간이었다.

장식품 앞에서 시작된 키스에 휩쓸려 어영부영 뒷걸음질을 치다 보니 장소는 침실로 바뀌었고, 정신 차리니 옷은 발치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애들린데 저택에 머무는 동안 옷 벗기는 실력이 일취월장한 디무스는 어떤 자세에서든 리브를 신속하게 나신으로 만드는 재주를 가지게 되었다. 덕분에 리브는 몇 발자국 만에 침대 위에서 벗은 몸을 고스란히 내보이게 되었고.

커튼을 치지 않아서 밝은 내부에 민망해진 리브는 이불이라도 어설프게 덮고 싶었으나, 디무스가 거추장스럽다는 듯 이불을 침대 아래로 치워 버린 뒤였다. 휑한 전신이 조금 추운 듯했다.

리브를 눕히고 그 위에 자리를 잡은 디무스가 다시금 깊이 키스를 했다. 갈급하게 빨아들이는 힘이 리브의 입 안을 온통 헤집었다. 타액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핥아 내는 행위가 꼭, 몇 달은 굶은 짐승을 닮아 있었다.

오랜만에 몸을 겹치는 건 아니었다. 날짜를 따져 봐야 디무스가 먼저 애들린데를 떠났던 때부터 수도에서 재회하기까지 기껏 며칠 정도 쉬었을 뿐.

그런데도 리브는 자신의 입술과 목덜미, 어깨 등을 조급하게 탐하는 행위에서 무언가 다른 감정을 느꼈다.

이건 그냥 마음가짐의 문제일까?

“흐읏!”

리브의 딴생각을 눈치챘다는 듯 디무스가 리브의 어깨를 콱 물었다. 잇자국이 살짝 나는 정도의 세기였는데, 예민해진 몸은 그조차 자극으로 받아들였다.

예기치 못하게 큰 소리로 튀어나온 신음에 디무스가 잠깐 멈칫했다. 그러더니 곧 더 강한 힘으로 리브의 살결을 하나하나 빨아들였다. 희고 부드러운 살갗 위로 붉은 반점이 흐트러진 꽃잎처럼 새겨졌다. 상체 가득 울혈 자국을 만들지 않고서는 놔주지 않을 기세였다.

서늘하다고 생각했던 공기가 점차 달아오르고, 체온이 점점 더 높아지는 게 느껴졌다. 뜨거운 숨을 뱉으며 숨을 헐떡이던 리브가 자신의 가슴 위로 흐트러진 사내의 머리를 감쌌다. 부드러운 백금발이 손가락 사이로 감겨드는 게 느껴졌다.

“하아….”

목덜미로 미끄러지는 리브의 손길을 느낀 디무스가 가슴에 고개를 묻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습한 숨결이 발긋한 자극이 감도는 울혈 위를 맴돌았다.

리브의 손이 셔츠에 가로막혀 멈추자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디무스가 즉시 제 크라바트를 뜯어내듯 풀어 집어 던졌다. 그 과정에서 셔츠의 단추 두어 개가 거칠게 뜯어졌다. 헐렁해진 셔츠를 위로 올려 벗는 움직임이 아주 재빨랐다.

흉터 가득한 사내의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헐떡거리며 제 위에서 옷을 벗는 디무스를 바라보던 리브가 홀린 듯 손을 뻗었다. 리브의 손끝이 닿은 흉부 위의 흉터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디무스는 그녀가 제 흉터를 어루만지는 게 꽤 기분 좋은 눈치였다. 허리춤을 풀어 느슨하게 만든 그가 누워 있는 리브의 허리를 끌어 올려 단숨에 자세를 바꾸었다. 단단한 허벅지 위에 마주 보는 형태로 리브를 앉힌 디무스가 그녀의 등을 받쳐 주었다.

디무스의 체격이 큰 덕분에 리브는 마치 그에게 휘감긴 듯한 착각을 느꼈다. 디무스가 잡아 주는 대로 편히 몸을 기댄 리브가 가까워진 흉터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건 언제 생긴 건가요?”

그녀는 흉터 모양을 따라 위로 부풀어 오른 살갗을 매만지며 물었다. 딱히 대답을 바랐다기보다는, 그냥 단순히 아플 것 같다는 감상과 함께 튀어나온 무의식적인 중얼거림이었다.

“두 번째 전투. 아브리모에서 치른 지상전이었지.”

놀랍게도 디무스는 고민하지 않고 금방 대답해 주었다. 뜻밖에도 정확하게 튀어나온 그의 답에 리브가 놀란 눈으로 디무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곧 반대편에 있는 흉터를 건드렸다. 이번에는 작은 십자가 모양 여러 개가 붉은색으로 착색된 흉터였다.

“그건 알피오에서 수행한 작전에서 생긴 거고.”

묻기도 전에 대답이 튀어나왔다. 리브의 손이 이번에는 바로 옆의 갈색 흉터로 옮겨졌다. 물감이 번진 종이처럼 살갗이 우글거리는 흉터였다.

“퀴리노에서 폭발로 입은 흉터.”

리브의 등을 느리게 쓸어내리며 그가 말했다.

그 뒤로도 디무스는 자신의 흉터 하나하나에 관해 짤막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몇몇 작은 흉터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으나, 크고 뚜렷한 것들은 확실하게 출처를 기억하고 있었다.

사내의 가슴팍은 지도나 다름없었다. 그가 겪어 온 전장들이 그대로 새겨진 지도.

“다 기억하시는 거예요?”

“애석하게도.”

덤덤한 음성에 딱히 큰 감흥은 없었다. 그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는 듯, 이젠 전부 지나간 일일 뿐이라는 듯.

그러나 리브는 어쩐지 그 대답을 듣고 나니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기에, 흉터에 관한 그의 기억이 너무도 선명하므로.

“불쌍한가?”

“동정하길 바라세요?”

“불쌍하면 함부로 버릴 마음도 들지 않을 테니까. 그대는 순해 빠졌잖아.”

도대체 저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걸까. 리브는 헛웃음을 흘리며 디무스의 벗은 상체를 쓸어내렸다.

“동정하지 않아요. 살아남는 과정에서 얻은 치열한 흔적들이니까, 그 시간을 멋대로 평가하고 싶지 않아요.”

자그만 목소리로 속삭이며, 리브가 열 오른 디무스의 가슴을 손끝으로 느리게 긁어내렸다.

“하지만 존중해요.”

근육질의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리브의 허리를 잡은 디무스의 손아귀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그를 자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리브는 스스럼이 없었다. 오히려 더 강하게 그의 흉터를 긁었다.

힐끗, 시선을 들기 무섭게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여전히 얼굴만큼은 곱게 자란 고고한 미인이었다. 누가 디무스의 얼굴만 보고 이런 상처투성이 몸을 가졌다고 생각할까.

아, 분명 앞으로도 누구 하나 모를 것이다. 디무스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까탈스럽고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값비싼 남자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리브의 속에서 새빨간 불길을 닮은 욕정이 확 치솟았다.

“버리지 않을 테니, 주세요.”

디무스의 목에 팔을 감으며, 리브가 잦아든 음성으로 소곤거렸다.

“다 주세요, 디무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