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26)화 (126/138)

아까 루지아가 얼굴을 붉힐 때는 그토록 추해 보였는데, 리브의 발갛게 달아오른 안색은 귀엽기만 했다.

정식 재판 절차고 뭐고, 루지아는 최대한 짧게 마주하는 쪽으로 일을 처리해야겠다. 두려우니 어쩌니 해도 역시 리브를 앞에 두고 있는 게 심신에도 이로웠다. 심지어 그녀가 이렇게 제 발로 수도까지 왔는데 재판 따위에 시간을 오래 빼앗길 수는 없었다.

디무스의 수도 일정이 순식간에 변경되었음을 알 리 없는 리브는 그저 빨개진 얼굴을 가라앉히기 바빴다. 겨우 표정 관리를 한 그녀가 뺨에 대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뗐다. 녹색 눈동자가 뺨에 길게 그어진 생채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톱으로 긁히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는 리브의 음성이 묘하게 딱딱했다. 일자로 꾹 다문 입술에 힘이 들어간 것 같기도 했다.

“안타깝겠지만 흉이 계속 남아 있진 않을 거야. 피부를 살짝 긁힌 정도라.”

“그렇군요.”

돌연 리브의 음성이 퉁명스럽게 변했다. 다소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리깐 리브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토록 쉬이 얼굴에 손을 대도록 허락하는 분이신 줄은 몰랐네요.”

“덕분에 고소할 거리가 늘어났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디무스가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걱정 말게. 그대가 밤마다 긁어 놓는 것들에 관해서는 트집 잡을 생각이 없으니.”

진정된 안색이 다시 빨갛게 물들지 않을까 싶었는데, 리브는 그저 조용히 디무스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이나마 동요했던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서,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고민스러운 듯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침묵하던 리브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시들어서 말라 비틀어져도….”

마침내 리브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마른 꽃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아세요?”

디무스는 말린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제 생각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워 보인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아름답다는 이유로 말린 꽃을 화병에 꽂아 두는 게 맞을까요?”

마른침을 삼킨 리브가 디무스를 계속 바라보고 있기 힘들다는 듯, 비스듬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차라리 건드리지 않는 게 서로에게 더 나을 수도 있잖아요. 이미 시든 장미에 물을 준들 되살릴 수도 없는데, 조금만 실수해도 부서져 버릴 거예요. 망가뜨리고 후회하느니….”

“그럼 화병 말고 유리관에 보관해. 어차피 물을 줄 필요도 없을 텐데.”

불안정하게 이어지던 리브의 말이 멈추었다.

“가끔 들여다보기도 하고.”

발치를 내려다보던 리브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녹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감상만 해도 좋으니 곁에 둬.”

디무스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말라비틀어졌는데 아름답다니, 시들 걱정도 없이 평생 아름다워 보일 텐데 나쁠 것 없지 않나?”

꾹 다물려 있던 리브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디무스를 보던 리브가 손을 뻗었다. 따뜻한 숨결이 입술에 닿았다. 마치 메마른 꽃잎을 건드리듯 조심스럽고 상냥한 움직임이었다.

디무스는 그 수줍고 따뜻한 입맞춤에 오롯이 자신을 맡겼다.

한평생 누구도 가지지 못하리라고 평가받았던 값비싼 사내에게 비로소 소유의 낙인찍히는 순간이었다.

***

“무조건 수도원에 처넣을 방법을 찾아내.”

대뜸 튀어나온 명령에 아돌프와 찰스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침묵했다. 그러다가 먼저 정신을 차린 아돌프가 허허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말테의 직계이자 외동딸입니다, 후작님.”

“그래서?”

“그러니까, 외동딸….”

“말테 가문에 효과 좋은 정력제 좀 챙겨서 보내고.”

아돌프의 말을 끊으며 디무스가 냉담하게 자신의 할 말만 이어 갔다.

“말테 공작 부부는 아직 정정하니 늦둥이라도 보라지.”

애써 이성적으로 대답하려던 아돌프마저 더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정력제라는 기상천외한 선물을 말테 쪽에서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지 설명해 봐야, 디무스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으리라는 걸 그도 깨달은 것이다.

본래라면 그들은 다음 재판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디무스의 관심은 이미 한참 전부터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정확히, 저 닫힌 호텔 방 너머에.

“부를 때까지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도록.”

한 걸음 떨어진 뒤쪽에 서 있던 로만에게 마지막으로 명령한 디무스가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찰스가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후작님! 이틀을 넘기시면 안 됩니다!”

“다음 재판 날짜는 이미 잡혔습니다! 미룰 수 없습니다!”

아돌프 역시 다급하게 찰스를 거들었다. 그러나 디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망연한 표정을 한 두 사람이 굳게 닫힌 문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안쪽에서는 매정하게도 문 잠그는 소리만 들려왔다.

“…후.”

누구 것인지 모를 한숨만 한참 이어지는 호텔 최상층 복도였다.

***

디무스가 머무는 숙소까지 쫓아온 건 다소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뭐… 제 손으로 그를 끌어안고 키스했으니 이후의 수순이야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처음 애들린데를 나설 때 리브의 마음은 완전히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 수도에 도착한 뒤에도 그랬다.

굳이 아돌프나 찰스 등, 디무스를 수행하고 있을 보좌관들과 미리 연락을 취하지 않은 것 또한 그러한 이유였다. 디무스를 쫓아 오면서도 제 감정을 완전히 결정짓지 못했기 때문에.

리브는 재판소 앞에 모여 있던 수많은 인파를 떠올렸다. 굳게 닫힌 재판소 문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디무스에 관해 떠들고 있었다. 대단한 외모와 베일에 휩싸인 뒷배, 거물들을 아무렇지 않게 건드리는 배포 따위에 관해서.

부에르노에서도 심심찮게 들었던 종류의 말들이었다. 저와는 영원히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비현실적인 디트리언 후작님’ 말이다.

허공에 부유하는 대화들을 듣다 보니 새삼스럽게 디무스가 낯설어졌다. 애들린데의 저택에서 자신에게 매달리던 남자가 지금 사람들이 떠들고 있는 화제의 주인공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만약 디무스가 먼저 리브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리브는 굳이 디무스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손에 이끌려 고급 호텔의 최상층에 와 있는 지금도 여전히 현실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괜스레 자신의 팔뚝을 문지르던 리브가 뒤늦게서야 자신이 들어선 방 내부를 둘러보았다. 굳이 세세하게 뜯어볼 필요도 없이 모든 게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것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도톰한 붉은색 카펫을 가로질러 안쪽 방으로 이동하자, 길고 커다란 벨벳 소파와 테이블, 타오르는 벽난로가 보였다. 진열장에는 값비싸 보이는 술병과 잔들이 채워져 있고, 벽에는 크고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도 자리해 있었다.

휴게실처럼 보이는 공간을 지나자 이번에는 커다란 피아노가 있는 방이 나타났다. 숙박을 위한 호텔 방에 피아노라니. 아마 풍경과 함께 음악을 감상하라는 의미인 모양이다.

무심결에 피아노 건반을 훑어보던 리브의 뇌리에 과거의 어느 날이 스쳤다.

잔뜩 긴장해서 어설프게 건반을 두드리던 자신과, 등 뒤에 닿았던 사내의 손길, 아래로 떨어지던 옷가지, 나신으로 이어 갔던 연주….

별생각 없이 흰 건반을 눌러 보려던 손길을 황급히 뗀 그녀가 열 오른 얼굴을 손부채로 식히며 빠르게 다음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야말로 침실이 나오려나 싶었는데, 다시 소파가 등장했다. 조금 전 보았던 소파와는 다르게 화려한 자수가 들어간 것이었는데, 벽면에는 장식품들이 놓인 테이블로 꾸며진 휴게실이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거리는 온갖 종류의 장식품들을 스치듯 둘러보던 리브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얼핏 보면 물병 같았다. 그러나 마치 백조의 날개를 형상화한 것 같은 손잡이나 유난히 좁은 주둥이,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얇은 두께 등을 보면 이것이 물병의 용도가 아니라 장식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표면에 음각으로 새긴 기하학적인 문양 위로 미세하게 세공된 보석 장식도 들어가 있었는데, 하단으로 뻗어서 이어진 받침에는 만든 장인의 서명까지 새겨져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드나?”

멍하게 서 있던 리브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려는데, 그보다 먼저 두껍고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휙 감아 왔다.

“이 방에 전시된 것들은 전부 희소성 있는 것들이지. 구매해서 나쁠 건 없어.”

미술품은 아니지만 저마다 가치가 있는 전시품들이었다. 등 뒤로 바짝 붙어서는 사내의 존재감을 느끼며, 리브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세상을 떠난 장인들의 작품이라서요?”

“한 번에 알아챌 줄은 몰랐는데.”

귓가에 닿는 디무스의 말이 꼭 칭찬하는 것처럼 들렸다. 리브는 장식품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적어도 이걸 만든 장인이 죽었다는 건 알아요.”

귓가와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사내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든가 말든가 리브는 장식품 하단에 새겨진 서명을 몇 번이고 눈에 담았다.

“…로이데스 부부의 작품이군.”

“네.”

리브의 입매가 모호하게 일그러졌다.

“부모님이 만드신 거예요.”

이곳에서 부모님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리브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사실 이 호텔은 꽤 역사가 깊었다. 리브의 어린 시절에도 운영하고 있었으니, 족히 스물다섯 해는 훌쩍 넘긴 참이었다.

특히 이 최상층의 경우 온갖 귀빈들이 한 번쯤은 거쳐 가는 장소라며 당시에도 소문이 자자했다. 그 격을 맞추기 위해 내로라하는 장인들의 작품으로 방을 꾸몄다는 말도 들었다.

리브의 부모님도 이곳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이 방에 로이데스 부부의 서명이 들어간 물건을 납품할 거라고, 반쯤은 장난식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다.

“이렇게 금방 부모님의 흔적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리브 로이데스는 수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기숙 학교 입학 전까지 수도 곳곳을 누비며 살았었다. 중산층 가정임에도 실력 좋은 부모님의 수입 덕분에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고, 수도의 어느 동네를 가나 추억이 가득했다. 부모님의 마차 사고 전까지만 해도 수도에서의 기억은 온통 좋은 것뿐이었다.

그녀가 코리다를 데리고 지방을 전전하게 된 것 또한 그 추억을 견뎌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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