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25)화 (125/138)

“디무스!”

시선을 하늘에 둔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디무스가 멈칫했다. 시중인들을 이끌고 씨근대며 다가오는 이는 루지아였다.

잠깐 딴생각에 빠져 너무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보내 버렸다. 디무스가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호위들이 루지아를 막으려 했으나, 디무스가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내저었다. 루지아 역시 제 호위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루지아는 모자에 달린 검은 망사를 얼굴 위로 드리워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노한 얼굴을 전혀 가려 주지 못했다.

“당신이 누굴 믿고 이러는지 알겠는데, 그분이 계속 도와주실 것 같아요?”

“하?”

“이름뿐인 작위 하나 들고 있는 당신과 우리 말테 중에 누가 그분께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나를 이곳에 세운 대가를 치를 거예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나는 그저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명예를 지키려는 것뿐인데.”

“사랑하는 여자? 이 가증스러운! 그 계집을 핑계로 말테를 노리는 당신 속셈을 모를 줄 알고! 스테판과 짜고 나를 물 먹이려는 거죠?”

헛다리를 짚어도 단단히 짚은 루지아를 무료한 눈으로 보던 디무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머저리가 그리우면 애꿎은 남의 여자 건드리지 말고 그놈이나 물고 늘어지는 게 어떤가.”

“이이…!”

루지아가 분을 못 이겨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지금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이 재판장 앞이며, 이른 새벽부터 이슬을 맞으며 버틴 기자들이 아예 담벼락에 매달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물론 두 사람의 대화가 저 기자들에게 들리진 않을 터였다.

그러나 대화가 안 들린다고 내용을 짐작하지 못할까. 적어도 지금 루지아가 화가 잔뜩 난 상태라는 건 다들 알아보았겠지.

디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살짝 고개를 비틀어, 기자들에게 제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돌린 그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진흙은 하루빨리 씻어 내야 마땅하지. 안 그래?”

“뭐라고요?”

“앞으로 진흙이 묻으면 내가 털어 주겠다고 장담했거든. 그런데 그냥 치우자니 워낙 성질이 더러워야 말이지. 기왕 처리하는 거 확실히 하는 게 좋지 않나.”

검은 망사 너머의 눈빛에 불꽃이 튀었다. 이를 아드득 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루지아가 있는 힘껏 손을 휘둘렀다.

짜악!

피할 수도 있었겠으나, 디무스는 순순히 제 뺨을 내주었다. 동시에 어디선가 플래시가 크게 터졌다.

그것이 루지아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그녀는 뒤늦게 저를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인식하고선 입술을 깨물었다.

“후작님!”

놀란 찰스에게 손을 휘저어 보인 디무스가 냉담한 눈으로 루지아를 응시했다.

“아돌프, 폭행에 관한 건 진행 중인 사안과 별개로 고소해.”

디무스의 말에 루지아가 당황한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포, 폭행?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어서! 그러는 당신은 내 앞에서 살인을 저지른 주제에!”

“저런, 말테 공작 영애. 증인이 있나? 아니면 증거라도?”

루지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연히 그런 건 없었다. 눈앞에서 사람을 쏴 죽이는 디무스의 과격함에 놀라기만도 바빴는데 그런 걸 챙길 정신이 어디 있었겠는가. 이후 사라진 제 수하들도 아마 디무스에 의해 살해당했으리라 예상되지만, 그도 시신을 찾아야 뭐든 확실하게 뒤집어씌울 수 있는 법이었다.

“더 할 말 없으면 먼저 실례하지.”

입술을 벙긋거리는 루지아를 두고, 디무스가 고고하게 몸을 돌렸다. 루지아의 긴 손톱에 긁혔는지 디무스의 뺨에는 붉은 생채기가 남은 상태였다. 그것은 흉해 보이기보다는, 도리어 얼음처럼 차갑게만 보이던 남자에게 처연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여전히 누구 하나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기에, 그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유유히 마차를 타고 떠날 듯했다.

그러나 그대로 모두를 무시하고 지나칠 줄 알았던 디무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인파 너머에 꽂혔다.

디무스의 시선이 닿은 곳에 모여 서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물러났다. 사람들이 물러선 자리에 덩그러니, 누군가 홀로 남아 있는 게 보였다.

순식간에 주목을 받게 된 게 민망하다는 듯 주춤거리는 이는 리브였다. 그녀는 디무스가 이렇게나 쉽게 저를 발견할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조금 전의 여유로웠던 걸음은 전부 집어치운 디무스가 빠르게 리브에게 다가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리브가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디무스가 낮게 속삭였다.

“마차에 올라서 이야기하지.”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몇몇 이는 사진기까지 들고 있질 않나. 디무스는 리브의 모자챙을 아래로 내려 주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 행동을 통해 리브의 정체를 알아챈 누군가 슬그머니 사진기를 들려 했으나, 디무스의 호위가 즉각 막아섰다.

그러는 사이 당장 리브를 마차에 태운 디무스가 신속하게 문을 닫았다.

“로만 경은?”

“옆에 있었어요.”

그랬나? 리브를 발견한 순간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시야에서 지워 버리는 바람에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로만이 곁에 있었다는 건 리브가 스스로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의미일 텐데.

“왜 여기에 있지?”

리브를 보고 싶어 했던 것과 별개로, 그녀가 나타남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리브 로이데스’라는 이름이 노출되는 건 꺼려졌다. 시끄러운 가십 거리로 오르내리는 건 말테와 엘레오노르, 그리고 제 이름이면 충분한데.

“생각보다 재판이 길어지고 있다고 해서….”

“아니, 왜 수도에 올라왔느냐는 말이네.”

다소 날카로운 디무스의 목소리에 리브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제가 이곳에 온 게 후작님께 방해가 되나요?”

리브의 물음에 디무스가 멈칫했다. 잠시 침묵하던 디무스가 천천히 말했다.

“당장 내일 아침 신문에 그대 이름이 실릴 수도 있어.”

“…조금 전 인파를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리브의 얼굴에 착잡함이 스쳤다. 그 태도를 보니 조금 안이한 마음으로 재판소 앞을 얼쩡거리고 있었던 듯싶었다.

차라리 모른 척했어야 했나?

하지만 보이는 걸 어떻게 모른 척한단 말인가. 홀로 눈에 띄게 아름답지나 말든가. 사람들 틈에 두었다간 온갖 놈들의 추파나 받고 있었을 텐데, 그냥 이목이 쏠리더라도 얼른 마차에 태우는 쪽이 나았다.

어렵지 않게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 디무스가 다시금 질문했다.

“그러니 묻는 거야. 그대는 그런 걸 질색하지 않았나?”

“그런 걸 싫어하는 건 후작님도 마찬가지시죠.”

그건 사실이었다. 싫어하는 데도 이렇게 자처해서 시선을 끌고 있었던 건 전부 리브 때문이고 말이다.

디무스는 리브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애들린데를 떠나며 내내 바닥을 기어 다니던 기분이 상승하면서, 조금씩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더해졌다.

제 발로 곁에서 떨어져 주었는데, 어째서 직접 이곳까지 왔을까?

디무스가 다시 한번 리브에게 대답을 재촉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으고 시선을 고요히 내리깔고 있던 리브가 문득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디무스의 수면제가 들어 있는 약통이었다.

“두고 가셨어요.”

순간 부풀어 오르던 기대감을 따라 슬슬 올라가던 입매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약병을 받아든 디무스는 이것을 창밖으로 집어 던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주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곧 약병을 꽉 움켜쥐며 자신의 충동을 억눌렀다.

약병을 가져다주는 게 목적일 리가 없지.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설마 이걸 전해 주러 오진 않았을 테고.”

정작 할 말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괜히 입술을 깨물며 시선만 이리저리 옮기던 리브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제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재판이라고 하셨잖아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쥔 리브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당사자인 제가… 남의 일인 양 멀리 떨어져서 기다리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번에야말로 디무스는 실망감을 느꼈다.

리브의 성격을 고려해 보면 조금 전의 설명이야말로 퍽 그럴듯한 이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냥 저로 인해 일어난 소란에 책임감과 죄책감을 품은 모양이었다.

약통을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왜인지 모를 긴장감으로 경직되어 있던 어깨도 아래로 늘어졌다.

애써 표정을 가다듬은 디무스가 마차 빈 좌석에 약병을 툭 던져 놓으며 리브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게 뭐죠?”

놀란 목소리와 함께 뺨에 따뜻한 손길이 닿았다. 그것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디무스의 곁에 바짝 다가온 리브가 보였다.

디무스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리브가 뒤늦게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그러나 디무스가 멀어지려는 손을 얼른 잡아채는 바람에, 스치듯 닿았던 리브의 손이 디무스의 뺨을 완전히 감싸게 되었다.

“만져. 그대는 본래 내 흉터를 만지는 걸 좋아했잖나.”

“그, 그건…!”

리브가 기겁하며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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